소설리스트

프로페서-373화 (373/500)

인맥빨 (2)

“정말 의외의 제안이군요.”

정호순 병원장의 표정에 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아직 의심을 모두 지운 건 아니지만, 분명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것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하실 줄 알았는데.”

“아, 그러셨습니까.”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니까요. 들리는 소문도 있고 말이죠.”

정호순도 병원장이긴 하지만 명인대의 교수이기도 했다. 그래서 들어오는 정보는 크게 다르지 않다.

역시 그는 민우가 선거 준비를 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전에 한진섭, 서강일과 의논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과는 별개의 안건으로 봐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휴머니티를 설립한 이유 중엔 사회공헌활동도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마 정연주 선생이 설명해 드렸을 것 같습니다만.”

“아아. 맞아요. 예전부터 연주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당찬 말을 하기도 했지요. 바로 박 교수님을 만나고 나서부터였지.”

정호순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었다.

그는 차를 음미하며 옛 생각에 잠긴 듯했다. 민우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좋습니다! 박 교수님의 호의는 받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휴머니티는 오프라인 공동체지만 온라인 원격 교육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병원 운영이나 환아들의 면역력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방문 교육보다는 원격 교육이 좋지 않겠습니까?”

“음, 옳으신 말씀입니다. 감염의 우려가 있으니, 방문은 가급적 피하는 게 좋겠지요.”

“그래서 원격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려 합니다. 영유아 콘텐츠는 물론, 중고등학교 교과과정을 커버할 수 있는 야심 찬 프로젝트죠.”

민우가 자신 있게 말했다. 정호순 병원장의 눈이 반짝 빛났다.

“환아들은 휴머니티에서 지급된 전용 단말기로 공부하게 될 겁니다. 필요하다면 선생님과 화상 대화를 할 수도 있겠죠. 어문학은 물론 사회과학, 자연과학과 예체능도 모두 커버 가능합니다.”

휴머니티 구성원의 전공이 다양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문학이야 담당할 사람이 넘쳐나는 상황.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분야는 정연주와 장철호가 맡았다. 예체능은 주예린과 하지은이 담당하게 된다.

대부분 명인대 교수이거나 현직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사람이라, 자격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다.

굳이 문제가 있다면 그들의 스케줄을 따로 빼야 한다는 것 정도.

그밖에 부족한 과목은 휴머니티 학생 중에서 보충하기로 했다. 물론 강요할 생각은 없다. 뜻을 함께할 사람을 선별할 계획이다.

“뭐, 나도 휴머니티라는 곳에 대해 들은 바 있긴 하겠지만…… 단말기까지 지급한다면 재정에 부담이 크지 않을까요? 거기에 원격 교육이라면 서버나 인프라 구축이 필요할 텐데 가능할는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건 대한전자에서 후원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빠르시군요.”

“바쁘게 움직인 건 아니고, 휴머니티 캠퍼스 조성 과정에서 이미 협의가 되었거든요. 좀 지난 일입니다.”

그 부분에서 정호순 병원장은 충분히 납득한 듯했다. 사전에 그런 협의를 했다면, 적어도 총장 선거와는 별개로 봐달라는 민우의 말에는 설득력이 충분히 실린다.

이미 사전에 준비하고 있다는 게 객관적으로 증명되는 거니까.

무엇보다도 정호순 병원장도 대한그룹 사람이다.

대한전자에 해당 사실을 확인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정호순은 마음속으로 고민하고 있던 하나의 문제에 확실한 결론을 내렸다.

“좋습니다. 좋아요. 말로만 들었는데 박 교수는 실제로도 대단한 사람인 것 같군요. 감탄했습니다.”

“아닙니다. 아직 갈 길이 머네요.”

“제자도 이런데 그 스승님이야 더 대단하시겠지요. 박 교수님이 가시는 길, 내 배려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군요.”

“아, 감사합니다.”

배려.

정호순 병원장은 그런 표현을 썼다. 민우는 내심 궁금했다. 그의 ‘배려’가 앞으로 어떤 모양으로 다가올지를.

“이제 궁금증은 모두 풀렸습니다. 실무에 대해서는 밑에 직원에게 언질해 둘 테니 협의해 보시면 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병원장님.”

“그 말은 내가 해야지요. 고맙습니다. 우리 환자들을 생각해 주셔서.”

“한때는 저도 여기 환자였으니까요.”

“하하하. 그렇군요.”

일 이야기는 모두 끝났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났음에도 전혀 어색함 없이 사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 * *

늦은 저녁, 민우는 명인대 근처에 있는 술집에 들어섰다.

그곳엔 먼저 도착한 한진섭과 서강일이 맥주를 마시며 떠들고 있었다. 그들을 발견한 민우가 합석했다.

한진섭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불만을 표했다.

“뭐 이리 늦어? 반주하자던 사람이 여덟 시가 넘어서 나타나냐?”

“병원장님하고 저녁 식사하느라 좀 늦었다.”

“쿨럭!”

한진섭이 마시던 맥주를 뿜을 뻔했다. 입가에 줄줄 흐르는 맥주를 손등으로 닦으며 그가 목청을 높였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차를 마신 게 아니라 저녁까지 먹었다고?”

“차도 마시고 저녁도 먹었지.”

“캬! 박민우 클라스 오지네! 한 번에 병원장님 마음을 사로잡은 거냐?”

“야. 학생들이 듣겠다.”

아무래도 명인대 근처에 있는 술집이라 학생들의 수가 많긴 했다. 민우가 눈치를 줬지만 한진섭은 그러든지 말든지 싱글벙글 웃으며 맥주 두 잔을 추가로 주문했다.

“좋아! 형이 오늘 한 잔 산다. 실컷 마시라구!”

“한 달 용돈 30만 원이라고 질질 짤 때는 언제고?”

“30만 원? 하하하하!”

서강일이 웃음을 터트렸고, 한진섭은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걸 여기서 말해?”

“다 아는 사실 아니었어?”

“어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곧 맥주가 추가로 나왔고, 세 사람은 다시금 즐거운 마음으로 잔을 부딪쳤다.

서강일이 민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무튼 고생 많았다. 이제 마무리만 남은 것 같네.”

“다 너희들 덕이지. 미팅 나가기 전에 상의하길 잘한 것 같아. 특히 진섭이 덕분에 퍼즐이 잘 맞춰졌어.”

“당연하지! 내가 동남풍을 일으키지는 못해도 그 정도 짱구는 굴린단 말씀.”

“벌써 취했냐?”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됐으니 썰 좀 풀어봐. 안주 떨어져 간다.”

한진섭이 채근하자, 민우는 병원장실에서 오간 이야기를 모두 전했다.

그들의 감상도 민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정호순 병원장의 마지막 멘트가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스승 언급을 했다면 병원장도 서지훈 선생님 때문에 온 거라는 거 알고 있었다는 거네. 거기에 배려해 주겠다고 했다면…….”

“이제 한번 해볼 만해진 느낌인데?”

한진섭과 서강일이 각각 소감을 밝혔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의대 학장님 뵈러 갈 때는 서지훈 선생님하고 같이 갈 생각이야.”

“일이 술술 잘 풀고 있구만! 이러다 부총장 자리는 그냥 뚝 하고 떨어지겠어!”

“부총장은 무슨.”

“솔직히 욕심나지 않냐? 그래도 명색이 러닝메이트인데 그 정도 자린 주시겠지.”

한진섭이 마치 자기 일인 양 떠들었으나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금 이렇게 사람들 만나고 다니는 것도 힘들어 죽겠어. 강의도 해야 하고 논문도 써야 하고 자식 농사도 지어야 하고. 몸이 세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근데 선거 준비까지 하니 쓰러지기 직전이야.”

“쓰러져도 고쳐줄 사람 많잖아. 이소윤 선생이었나. 그 친구한테 부탁하면 그만이지.”

“국시나 패스하고 오라고 해.”

추가한 술과 안주가 나왔다. 그리고 대화의 화제가 휴머니티로 바뀌었다.

애초에 오늘 술자리도 한진섭이 주도한 것이었다.

휴머니티 캠퍼스에서 매번 야근하는 서강일을 격려하기 위해서.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료들과 성과를 공유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 번아웃이 오지 않는 법이니까.

그걸 잘 알고 있던 한진섭은 닭꼬치를 물어뜯으며 서강일에게 물었다.

“학장 노릇은 할만해?”

“학장은 무슨. 아직은 잘 모르겠다. 시행착오의 연속이지 뭐.”

“말은 그렇게 해도 성과는 좋잖아? 학생들 만족도도 좋고.”

서강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잔을 들고 맥주를 마실 뿐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우와 한진섭은 아직 그가 휴머니티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기다렸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서강일이 만족스러운 해답을 찾을 때까지.

바로 그때.

“남자들끼리 우중충하게 모여서 뭐 하고 있으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세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그곳엔 주예린과 이수빈이 서 있었다.

한진섭이 깜짝 놀랐다.

주예린이 그를 추궁하듯 노려보는 걸 보니, 아무래도 다른 핑계를 대고 술자리에 나온 것 같았다.

“와우! 한 선생님. 요즘은 집들이를 호프집에서 하나 보죠?”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용돈 삭감이야.”

“아 왜!”

한진섭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손을 허리에 올린 주예린이 바싹 독이 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왜란 말이 나와? 남은 강의하면서 글도 쓰고 바빠 죽겠는데 말이지! 여기서 히히덕거리면서 놀고 있었어?”

“우리가 남이야?”

“뭘 잘했다고 말을 돌려?”

“오해야.”

“오해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부부싸움이 시작되었고, 민우는 살짝 옆으로 옮겨 앉아 이수빈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녀는 얼마 전 민우가 선물한 가방을 메고 나왔다.

그때 불현듯 깨달았다.

주예린이 왜 저렇게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는지 말이다. 그녀는 눈치가 빠르다. 친한 친구가 새 가방을 메고 나왔으니 어디에서 났는지 물어봤겠지.

아니나 다를까, 주예린이 민우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민우 선배 발톱만이라도 닮아봐라! 와이프 고생한다고 백도 사주고! 내가 뭐 그런 거 받는 건 기대도 안 해. 왜 이렇게 이해심이 없어?”

“…….”

순간 살기를 품은 한진섭의 시선이 민우에게 날아와 꽂혔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민우가 잘못한 건 아니니까.

“그만하고 예린이 너도 앉아. 사람들 쳐다본다.”

서강일이 도와준 덕에 급한 불은 껐다.

일단 주예린은 한진섭의 옆에 앉았다.

서강일이 메뉴판을 건넸다.

“술은 뭘로 할래? 소주? 아니면 맥주?”

“소주 마시면 병나발 불 게 뻔하니 오늘은 맥주로 하겠어요.”

덤덤하게 말한 주예린이 호출벨을 눌렀다.

어차피 메뉴판을 볼 건 없었다. 단골 술집이었으니까.

곧 맥주가 나오자 주예린은 마치 가슴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뒤끝이 오래 갈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웬일인데?”

민우가 물었다.

“이 선생도 연구실에 있다고 해서 맥주나 한잔하자고 했죠. 남편께서 오늘 집.들.이. 예정이셔서.”

“넌 왜 거짓말을 해서는.”

민우가 혀를 찼다. 하지만 한진섭도 할 말은 많았다. 다만 여기에서 꺼내기 힘들 뿐이지.

“그리고 주 선생 너. 뭔가 바랄 게 있다면 용돈부터 올려주는 게 어때?”

“맞아. 우리 집은 각자 돈 관리하고 생활비만 모으니 선물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되더라고.”

이수빈까지 거들었다. 한진섭은 문득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 직전이었다.

“음…… 그래요?”

하지만 주예린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다.

민우가 나섰다.

“진섭이가 해주기 싫어서 안 해주는 줄 아냐. 돈만 있어 봐. 이것저것 잔뜩 해줄걸? 의리 하난 끝내주잖아.”

“으음…….”

한진섭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기던 주예린이 결정을 내렸다.

“좋아요. 그럼 용돈을 50만 원으로 올려볼까.”

“야. 좀 더 써라. 어차피 너한텐 50만 원이나 100만 원이나 별로 차이도 없지 않아?”

“음, 인심 썼다! 그럼 100만 원으로.”

지옥으로 떨어졌던 한진섭이 극적으로 천국으로 귀환했다.

“자자! 건배! 하하하하! 주예린 작가님을 위하여!”

“좋댄다.”

“아이구 그럼요! 좋습니다요!”

하지만 남편이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진즉 용돈을 올려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잔이 부딪치고, 민우와 동료들은 오랜만에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민우는 과음하지 않았다.

바로 내일, 명인대학교 총동문회 정기총회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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