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72화 (372/500)

인맥빨 (1)

이소윤은 명인대 부속병원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캔커피 두 개가 들려 있었다.

평소 민우가 즐겨 마시던 브랜드다.

민우가 다가서자, 그녀는 꾸벅 인사하곤 커피를 내밀었다. 민우는 웃으며 캔커피를 받아들었다.

“이런 건 내가 사 왔어야 하는데.”

“마침 편의점 갈 일이 있었거든요. 간 김에 선생님 생각나서 샀어요.”

“잘 마실게.”

두 사람은 근처에 있는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정문 앞쪽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서, 산책하는 환자들이 종종 보였다.

이소윤은 조금 지쳐 보였다.

“실습이 꽤 힘들었나 봐?”

“말도 마세요. 이제 국시도 얼마 안 남아서 공부도 해야 하고…… 봐야 할 것들이 많아요. 그래서 체력이 좀 달리네요.”

“그래도 곧 청강 수업이 하나 끝나니까 마음은 후련하겠구만.”

바로 민우 자신의 수업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제 다음 달이면 종강이다.

이소윤은 멋쩍게 웃었다.

“원래는 2학기 때도 청강하려고 했는데…… 좀 힘들 거 같아요.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청강은 언제든지 받아줄 테니까 국시부터 합격해. 명인대 의대에서는 국시에서 떨어지면 사람 취급 안 해준다며?”

“그건 또 어디서 들으셨어요?”

“양 선생한테.”

명인대 의대는 국내 의대 중 가장 티어가 높다. 수재들 중 수재만 모인 곳이기 때문에 국시에서 떨어지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

이소윤은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 오빠가 정말 이런저런 이야기 다 하고 다니네요.”

“술자리에서는 으레 그러기 마련이니까.”

“많이 친해지셨나 봐요. 다음엔 셋이 같이 모여요.”

“좋지.”

서론이 끝났다. 이야기를 길게 끌면 이소윤이 힘들 것 같아, 민우는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혹시 의대 학장님하고 좀 친분이 있나?”

“학장님이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는지 이소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통 부탁이 있어 찾아오는 경우는 질병에 관련된 것들이었으니까.

민우는 현재 서지훈 교수 캠프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총장 선거에서 의대 쪽 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했다.

똑똑했던 이소윤은 바로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의대 학장님을 뵙고 도움을 청하시려는 거네요.”

“무턱대고 찾아가는 것보단 먼저 말씀 좀 드리고 찾아뵙는 게 더 모양새가 좋으니까. 그리고 학장님이 어떤 분인지도 전혀 모르는 상황이고.”

“그러셨구나…… 지금 학장님은 강유찬 교수님인데요. 천상 의사예요. 오래전부터 여기저기서 오퍼가 있었는데 계속 거절하고 계세요.”

“그래?”

이소윤은 확신에 찬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과대학장인 강유찬이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천상 의사’라는 말이 나쁜 표현은 아니니까.

“그나마 학장직을 수락하신 것도 제자들을 좀 더 훌륭히 키워보겠다는 마음으로 하신 거라고 알고 있어요.”

“학자 스타일이신가 보네.”

“어찌 보면 선생님하고 많이 닮은 부분이 있어요. 사람들이 의사인 데다 교수까지 하면 돈과 권력에 욕심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그런 분들은 그리 많지 않거든요.”

“그럼 말이 잘 통하겠는데?”

“아마도요.”

제자들을 훌륭하게 키우고 싶다. 그런 후학을 위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은 물론 서지훈 교수와도 결이 같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살짝 달라진다.

‘독대하는 것보다 서지훈 선생님과 같이 움직이는 쪽이 좋겠어.’

서로 의기투합할 수 있다면 그 효과는 배가 될 테니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야망이 있는 사람을 상대해야 했다면, 민우로서는 버거운 일이 되었을 거다.

이렇게 학교 내에서 정치적으로 활동하는 것도 상당히 큰 부담이 되고 있었다. 이런 일을 많이 해보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대학을 바꾸고 학계를 개혁하겠다는 일념으로 계속 활동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조만간 정호순 병원장님하고도 미팅할 예정이야.”

“그쪽에 아는 분이 계셨어요?”

“같이 프로젝트 하는 친구의 삼촌이시거든. 대한그룹 쪽 사람인데, 미팅 좀 잡아달라고 부탁하고 오는 길이지.”

“아, 그렇구나. 선생님 은근히 인맥이 대단하시네요. 대한그룹이라면…….”

민우는 의대와 부속병원의 관계를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물었다.

“병원장님을 먼저 만나는 게 좋을까, 아니면 의대 학장님을 먼저 만나는 게 좋을까?”

“제 생각엔 병원장님을 먼저 뵙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의대 선배거든요.”

“선배? 병원장님이 학장님 선배라는 거야?”

“맞아요. 두 분 꽤 친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아하.”

“중요한 일이니까 먼저 뵙고 상의드리는 모양새를 취하면 좀 더 좋지 않을까요? 그럼 나중에 학장님을 찾아뵈었을 때 이야기가 좀 더 수월할 거고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정리였다. 민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맞는 말이네. 의대도 상하 관계가 굉장히 확실한 곳이니 그렇게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다.”

“강유찬 학장님께는 제가 따로 말씀드려 볼게요.”

“괜찮겠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녜요. 그리고 의대 교수님들도 선생님께 관심이 있으신 거 같고.”

“그건 또 의외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병원장님은 언제쯤 뵈어요?”

“아직 확정은 안 됐는데, 조만간이야.”

“그럼 다음 주 중으로 약속 잡아볼게요.”

“고맙다.”

이소윤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

정호순 병원장과의 만남은 즉시 이루어졌다.

정연주가 정호순 병원장이 아끼는 조카라서 그런지 바로 다음 날 미팅이 성사되었다. 민우는 잘 차려입고 병원장실에 방문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박민우입니다.”

“박 교수. 어서 오세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자. 이쪽으로 앉으시죠.”

민우 이상으로 아주 점잖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한참 윗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민우에게 깍듯이 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민우는 마음을 놓지 않았다. 으레 이런 사람들이 한 방이 있는 법이니.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아,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요. 박 교수의 활약상은 연주 통해서 잘 듣고 있으니까.”

“부끄럽습니다. 오히려 제가 정 선생 도움을 많이 받고 있는데요.”

허허 웃은 정호순 병원장이 은근한 눈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연주 그 녀석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그룹을 위해 일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거든. 저렇게 공부나 하다 늙겠구나 생각했는데, 웬걸. 사람이 아주 바뀌었지 뭡니까. 하하하.”

그러면서 정호순 병원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바로 민우 덕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호평이 이어지자 민우는 좋은 예감이 들었다. 이렇게 호의적이라면 목적을 이루는 것도 수월하지 않을까.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까. 민우는 다시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래서 대한그룹 내에서도 박 교수를 아주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장가만 일찍 가지 않았더라도 혼담이 오가지 않았을까요?”

“과찬이십니다. 참, 아주 늦었지만 감사하단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음? 무슨 일로 말입니까? 내 기억에 박 교수님께 인사를 드릴 만한 일을 한 적은 없는데…….”

“몇 년 전에 여기에 입원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병원장님께서 잘 봐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직접 뵐 일이 없어서 미루고 있었는데 이제야 인사드릴 수 있겠네요.”

정호순 병원장은 뭔 소린가 싶어 눈을 깜빡이더니 호탕하게 웃었다. 예전에 정연주가 따로 찾아와 부탁을 한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하하하하! 듣던 것 이상으로 참 바른 분이셨군요. 옛날 일을 이렇게 말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말이지.”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는 저도 대학원생이라 여러모로 어려웠을 때였는데 덕분에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아닙니다! 우리 병원의 서비스에 만족하셨다니 그걸로 충분합니다. 인사는 넣어 두십시오.”

그래도 기분이 좋은지 정호순 병원장은 연신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때마침 비서가 준비해 준 녹차를 음미했다. 고급스러운 향이 돋보이는 차였다. 다음에 또 오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날 정도였다.

그때 정호순 병원장이 물었다.

“그런데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찾아오신 건 아닐 테고…… 무슨 일로 오신 겝니까?”

다소 경계심이 묻어 있는 한마디였다.

민우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병원장님께 드릴 제안이 하나 있어서 바쁘신 와중에 뵙기를 청했습니다.”

“제안이요? 그게 무엇인지요.”

“예전에 제 와이프와 명인대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봉사활동이라면…….”

“‘우리병원 선생님’이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때 몇몇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준 일이 있었어요.”

“아! 그 프로그램이군요.”

정호순 병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에 평가가 좋았던 프로그램이었지요. 하지만 요즘은 운영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군요.”

“프로그램이 중단됐나요?”

민우는 모른 척 물었다.

이미 그 사실은 이수빈을 통해 들어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음, 여러 이유 때문에 운영할 수 없게 됐습니다. 아무래도 아이들은 면역력도 약하고, 불규칙하게 외부에 접촉하게 되면 좋지 않지요. 그래서 요즘 병원들이 면회에 제한을 많이 둡니다.”

몇 년 전. 정확히는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적으로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면회나 방역 절차가 더욱 까다로워졌다.

하지만 민우는 그게 이유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프로그램 폐지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요.”

“물론 그렇지요. 사실 인력적인 부분이 더 큽니다. 예전만큼 요즘은 봉사활동을 많이 오지 않지요. 선생님을 구하기도 쉽지 않아서 프로그램이 종료된 것도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병원에서 전문인력을 구하자니…… 예산적으로 힘든 부분도 있고 말이죠.”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납득가는 이야기였다.

병원장은 평범한 의사가 아니다. 병원의 전체적인 운영과 예산 집행 등 큰 그림을 그려야 하는 사람이다.

자선 사업을 한다면 병원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하네요.”

“별말씀을. 우리 병원과 환자들을 위해 애써 주신 분인데 그 정도는 말씀을 드리는 게 맞지요.”

“그래서 제가 오늘 뵙자고 한 겁니다.”

고풍스러운 찻잔을 들던 정호순 병원장이 멈칫했다. 민우가 자신 있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프로그램을 말이죠. 지금 명인대 병원의 현실에 맞게 좀 변형시켜서 다시 운영해 보고 싶습니다.”

“다시 운영을……?”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정호순 병원장은 티를 내지 않고는 있으나, 민우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총장 선거라는 이벤트 때문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봐도 민우는 총장 선거에 대한 내색은 조금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전혀 상관없는 봉사 프로그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종잡을 수 없었고, 인간적인 흥미가 가고 있었다.

하지만 정호순 병원장이 미처 짐작하지 못한 게 하나 있었다.

그것이 바로 민우가 노리는 바라는 것을.

어차피 병원장과 의대 학장을 모두 만나야 하는 거라면 한쪽에는 의도를 숨기는 게 좋지 않겠냐는 한진섭의 조언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민우는 명인대 부속병원에는 일방적으로 베푸는 스탠스를 취하고, 의대 학장에게는 직설적으로 선거 협력을 부탁할 계획이었다.

이번 협력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 정호순 병원장이 후배인 강유찬 학장에게 뭔가 이야기를 할 가능성이 크니까.

시너지를 노린 전략이었다.

“저희 휴머니티 캠퍼스는 명인대 부속병원의 환아들을 도울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어떤 계획인지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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