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71화 (371/500)

공정무사(公正無私) (2)

이다혜는 등줄기로 소름이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만큼 민우의 표정은 압권이었다.

평소에 이런 드라마틱한 표정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효과는 배 이상이었다.

“어…… 뭔가 제가 실수하는 것 같은 느낌이…….”

“아니, 뭐 이상한 거 요구하거나 하진 않으니 걱정하지 말고.”

“뭔데요?”

“김태현 번역가.”

그 한마디가 이다혜의 얼굴에 남아있던 어색한 웃음기마저 완전히 날려버렸다.

민우와 이다혜는 번역이라는 같은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이였다. ‘김태현’이라는 이름은 역린이나 다름이 없었다.

지금도 꾸준히 민우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는 중이었으니까.

거기에 그의 동생인 김명현은, 그의 형 일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민우와 명인대에서 대립하고 있었다.

뒷맛이 좋을 리 없는 이름이었다.

“요즘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 좀 궁금해서. 너희 협회 쪽에는 정보 좀 있을 거 아냐? 김태현 번역가도 너희 협회 사람이니까. 아직까지는.”

“그렇긴 한데…… 무슨 일 때문에 물으시는 건데요?”

“걱정하지 마. 별일은 아니니까.”

이다혜가 괜히 걱정하는 것 같아, 민우는 선을 그었다.

아마 그녀의 입장에서는 어디선가 안 좋은 소문을 듣고 그것을 확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다.

진실은 다르지만, 그렇다고 ‘박민우 문학상’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은 말할 수 없었다.

“저도 건너 들은 거라 정확하진 않지만, 요즘은 대외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해요. 밖에서 본 사람이 없대요.”

“번역일은 계속하고 있나?”

“소소하게 하는 것 같더라고요. 메인 타이틀은 못 하고 있지만 이름 없는 책은 몇 권 낸 거 같아요.”

“그런가.”

그래서 베스트셀러 차트에서 이름을 볼 수 없었던 거다.

몇 년 전이었다면 상위권에서 김태현이라는 이름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모든 업계가 그렇듯, 번뜩이는 신인은 많으니까.

“넌 어떻게 생각해? 김태현이라는 번역가에 대해서.”

“엄청 어려운 질문이네요.”

“어려워하지 말고 솔직히 이야기해도 돼.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니까.”

이다혜가 머뭇거렸다.

민우는 다른 사람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의 한마디면 업계에서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품평을 듣는 것은,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잠시 고민하던 이다혜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인간으로서는 좋은 소리는 못 하겠는데…… 그래도 번역가의 입장에서는 대단하다는 생각은 해요. 제가 한창 공부할 땐 김태현 씨 책 많이 봤거든요.”

김태현은 번역법에 관련한 일반서도 몇 권 낸 바가 있다. 그래서 현역 번역가들은 대부분 그의 책을 거쳤다고 보면 된다.

“안쓰럽죠. 그렇게 몰락하기도 쉽지 않은데, 어쨌든 일이 그렇게 됐잖아요. 그래도 오빠에 대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하고 다니는 건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예전부터 느끼는 건데, 생각보다 오빠는 그런 거에 열받는 거 같지 않더라고요. 부처세요?”

“아깐 궁예라며.”

“아! 그럼 미륵인가.”

민우는 피식 웃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이다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인간적인 흠결은 있지만, 그래도 전문성에는 이론이 없는 거구나.’

그 정도면 됐다 싶다.

김태현에게 공로상을 주는 것 자체에 많은 고민을 하긴 했었다. 인성까지 봐야 하는 건가, 혹은 개인적인 감정을 담아야 하는 것까지.

민우가 내린 결론은 ‘공로만 보자’였다.

“혹시 김태현 씨 동생에 대해 아는 건 없어?”

“동생이요? 아…… 그러고 보니 번역 사업 같이 했던 동생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네요. 친동생인가요?”

“맞을 거야.”

손가락으로 턱을 두드리며 이다혜가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런데 형제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은 거 같아요. 사업 때문인지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사이가 좋지 않다고?”

그건 또 뜻밖이었다.

서지훈 교수도 그렇고, 자신도 김명현이 대립각을 세우는 이유가 형의 복수를 하려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이가 좋지 않다니.

지금까지 견고히 믿어 왔던 어떤 진실에 균열이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민우는 마음을 다잡았다.

속단하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함을 느꼈다.

“그런데 동생은 왜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 생활이 어렵다고 들으니, 뭔가 좀 걱정되기도 하고.”

“진짜 대단하네요. 제가 오빠라면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을 거 같은데.”

“아무튼 고맙다. 큰 도움이 되었어.”

이야기가 싱겁게 마무리되자, 이다혜가 볼을 부풀렸다.

“아 참. 정말 궁금하네. 물어본다고 대답도 안 해주시겠지만.”

“빙고.”

“얄밉거든요?”

긴장이 풀렸다.

이다혜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김태현이라는 역린을 건드린 줄 알았는데 민우가 덤덤히 반응했기에.

민우가 물었다.

“요즘 박민우 문학상에 관심들 많지? 곧 수상자가 정해질 시기라서.”

“어마어마하죠! 아무래도 번역 쪽으로는 이렇게 메이저한 상이 국내엔 없으니까요.”

“그렇긴 해.”

예전에 민우가 받았던 큰산번역문학상 정도가 명맥을 잇고 있다. 번역 시장은 나날이 커져감에도 불구하고 상엔 인색한 편이다.

“열심히 해서 맨부커상 같은 국제적인 번역상으로 만들 계획이야. 뭐 문학이나 학술 같은 분야도 있긴 하지만, 내 전문분야를 살려야지.”

“차라리 노벨상 같은 걸로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야, 그건 너무 갔다.”

민우는 웃어넘겼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았을 뿐,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지금은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상에 불과하지만, 역사와 전통이 더해진다면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국제적인 상으로 발전하지 않을까?

민우는 잔을 들고 커피를 음미했다.

‘생전에 달성할 수 없는 목표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목적지를 향해 힘껏 달려나가고 있으니까.

그 자체를 즐기면 그만이었다.

“넌 어때?”

앞뒤 모두 자른 갑작스러운 질문에, 이다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뭐요?”

“넌 상 받을 거 같냐고. 지금까지 열심히 했잖아? 가장 주목받는 신인이기도 하고 말이지.”

“아~”

이다혜가 부끄럽게 웃었다. 그런데 의외의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전 사실 별생각 없어요. 그냥 누가 받나 궁금하긴 하지, 딱히 제가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말 희석이가 들으면 정색하겠는데?”

“정말이에요! 전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니까요.”

이다혜가 환하게 웃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가 문득 떠오른다. 번역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일거리가 없어 헤매고 있을 때 얼마나 힘들어했던가.

그때의 표정을 생각한다면, 지금 충분히 행복하다는 말엔 설득력이 있었다.

“처음엔 좀 힘들었지만, 지금은 좋은 사람 많이 알게 됐고, 또 좋은 선생님께 잘 배웠고…….”

왠지 솔직한 이야기를 해서일까. 이다혜가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아무튼! 상은 그냥 타이틀일 뿐이잖아요? 지금은 좀 더 좋은 작품 번역하고 싶다, 그런 욕심밖에 없어요.”

“그렇구나.”

“그런데 이상하네요. 새삼스럽게 그런 걸 물으시고.”

“그냥, 옛날 생각이 들어서.”

그때까지 이다혜는 자신이 ‘박민우 문학상’ 번역 부문 신인상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

연구실로 돌아온 민우는 다음 계획에 돌입했다.

‘박민우 문학상’ 심사는 이제 고두열 차장이 일정을 잡을 테니 따로 연락을 기다리면 된다.

다시 총장 선거를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민우는 핸드폰을 꺼내 이소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 선생님. 어쩐 일이세요?

“통화 괜찮아?”

― 잠깐은 괜찮아요.

시간을 보니 지금쯤 병원에서 실습을 하고 있는 듯했다. 목소리도 평소보다 작았고. 민우가 즉시 본론을 꺼냈다.

“부탁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는데 얼굴 좀 볼 수 있나 해서.”

― 아, 지금요?

“급한 일은 아니야. 너 편할 때 아무 때나 괜찮아.”

― 음…… 한 시간 뒤쯤 어떨까요? 그때 일 끝나는데 제가 연구실로 찾아갈게요.

“아니. 너 바쁜데 내가 병원으로 가마. 바람도 쐴 겸. 지금 실습 중이지?”

― 예.

명인대학교 부속병원 정문에서 보기로 약속한 민우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가만. 의대 학장도 있지만 명인대 부속병원이 있으니 병원장도 있잖아? 교수들도 대학과 병원을 오가며 일하고 있고. 어느 쪽 파워가 더 세지?’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은 바로 예전에 입원했던 기억 때문이었다.

대학원 석사 시절, 민우는 과로한 탓에 혼절해 입원한 적이 있다.

그때 정연주가 도움을 준 적이 있었다. 병원장이 그녀의 삼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아직까지 병원장으로 근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쪽에도 대한그룹의 자본이 많이 들어갔으니 어느 정도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 거다.

민우의 생각이 깊어졌다.

‘병원 교수들도 투표권이 있어. 그렇다면 병원장도 입김을 넣을 수 있는 위치에 있을 텐데…….’

민우는 즉시 인터넷 창을 띄워 명인대 부속병원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그리고 현재 병원장이 누구인지 확인했다.

민우의 두 눈에 이채가 돌았다.

‘정호순…… 맞아. 기억났다. 아직 병원장으로 계시는구나. 연임한 모양이네.’

민우는 이소윤을 만나기 전에 정연주와 통화를 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삼촌이 병원장이라면 대학병원 생리는 물론 권력 구도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민우는 즉시 전화를 걸었고, 정연주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 병원장 권한은 정말 막강해요. 대학 총장하고는 좀 다른 느낌이죠. 경영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으니 교수들도 눈치를 많이 본다고 들었어요. ‘하얀 거탑’이라는 표현이 괜히 있는 게 아니죠.

민우는 의대 학장을 만나려고 한다는 것을 솔직히 말했다. 그러자 정연주가 힌트를 줬다.

― 그럼 저희 삼촌도 한번 만나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대학 운영하고 병원 운영은 좀 다른 것 같아도…… 서로 관계가 있거든요. 오히려 수익을 창출하는 면에서 병원장 쪽이 더 힘이 세기도 해요.

정연주는 삼촌인 정호순 병원장에게 면담 요청을 해보겠다고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여러 상념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대학 정책에는 내가 관여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지만…… 병원에는 해줄 수 있는 게 얼마든지 있지.’

예전에 간 기능이 좋지 않아 입원했던 소녀가 문득 떠올랐다.

‘미주’라는 이름을 가진 귀여운 소녀.

최근에 건강을 되찾아 학교에도 나가고 있다고 들었다.

이수빈을 따라 교육 봉사로 명인대 부속병원에 드나든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경험이 실마리를 제공해 준 것이다.

‘비즈니스도 비즈니스지만, 마음에서 우러난 도움을 줄 수 있어. 내가 가진 인맥과 휴머니티의 잠재력이라면…….’

그렇게 결론을 내린 민우는 한참 생각에 잠기며 자세한 계획을 세워나갔다.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풀렸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어느새 약속 시간이 훌쩍 다가왔다. 민우는 이소윤을 만나기 위해 연구실을 나와 명인대 부속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총장 선거를 향한 싸움도 중반에 접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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