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무사(公正無私) (1)
현대서사학회 학술대회를 마친 민우는 본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6월 초.
선선했던 봄바람이 물러나고, 반팔 티셔츠를 입지 않으면 땀이 날 정도로 날이 더워지기 시작했다.
한 달 정도만 지나면 1학기가 끝나며 여름방학이 시작된다.
다들 한숨 돌리며 다음 학기를 기약할 시기였지만, 민우의 연구실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갔다.
“다음 주죠?”
차민재가 묻자 민우가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다음 주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적어도 민우에겐 말이다.
“<프로페서> 드라마 첫 방영일이요. 전에 윤이 형님한테 들었는데 이 무렵이었던 것 같아서요.”
“맞아. 다음 주 수요일 첫 방송이다.”
드라마 <프로페서>는 수목드라마로 편성되었다.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고, 인터넷 등 여러 매체에서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편으로 다음 주 수요일은 민우에게 있어 또 다른 의미를 가진 날이기도 했다. 바로 명인대학교 총동문회 정기총회가 열리는 날이다.
그날은 서지훈 교수는 물론, 민영환 교수, 설예라 교수와 이수빈까지 총동원되어 마지막 표심을 끌어모을 예정이었다.
“정말 기대되네요. 아는 분들 이야기라서 더 그런 거 같고요. 현실을 어떻게 비틀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민재야.”
“넵?”
민우가 포식자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 기말 과제는 하면서 궁금해하는 거지?”
“앗, 아아…….”
차민재가 어색한 표정을 짓더니 자리로 재빨리 돌아갔다. 바쁘게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민우는 차민재의 뒤통수를 향해 넌지시 말했다.
“차 선생. 내일 중간 점검할 거니까 요약본 준비해 놓으십시오.”
“네!”
명인대 국문과 대학원생들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치르지 않는다. 보통 한 학기 동안 소논문 두어 편을 쓰는 것으로 시험을 대체한다.
대학원 학점이야 상대평가가 아니니 교수와 싸우지 않는 이상 A학점을 받겠지만, 중요한 건 얼마나 좋은 논문을 써낼 수 있느냐였다.
그래서 민우는 다른 건 몰라도, 제자들의 논문 작업엔 엄격한 편이었다.
무엇보다도 대학원생들에겐 석사과정이 중요하다.
논문 집필과 연구 방법의 기초를 다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때 제대로 버릇을 들여놓지 않으면 고생길이 훤히 열린다.
‘하아, 그나저나 이거 쉬운 일이 아니네. 막상 받아오긴 했는데…….’
민우는 손에 들린 서류에 다시 집중했다.
얼마 전에 지음사 송승현 이사에게 받아온 ‘박민우 문학상’ 번역 부문 후보들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민우만큼 번역에 뛰어난 인재는 없다.
하지만 막상 리스트를 받아보고 나니 누구에게 어떤 상을 줘야 할지 막막했던 것이다.
‘생각보다 아는 사람들이 많아. 이거 상 잘못 줬다가는 편파적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겠어.’
일례로 지금 살펴보고 있는 후보자가 그렇다.
그 주인공은 바로 이다혜였다.
이다혜는 몇 년 전 민우의 프로젝트팀에서 <인문과학총서> 번역을 수행했던 인재였다.
그때는 조교급으로 배우는 과정이었지만, 지금은 신진 번역가로 데뷔해 차근차근 명성을 쌓고 있는 중이다.
민우는 그녀가 번역한 도서는 빠짐없이 읽는 편이었고, 최근에도 연락을 이어오며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함께 일한 적 있는 남희석과 함께 집에 놀러 오기도 했었다.
‘신인상은 다혜만 한 적임자가 없는데…… 상을 준다면 분명 인맥빨이라는 이야기 나올 거고.’
고민이 깊어져 갔다.
오히려 친분을 피하려다 보니, 엄한 사람에게 상이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물론 민우는 심사위원장이고, 다른 심사위원들도 수상자 결정에 참여하게 되지만 역시 민우의 입김이 가장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이런 걸로 고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드르르르!
그때 진동이 울렸다.
아는 사람의 전화라 민우는 지체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박민우입니다.”
―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하하하. 그러게요. 잘 지내셨죠?”
고두열 차장의 전화였다.
출판기획실의 에이스였던 그는 과장에서 차장으로 진급했고, 이제는 지음사의 핵심 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과거 <태엽시계> 번역 과정에서 민우와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지만, 이제는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그래서 이렇게 편하게 전화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휴, 마침 타이밍 딱 맞춰서 전화 주셨네요. 안 그래도 지금 문학상 수상자 후보 검토하고 있었거든요.”
― 오, 그렇군요. 어떻게 좀 윤곽이 나왔을까요? 슬슬 심사위원단을 소집할까 해서 말이죠. 송 이사님 푸시도 있고 해서.
“윤곽은 나왔는데 좀 걱정이 되네요.”
― 무슨 걱정이요?
“아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이거 객관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을 거 같네요.”
― 하하하하!
뜻밖의 웃음이 들려 민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매사 신중한 사람이 이렇게 웃어 버리니, 민우는 자기가 뭔가 잘못 생각한 건지 의심하게 되었다.
― 이런 말씀 드리긴 굉장히 죄송스럽지만, 교수님도 가끔 보면 은근 허당인 곳이 있다니까요.
“죄송할 거 없습니다. 가끔 듣거든요.”
― 쓸데없는 걱정이에요. 어느 심사위원이든 다 같은 생각을 하거든요. 오히려 훌륭한 사람일수록 아는 사람이 더 많겠죠. 그 업계에서 가지는 위상이 있을 텐데요.
“음…… 그래도.”
― 그렇다고 인맥 논란 피하려고 쌩 신인에게 심사를 맡길 수도 없는 거 아닙니까. 그냥 눈 딱 감고 후보자 추려 주세요.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 그럼요. 지금까지 제가 드린 말씀 중 틀린 거 있었습니까?
“없진 않았죠. 예전에 김영화 작가님 <태엽시계> 번역가 선정 건이 생각나는군요.”
민우는 소리 없이 웃었고, 전화기 너머에서도 큰 웃음소리가 들렸다. 사무실에서 너무 빵 터진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큰 웃음이었다.
― 하하하하! 그건 인정합니다. 그땐 제가 안목이 없었죠. 아무튼 박 교수님. 조만간 번역 부문 심사위원회 열 테니 참석해 주십시오. 일시는 나중에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그때 다시 인사드리죠.”
― 그리고 메일 하나 들어갈 거예요. 채점표인데, 거기에 수상 후보자 기입해서 먼저 보내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일이 하나 늘었군요.”
― 중요한 일이니 잘 부탁드립니다.
전화가 끊겼다. 한숨을 돌린 그는 서류를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띠링!
컴퓨터에서 메일이 도착했다는 효과음이 들렸다. 민우는 마우스를 잡고 모니터에 집중했다.
고두열 차장이 보낸 메일이었다.
파일을 다운받아 열어보니 항목별로 점수를 매길 수 있는 시트가 나왔다.
‘대상 1명, 신인상 3명, 공로상 1명…… 총 다섯 명에게 상이 돌아가는구나.’
대상 수상자는 선정하기 너무 쉬웠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자신을 제외하고 가장 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번역 퀄리티도 뛰어난 사람을 넣으면 되니까.
신인상 세 명도 금방 채워졌다. 그중엔 이다혜의 이름도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공로상이 남았다.
‘공로상이라면 우리나라 번역 분야에서 지금까지 많은 업적을 쌓은 사람이어야 해. 경력이 많은 사람이 좋겠지.’
그렇게 생각한 민우는 쌓아둔 서류를 다시 꺼냈다.
사실 처음부터 마음에 걸린 서류가 하나 있었다. 따로 표시해 둔 그 서류를 꺼낸 민우는 내용을 살폈다.
‘김태현 번역가.’
공로상으로는 그만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우가 번역계에 데뷔하기 전까지는 모든 번역가 중 으뜸이라고 불리는 사내였으니까.
그가 몰락한 것은 <태엽시계> 번역 사업이 결정적이었다.
민우가 아니었다면, 혹은 민우가 루카치의 유물을 손에 넣지 않았더라면 <태엽시계> 번역은 김태현이 맡았을 것이다. 거기에 운이 더해졌다면 대한민국 최초로 번역가로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민우가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그가 몰락한 게 나 때문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그렇지 않다고 할 수도 없지.’
어느 정도는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의 동생과 더불어 민우와 주변 사람들을 음해하려고 하고 있었다. 기분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사적인 감정은 배제해야 하는 게 옳지 않을까? 이건 말 그대로 우리나라 번역계에 공을 세운 번역가에게 주는 상인데…….’
민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사로운 것을 버리고 공적인 것을 취하는 것이 옳다고.
아마 다른 심사위원들도 민우의 눈치를 보고 공로상에 김태현 번역가를 올리지 않을 거다. 업계에서 그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퍼트려 민우를 난처하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다른 상도 아니고 민우의 이름을 딴 상이기 때문에 배제당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민우는 그런 상황을 원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이해당사자인 본인이 이렇게 나선다면 분위기를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심사위원장이 보여야 할 모범이기도 했고.
‘그래. 그렇게 하는 게 맞아. 이런다고 그가 번역가로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자신의 과거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은 안 하겠지.’
그리고 막상 수상자로 결정한다고 해도, 반대로 그가 ‘박민우 문학상’을 거부할 수도 있었다.
‘그건 다른 문제지. 우리가 주려는데 받지 않는 것과 아예 주지 않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니까. 그러니까 일단 주는 걸로 해보자.’
고민을 끝낸 민우는 키보드를 두드렸다.
공로상 항목에 ‘김태현’이라는 세 글자 이름이 선명히 박혔다.
파일을 저장한 민우는 즉시 고두열 차장에게 메일을 보냈다.
***
저녁 시간을 앞둔 늦은 오후, 민우는 명인대 근처에 있는 카페로 들어섰다. 한쪽 테이블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오빠. 요즘 얼굴 보기 너무 힘든 거 아녜요?”
“바쁜 데 이렇게 만나주는 걸 영광으로 알라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즈언하!”
이다혜가 허리를 푹 숙였다. 피식 웃은 민우는 맞은편에 앉았다.
“웬일로 전화를 다 했어? 쓸데없는 톡만 틱틱 날리던 사람이.”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서운하게 하실까? 오라버니가 좋은 꿈 꾸셨을까, 피곤하진 않으실까 매번 걱정하는 충신한테 말이죠. 오늘도 오라버니의 용안을 좀 뵙고 싶어서 모셨어요.”
“하아…… 용건만 간단히. 나 이따 저녁에 미팅 있다.”
“쳇. 정말 바쁘시구나?”
이다혜도 업계에 자리를 잡고 나니 깨발랄했던 성격이 한층 업그레이드되었다. 거기에 여유가 더해져 사람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게 된 것.
물론 민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말로는 오빠라고 불러도 스승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안 그래도 한번 볼까 싶었는데 마침 전화를 하니까 뭔 일인지 궁금하네.”
“엇? 한번 보려고 했어요? 그런 말 들으니 오히려 제가 더 궁금해지는데.”
“먼저 읊어 봐. 무슨 일인지.”
“아니 뭐 대단한 건 없고, 잘 살아 계신지 궁금해서 안부 차 연락드린 거죠.”
이건 뻥이다.
민우는 이다혜와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다른 목적이 있는 게 분명했다.
민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박민우 문학상 누가 받을지 캐물으려고 나온 건 아니고?”
“……궁예세요?”
“이다혜 하는 짓이야 뻔하지.”
민우는 여유롭게 빨대를 물고 아메리카노를 빨아 마셨다. 그렇게 되니 조급해진 쪽은 이다혜였다.
“협회에서 난리예요. 제가 오빠랑 친하니까 슬쩍 물어보고 오라고요. 전 진짜 그러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하긴 했는데…… 신인인 제가 뭐 힘이 있나요?”
“힘이 있냐고? 농담도 정도껏 해라. 엄청 있잖아? 너 이번에 번역한 것도 베스트셀러에 올라갔잖아. 내가 알기로 세 번 연속인데 말이지. 오히려 협회에서 네 눈치 안 보든?”
민우가 반문하자 이다혜가 혀를 슬쩍 내밀며 백기를 올렸다.
“하여간 오빠는 못 당하겠다니까. 맞아요. 제가 궁금해서 왔어요. 그러니까 누가 상 받는지 좀 알려줘요.”
“싫어.”
“아잉~”
“먼저 일어난다.”
민우가 정색하자 이다혜가 팔을 홰홰 저었다.
“아! 죄송해요! 정말! 이건 고의가 아니라고!”
“고의가 아니면 뭔데?”
“그만큼 필사적이라는 거죠. 사람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좀 너그럽게 봐주면 안 되나요?”
그래. 한 번만 봐준다, 그런 느낌의 표정으로 민우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원하는 정보가 있다면 대가도 준비되어 있겠지?”
“원하시는 거라도 있으세요?”
“있지.”
사악하게 웃은 민우가 이다혜를 빤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