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69화 (369/500)

분위기는 무척 좋아 보였다.

이야기가 잘 풀린다면 민영환 교수가 회장으로 있는 현대문학연구학회 학술대회도 휴머니티 캠퍼스에서 개최할 수 있겠지.

― 그 양반도 예전 같지 않아서 걱정이라니까. 츤데레란 말이지. 아무튼 마무리 잘하고 자세한 이야기는 얼굴 보고 하자.

“예. 쉬세요.”

― 오냐.

당신도 수고했어

다음 날, 민우는 이수빈과 아침상에 마주 앉았다. 윤아는 오늘 할머니 댁에서 바로 등원을 하게 되어, 둘만 식탁에 앉았다.

오늘 아침은 민우가 준비했다.

간단한 샐러드와 우유, 그리고 계란을 넣어 만든 토스트였다. 두 사람은 거창하게 아침 식사를 하는 편은 아니었다.

“어젠 고생 많았어. 발표도 하고 애들 챙겨주느라.”

“갑자기?”

이수빈이 생긋 웃었다. 그러더니 민우를 은근히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건 오빠가 뭔가 잘못을 했을 때 자주 나오는 전개인데. 뭐지? 솔직하게 말해봐요.”

“내가 뭐 사고치고 다니는 것처럼 이야기하네.”

“그럼 갑자기 왜?”

“어제 서지훈 선생님하고 통화했거든. 이럴 때일수록 와이프 잘 챙기라고 하셔서. 그래서 해본 말이야.”

이수빈이 반색했다.

민우는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라, 주변 사람들의 좋은 코멘트는 다 이수빈에게 전해 주는 편이다.

“역시! 우리 지훈 쌤이 짱이라니까?”

“나중에 인사라도 드려. 선생님도 총장 선거 때문에 정신없으실 텐데, 주변 사람 챙길 여유 없으신데도 그런 말씀 해주신 거니까.”

“선생님께는 늘 감사하죠. 보이지 않는 데서 도움도 많이 주시고.”

“설예라 선생님이 들으면 서운해하시겠구만.”

“하하하. 그런가?”

“그런 의미에서 오늘 오후에 시간 좀 내. 오후에 강의 없지?”

“없어요. 어디 가려고?”

“오랜만에 쇼핑이나 가자. 곧 여름이니 옷도 좀 보고.”

“아…… 요즘 살쪘다고 구박하는 건가.”

민우는 하마터면 먹고 있던 샐러드를 뱉을 뻔했다.

이런 이야기로 흐를 줄이야.

역시 결혼하고 나면 조금도 방심할 수가 없다.

“괜히 혼자 찔려서 그러지 말고 오후 3시쯤 인문관 주차장에서 봐. 오늘은 레아 씨 차 안 타고 차 끌고 갈 테니까.”

“알았어요. 그러고 보니 둘이 쇼핑한 거 되게 오랜만인 거 같네.”

“그런가?”

“윤아 데리고 가끔 갔는데, 둘이 간 적은 거의 없잖아요.”

“그러네.”

단둘이 마지막으로 쇼핑했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으니, 상당히 오래 지난 것 같긴 하다.

오랜만에 신혼 기분을 내는 것도 좋겠지.

“오늘은 저녁도 외식하자. 분위기 좋은 데 예약해 둘게.”

“좋아요! 나간 김에 어머니 옷도 좀 살까요? 요즘 윤아 돌봐 주시느라 고생하는데.”

“그러자.”

식사를 마친 민우는 오랜만에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충분히 예열한 뒤 주차장을 빠져나와 명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학교에 도착한 민우는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기도 전에 바로 서지훈 교수 연구실로 향했다.

어제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고 통화한 것도 있고, 왠지 서지훈 교수의 커피를 얻어 마시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침 서지훈 교수는 안에 있었다.

“왔냐? 오늘은 일찍 왔네.”

“모닝커피 좀 얻어 마시려고요.”

“하하하. 그래. 앉아라. 큰일 했는데 내가 손수 내려 줘야지!”

서지훈 교수가 커피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민우는 교수 연구실에 비치된 도서를 살펴보았다.

못 본 책들이 많았다. 얼핏 봐도 10권은 넘어 보였다.

학부 시절에는 책을 꺼내 자리를 잡고 한참 읽곤 했는데, 요즘은 그러지 못한 것 같아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커피를 따르며 서지훈 교수가 민우를 힐끔 바라보았다.

“보고 싶으면 가져가. 그쪽에 있는 건 다 봤으니까.”

“아, 그래도 될까요?”

“안 될 게 뭐 있냐.”

민우는 책을 몇 권 챙겼다.

한편으로는 서지훈 교수의 독서량에 감탄하기도 했다. 루카치의 유품의 능력을 흡수했음에도 그 독서량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외국어에 특화된 능력이긴 하지만, 어쨌든 괴물이라 불려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런데 선생님은 대체 어떻게 이 많은 책을 그렇게 빨리 읽으시는 거예요? 저번 주엔 못 보던 책들인데. 그럼 하루에 한 권 이상 보신다는 말이잖아요.”

“그거?”

서지훈 교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커피 두 잔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민우에게 한 잔을 내어주며 그가 말을 이었다.

“뭐, 틈틈이 읽으면 되지.”

“요즘 강의도 하시고 선거 준비하느라 바쁘시지 않아요?”

“필요한 부분만 읽고 있어. 책이라고 처음부터 다 읽으라는 법은 없으니.”

민우는 쉽게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저자가 의도한 바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중요한 내용을 놓칠 수도 있잖아요?”

“으음, 너 예전에도 비슷한 질문을 했던 것 같은데…… 그런 거 신경 쓸 시간에 한 권이라도 더 보는 게 나아. 그렇게 생긴 빈틈은 다음 책에서 메꿔질 테니까.”

“그런가요.”

누가 들으면 우스워할 만한 질문이다.

명색이 명인대 교수, 그것도 글을 다루는 국문과 교수가 할 질문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민우는 궁금한 것이 있다면 즉시 묻곤 했다.

체면을 지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모르는 것을 채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하하하. 뭐, 독서 방법이야 사람마다 다른 게 아니겠어? 너처럼 정석적으로 뜯어보는 사람도 있는 거고, 나처럼 날라리 같이 읽는 사람도 있는 거고.”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이 정말 명언이었네요.”

“궁금하면 한번 해보든가.”

정말 사소한 것으로 진지한 고민에 빠진 제자를 보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커피를 한 모금 넘긴 서지훈 교수가 화제를 돌렸다.

“총장 진영에선 별 이야기 없나?”

“조용하네요. 요즘 김명현 실장도 별달리 시비를 걸어오지 않고요.”

“드라마 촬영장에서 종종 본다고 했지?”

“요즘은 못 봤어요.”

민우도 촬영장에 매번 나가는 건 아니지만, 짬을 내서 자주 들르고 있다.

그런데 김명현의 모습은 보기 어려웠다.

학교 내에서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한때 청강을 하는 패기까지 보인 그였지만, 지금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눈에 보이면 덜 불안하기라도 할 텐데.’

자고로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이 가장 무섭다는 말이 있다.

민우는 그 말을 곱씹으며 서지훈 교수와 대화를 이어갔다.

“그쪽 움직임은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우리가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거니까.”

“음, 맞는 말이다.”

“다음 계획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서지훈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다음 주로 예정된 총동문회에서 좀 움직일 계획입니다. 연설 기회를 얻었으니 최대한 선생님을 어필하는 방향으로 해볼게요.”

“이사진 접촉은?”

“당연히 해야죠. 선생님을 지지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전달할 겁니다.”

“그렇군.”

정석적인 방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상의 좋은 방법은 마땅히 없었다. 총장이 학생들에게 선거권으로 어필한 이후, 이사회에서 급속도로 학칙이 개정되었다. 지금은 총장 쪽 분위기가 훨씬 좋다.

“이 상황에서는 잔꾀를 부리는 게 오히려 독이 될 거라고 봐요. 그러니 정면으로 부딪쳐 보겠습니다.”

“알았다. 늘 말하는 거지만 너무 무리하지 말고.”

“예. 그리고 여쭤볼 게 있는데요. 조만간 의대 학장님 좀 뵐 생각인데, 그쪽에 어필할 만한 공약이 있을까요?”

서지훈 교수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뭔가 있다는 의미였다.

“명인대에 의공학연구실이 있는 건 알고 있지?”

“예.”

“이번에 김종필 학장님과 이야기하다가 잠깐 나왔는데, 의공학 분야에도 연구비를 집행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의공학은 쉽게 말하면 의학과 공학이 융합된 학문이다. 병의 진단이나 치료를 돕는 장치와 기계를 개발하는 분야다. 의료기술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요즘 3D프린터가 각광받는 건 알고 있지?”

“전에 정연주 선생한테 들은 적 있어요. 그걸로 인공 장기를 만드는 시대가 곧 올 거라고요. 흥미로운 내용이어서 기억이 나네요.”

“잘 알고 있네. 그걸 우리 대학에서 해보는 건 어떨까?”

민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러려면 연구 투자가 필요하겠네요.”

“자얀 씨는 흔쾌히 허락하더군. 민우 네가 손쓸 수 없는 분야에서 쾌거를 올리고 싶다나 뭐라나. 하여간 괴짜야.”

두 사람은 웃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부족한 게 아닌가 싶었다. 의공학은 말 그대로 의학의 파생 분야일 뿐이다. 그것만으로는 볼륨이 부족했다.

민우가 물었다.

“좀 더 어필할 수 있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싱거운 느낌이라서요.”

“필요하긴 하지. 병원 증축 같은 옵션도 있지만…… 뭐 이 정도는 백성웅 총장도 쉽게 할 수 있는 거라고 본다.”

“저도 좀 고민해 보겠습니다.”

“손에 든 패를 한 번에 내려놓으면 나중에 고생한다. 적당히 내밀어 보고, 그쪽 반응도 확인해 보는 게 나을 거야.”

“예.”

성급하게 행동하지 말라는 말이다. 민우는 일단 돌아가는 대로 미팅을 잡기로 결심했다.

***

그날 오후, 민우는 이수빈과 함께 근처에 있는 백화점에 들렀다.

민우는 고민하지 않고 명품 매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대담한 모습에 이수빈이 깜짝 놀랐다.

“여기 비싸!”

“비싸 봐야 얼마나 비싸겠어.”

“어머나.”

평소 절약하는 편이었던 민우였기에, 이런 모습이 새로웠다. 오늘만큼은 가만히 있기로 했다. 왠지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민우는 일전에 이수빈이 예쁘다고 말했던, 그 가방을 파는 브랜드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직원들이 정중히 맞았다.

“혹시 박민우 교수님 아니실까요?”

“아, 맞습니다.”

“실제로 보니 정말 멋있으시네요. 이수빈 교수님도요.”

뜻하지 않은 칭찬에 두 사람은 쑥스럽게 웃었다.

이미 공인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라 둘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도 사진을 찍어달라거나 사인을 해달라는 직원들은 없었다. 그들은 품위를 지켰다.

직원이 안쪽으로 안내했다.

“편하게 둘러보시고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민우는 이수빈을 데리고 매장을 살폈다. 월급만큼 비싼 가방과 옷들이 널려 있었지만, 민우는 그중 이수빈이 마음에 들어 했던 가방을 정확히 기억해냈다.

7백만 원이 넘는 고가의 숄더백이었다. 이수빈은 내심 감동했지만, 가격표를 보고는 귓속말했다.

“미쳤어? 너무 비싸잖아.”

“괜찮으니까 사. 마음 바뀌기 전에.”

“……진심으로?”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지.”

민우는 여유롭게 웃었다. 단단히 마음을 먹은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이수빈은 직원을 불러 한번 착용해 본 다음, 민우가 기억해 주었던 그 백을 선택했다.

정말 갖고 싶었던 가방이었다.

“그럼 제품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직원이 물러갔고, 이수빈은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한 달 월급을 훌쩍 넘는 고가의 백을 산 건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

“서지훈 선생님께 기프티콘이라도 보내드려야 하나?”

“왜?”

“선생님이 신경 써 주신 덕에 이렇게 호강하니까.”

민우가 피식 웃었다.

“선생님 때문만은 아니야.”

“그럼?”

민우는 어머니에게 선물할 스카프를 살펴보며 말을 이었다.

“매번 윤아 엄마로만 살았잖아. 뭘 사든 윤아가 먼저였으니…… 학교에도 마찬가지고. 매번 그럴 순 없지만 가끔이라도 윤아 엄마가 아니라 이수빈으로 살게 해주고 싶었어. 오늘이 그날이고.”

잠시 멍했던 이수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했지만,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선물할 스카프를 고르는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팔짱을 낄 뿐이다.

“그거, 잘 어울리실 거 같아.”

“역시 그렇지?”

수수한 컬러가 들어간 스카프였다.

이수빈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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