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아닌 협상 (3)
처음 학회에 참석한 휴머니티 학생들은 마치 길 잃은 어린양처럼 주변을 헤매고 있었다.
문득 대학원 시절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그때는 선배들을 잘 만나 학회에서 어리바리할 틈 없이 일하느라 정신없었지만, 대개는 저렇게 뭘 해야 할지 모르기 마련이다.
학회에 참석한 교수들은 오랜만에 만난 다른 교수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다른 사람을 신경 쓸 만한 겨를이 없다.
그래서 민우가 직접 챙기려는 거였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품은 사람이 민우만이 아닌지, 한쪽에 앉아 있던 이수빈과 한진섭도 그쪽으로 다가왔다.
“교수님!”
민우를 알아본 학생 하나가 반갑게 인사했다. 학생들의 표정에 약간의 안도가 어렸다.
“다들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슬슬 저녁 먹으러 갈 준비해야지.”
오늘은 출장 뷔페를 불렀다. 바로 옆 세미나실에 식사가 준비되고 있었다.
학생들이 멋쩍게 웃으며 서로를 돌아보기에 바빴다.
“뭔가 어색해서요. 밥 먹으러 가기도 좀 뭐하고…….”
“여러분들도 학회 손님인데 밥 먹으러 가기가 왜 뭐해요. 가서 맛있게 먹고 웃고 떠들면 되는 거지.”
“그래도 그게 좀 어려워서요.”
민우가 자리에 앉았다.
“일단 좀 앉죠. 오늘 학회 피드백도 좀 듣고 싶은데.”
“예!”
학생들이 하나둘 앉았다. 이수빈과 한진섭은 앉지 않고, 학생들 뒤에 보호자처럼 섰다.
“오늘 학회는 어땠어요? 전반적으로 소감을 한번 말해주실 분?”
다들 머뭇거리다, 누군가 용기를 냈다. 민우가 그를 가리켰다.
“생각보다 참여 기회가 많아서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역시 용기가 부족해서 그런지, 궁금한 건 많았는데 섣불리 질문을 하기가 좀 그렇더라고요. 교수님들도 많고 해서…….”
“그것도 모르냐, 뭐 그런 구박 들을까 봐 무서웠다는 이야기예요?”
“비슷한 거 같아요.”
학생들이 웃었다. 하지만 그게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발표에 주저하는 건 굳이 휴머니티 학생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회 전반적인 기조가 그러니까.
“모르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제 자서전에서도 그렇고 강연 나갈 때마다 강조하는 말이 있는데…… 참된 앎이란 무지의 자각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이걸 모른다. 이걸 인정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거죠. 그걸 알게 되는 방법은 이후에 자기가 선택할 문제고요. 이번 학회에서는 그 여러 방법 중 몇 가지가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거고.”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또 있을까요?”
누군가 조심스레 물었다.
민우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가 있는 건 물론, 더욱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 예정이었다.
“지금은 질문하고 답변 듣는 거에서 끝났지만, 다음에는 여러분들이 학회의 한 꼭지를 맡아서 진행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겁니다.”
학생들이 깜짝 놀랐다.
아직까지 그들에게 학회란 교수들의 전유물이었다. 자신들은 그저 손님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민우는 그 인식을 깨고 싶었다.
“맡아서 진행한다는 게 어떤 의미예요?”
“똑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주제를 선정해서 그 주제로 발표를 하는 거죠. 연단에 올라서 발표하고 토론하는 건 좀 부담스러우니까, 박람회처럼 부스를 만들고 여러분들의 연구물을 전시하고 발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고 해요.”
학생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쉽게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던 터다.
하지만 민우는 달랐다.
일전에 미국에서 열린 IAHS가 힌트가 됐다. 그곳에서는 수많은 학생이 포스터 세션에서 자신의 연구물을 대중에게 공개했다.
궁금한 것을 골라서 들을 수 있는 발표 세션.
그것이 민우가 계획하고 있는 학회 개편안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저희들이 연구한다고 해도, 역시 교수님들의 눈에는 부족하게 보이지 않을지…….”
“그건 편견이라고 생각해요. 문학을 예로 들어도, 요즘은 워낙 장르나 분야가 다양해져서 한 사람이 모든 분야를 섭렵하기가 어려워졌어요. 실제로 현대소설을 전공한 교수님들을 보더라도 요즘 유행하고 있는 웹소설이나 웹콘텐츠에 대한 지식이 많이 부족합니다. 오히려 핸드폰 사용에 익숙한 여러분들이 더 잘 알지 않나요?”
몇몇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이 바뀐 것을 보니 새롭게 느끼는 바가 있었던 것 같다.
“여러분들이 소재와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교수들이 받쳐줄 수 있는 이론과 근거를 제시해 준다면 멋진 결과물이 나올 거라고 봐요. 그렇다면 공저 논문도 많아질 거고, 이런 비슷한 자리도 많아지겠죠. 비평이나 평론 같은 생산적인 활동도 가능해집니다. 그게 모이면 하나의 담론이 되겠죠.”
“서로 돕는 느낌이네요.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느낌으로?”
“맞아요. 좀 더 실용적인 연구도 가능해질 겁니다. 지금은 아직 그들만의 리그 느낌이라서요.”
“그럼 교수님들이 좀 싫어하지 않을까요?”
민우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편견은 신경 쓸 거 없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주제를 깊게 연구하고, 그 성과를 발표한다면 누구도 그 노력을 무시하지 못할 겁니다. 저나 여기 있는 다른 선생님들도 그러지 않게끔 노력할 거고요.”
“기대돼요. 한번 해보고 싶네요.”
“저도요!”
학생들에게 분명한 동기부여가 된 것 같아 민우는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이건 시작일 뿐이다.
이제 오늘 학회에 참석한 휴머니티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에게 소문을 내고, 또 휴머니티에 다니지 않는 일반인들에게도 소문을 내준다면 학회 개혁은 먼 나라 이야기만이 아니게 된다.
시간과 경험이 누적될수록, 학회는 지식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해당 분야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열린 공간으로 탈바꿈하겠지.
서지훈 교수가 총장이 되어 대학을 개혁하는 사이, 자신은 학회를 개혁하여 활력을 불어넣는다.
가까이 보면 전혀 다르지만, 멀리 보면 두 사람은 같은 종착지를 향해 착실히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뒤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이수빈이 나섰다.
“오늘 여러분들이 경험한 것들을 SNS에 공유해 주세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좋은 자리에 참석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학생들이 핸드폰을 꺼냈다.
몇몇 학생들은 이수빈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그녀는 쿨하게 사진 촬영에 응했다.
어차피 포털에 검색만 해도 사진이 쏟아지는 상황이라 딱히 거부감은 없었다. 민우도 그렇고 이수빈도 공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촬영을 마치고 학생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갔다. 이수빈이 내려와 민우에게 말을 걸었다.
“민 선생님 오셨다면서요?”
“응. 지금 재환이 형하고 이야기하고 계셔.”
민우가 앞쪽을 가리켰다. 학계의 원로인 민영환 교수는 많은 교수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어느새 최민식과 강예진도 민영환 교수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며 이수빈이 웃었다.
“누가 보면 재환 선배가 아니라 민 선생님이 학회 회장 같네요.”
“하하하. 그러게.”
“선배들이 걱정돼서 오셨나 봐요.”
“어떻게 알았어?”
“그냥, 엄마가 되니까 아이들이 걱정되는 거랑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서.”
“엄마가 아니라 아빠지 않을까. 엄청 엄한…… 아니면 할아버지?”
“그런가?”
그때 연단에서 식사 준비가 끝났으니, 옆쪽 세미나실로 이동해 달라는 공지가 내려왔다. 민우는 학생들을 데리고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뜻밖의 인물이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바로 교양학부의 원순철 학장이었다.
“학장님. 아직 계셨어요?”
“아아, 박 교수.”
이상하게도 원순철 학장의 표정이 밝아 보였다. 처음 찾아와서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뭔가 좋은 소식이라도 들어온 걸까?
“민 교수님과 이야기 좀 나누고 가려다가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더군. 신선하고 재미있는 학회였네. 역시 박 교수답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셨습니까.”
“그리고 지금 막 좋은 소식이 하나 들어왔네.”
민우가 흥미를 보였다. 원순철 학장은 세미나실 한쪽으로 가서 조용히 말했다.
“서지훈 교수에게 연락받았나?”
“아뇨. 핸드폰은 잠시 꺼놨습니다.”
“그렇군. 다른 건 아니고, 오늘 김종필 학장과 이야기가 잘 풀린 모양이야. 그쪽의 지원을 받아냈다더군.”
“김종필 학장이라면…….”
“공과대학장 말이야. 공대의 실세기도 하지.”
“아!”
민우는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자얀과 함께라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빨리 좋은 소식이 전해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정말 좋은 소식이군요.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불편한 마음으로 여기에 왔는데 우습게도 이제는 싹 내려간 느낌이야. 오히려 내 직업, 내 위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됐다고 할까…….”
원순철 학장이 고개를 돌렸다.
마음껏 웃고 떠들며 음식을 접시에 더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보니, 젊은 시절 명인대에 부임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엔 자네도 그렇고, 서지훈 교수도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큰일을 벌이려는 건지 걱정이 앞섰지만…… 이제는 좀 알 것 같기도 해.”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자네들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들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민우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여기에서까지 겸손을 부릴 순 없었다.
“오히려 감사하단 말은 내가 해야지. 잠시 잊고 있었던 걸 떠올리게 해 줘서 고맙네.”
민우는 굳이 그게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원순철 학장의 미소를 보니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다음 학회는 훨씬 더 크게 열어도 괜찮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식사를 마치고 잠깐 짬을 낸 민우는 밖으로 나와서 서지훈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박민우입니다. 아까 전화하셨었죠? 잠깐 꺼두느라 못 받았네요.”
― 그럴 줄 알았다. 원순철 선생님껜 이야기 들었지?
“예. 바로 전해 주셨습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네요.”
― 고생은 네 친구가 다했지 뭐. 내가 한 게 뭐 있겠냐.
“그래도 다른 사람한테 아쉬운 소리 하는 거 쉬운 일 아니잖아요.”
전화기 너머로 시원한 웃음이 들렸다.
― 내가 아쉬운 소리 하고 온 것 같냐?
“설마 협박하고 오셨어요?”
― 하하하. 협박은 무슨. 그냥 선택할 기회를 준 거지. 이제 공대 교수들 표도 거의 확보되었으니, 상경대 쪽만 어떻게 잘해보면 될 것 같구나.
상경대는 경제학 및 경영학 등 굵직한 학과들이 포진한 곳이다. 제법 신경을 써야 하는 곳이다.
“다른 학부도 챙겨야 할 것 같습니다. 의대 쪽도 표가 많으니 제가 손 써볼게요.”
― 그쪽에 인연이 있나?
“제 수업 듣는 청강생이 하나 있는데 그쪽 통해서 한번 접촉해 보려고요.”
― 아, 그 백의 입고 돌아다니는 학생 말인가.
“예. 보셨어요?”
― 잘 어울리던데? 이수빈 선생이 보면 뒷목 잡을 거 같던데 말이야. 하하하하.
“그렇게 따지면 제가 먼저 뒷목 잡아야 할 겁니다.”
이수빈도 남학생들에게 엄청나게 인기가 많으니까. 선물 공세는 예삿일이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워낙 굳건하기 때문에 그런 일로 싸우는 일은 없다. 가벼운 질투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고.
― 뭐, 너희들이 말은 그렇게 해도 사이좋은 거야 다 아니까 걱정은 안 한다. 지금 학회 중이지?
“예. 뒤풀이 중인데 늦게 끝날 거 같아요.”
― 이수빈 선생도 같이 있나?
“예.”
― 이렇게 정신없을 때일수록 잘 챙겨. 아마 너 이상으로 걱정하고 있을 거니까. 시간 내서 기분전환이라도 시켜주든가.
“역시 결혼 선배셔서 그런지 다 꿰고 계시는군요.”
수화기 너머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적어도 민우는 그의 결혼 생활을 언급할 자격이 있다.
― 참, 민 선생님도 학회에 가셨다며?
“안 오셨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여기가 명인대인 줄 알았다니까요.”
민우는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얼근하게 취한 민영환 교수가 서강일을 비롯해 휴머니티 교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