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아닌 협상 (2)
‘설마.’
김종필 학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하긴, 생각해보면 1천만 달러라는 큰 금액이 그냥 굴러들어올 리는 만무하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
자얀이 서지훈에게 협상을 넘겼다는 건, 결국 칼자루가 그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것이다.
“조건까지는 아니고, 좀 희망 사항이 있긴 합니다.”
서지훈 교수는 편히 한국어로 말했다.
괜히 영어로 했다가 해석상의 문제를 거론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전에 자얀과 조율을 했다.
대답은 없었고, 서지훈 교수가 질문을 던졌다.
“학장님께서는 잘 모르실 수도 있겠지만, 근래 몇몇 이공계 교수분들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혹시 들으셨습니까?”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군.”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입이 무거우신 분들이었군요.”
서지훈 교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는 일부러 자얀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걸 비밀로 해 달라고 했었다. 사전에 총장 측에서 손을 쓰지 못하게 하려고 말이다.
그리고 누구를 신뢰할 수 있는지, 또 누구를 멀리해야 하는지 알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기도 했다.
다행히 지금까지 만난 교수들 중에서는 입을 함부로 놀리는 사람이 없는 듯했다.
“학장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제가 총장 선거에 출마했다는 걸 말입니다.”
“으음…… 들어서 알고 있다네.”
“그렇다면 제가 왜 자얀 씨와 함께 움직이는지도 대충 짐작을 하시겠군요.”
김종필 학장은 눈을 부릅떴다.
감히 네가 나를 겁박하는 것이냐, 그런 기색이 담긴 눈빛으로 말이다.
하지만 서지훈 교수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마디는 좀 의외였으며, 김종필의 긴장을 누그러뜨릴 만한 내용이었다.
“오해하시는 것 같아 마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선거와 관련해서 딜을 하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이권 사업을 통해 지지를 요구하려는 건 더더욱 아니고요. 안심하십시오.”
“아니…… 그렇다면 대체 뭔가? 자선 사업이라도 하겠다는 게야?”
오히려 전개가 이렇게 되자 김종필 학장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서지훈 교수가 미소를 지었다.
“명인대 교수이자 총장 후보자로서 할 수 있는 아주 기본적인 일입니다.”
“기본적인 일?”
“저는 개인적인 야욕을 채우기 위해 총장 선거에 출마한 것이 아닙니다. 대학을 개혁해서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명인대를 발전시키려고 하는 거지요. 나아가서는 우리 대학이 앞장서 학계를 개혁하려는 의도도 있습니다.”
“그야 누구든 할 수 있는 말 아닌가.”
다소 우습다는 듯, 김종필 학장이 씨익 웃었다. 그리곤 테이블에 준비된 찻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글쎄요. 인문대라면 모를까…… 이공계는 아직 갈 길이 멀지 않습니까? 세계 유수의 대학과 경쟁하기는커녕 한일대나 세민대에 발목을 잡힌 꼴이니 말이죠.”
“뭬야?”
“이미 저는 5년 전부터 인문대 경쟁력 강화를 꾀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성과를 거두었고요.”
“허, 인문대에서 한 게 뭐가 있다고?”
“박민우 교수.”
김종필 학장이 찻잔을 쥔 채 움찔했다. 서지훈 교수가 내민 패는 효과가 훌륭했다.
“그를 데려오기 위해 몇 년간 노력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권력과 싸워야 했고, 명인대 학부 출신이 아닌 사람은 교수가 될 수 없다는 암묵적인 룰을 없애는 데 성공했지요. 그리고 바로 박 선생을 데려왔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지요?”
한중일 연구 네트워크 활성화는 물론, 프랑스 및 영국을 비롯한 서방 대학과의 학술 교류가 활발해졌다.
고작 민우 한 사람이 명인대로 들어온 것만으로 말이다.
덕분에 한일대와 전통의 라이벌이었던 명인대는 적어도 인문대에 있어서는 비교할 수 없는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풍문으로나마 그 소식을 들었던 김종필 학장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래서 서지훈 교수는 더욱 여유롭게 몰아붙였다.
“당연히 인지하지 못하실 겁니다. 우리 인문대는 공대처럼 성과가 눈에 띄게 나타나지는 않으니까요. 10년, 20년, 혹은 100년…… 오랜 시간 누적되어야 진가가 드러나는 법이지요. 제가 둔 한 수는 역사가 정당히 평가해 줄 겁니다.”
“그래서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저는 저와 뜻을 함께하는 교수들과 명인대를 새롭게 바꿀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장님의 도움이 절실하지요.”
이번엔 서지훈 교수가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속삭이듯 조용히 말했다.
“총장 후보로서 공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제가 공대 교수님들의 도움을 받아 총장이 된다면…… 방금 자얀 씨가 제시했던 사업을 유치하겠습니다.”
김종필 학장의 눈매가 좁아졌다. 약점을 잡을 수 없는 발언이었다. 지지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총장이 된다면 이렇게 하겠다고 공약을 거는 거니까.
서지훈 교수가 이어 말했다.
“1천만 달러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이 케이스가 성공한다면 아랍에미리트는 물론이고, 중동 여러 국가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 말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지?”
“신뢰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서지훈 교수의 태도는 무언가 부탁하러 온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마치 이렇게 정해졌으니 참고해라, 하듯 통보하고 있었다.
다리를 꼰 서지훈 교수가 나긋이 말했다.
“어차피 제가 총장이 되지 못하면 이 사업은 유치할 수 없습니다. 그럴 권한이 없으니까요. 반대로 학장님을 비롯하여 공대 교수님들께서 도와주시지 않아도, 제가 총장에 취임한다면 이 프로젝트는 무조건 유치할 겁니다. 물론 그때는…… 우리 대학 측 프로젝트 총괄 교수가 다른 분으로 바뀌긴 하겠지만 말이죠.”
은근하면서도 분명한 압박감이 피부로 느껴졌다.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김종필 학장은 지금껏 찻잔을 쥐기만 하고 입에 대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가 엉겁결에 찻잔을 들었다.
“그러니까…… 협력을 하든 안 하든, 서 교수가 총장이 된다면 대규모 연구사업을 유치할 거라는 말인가?”
“예. 제대로 보셨습니다. 하지만 기왕이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나마 면식이 있는 학장님께 부탁을 드리는 거고요. 지금까지 명인대 이공계열 발전에 이바지한 노고가 크신데, 이런 중요한 일을 학장님과 상의하지 않으면 누구와 하겠습니까?”
“으음.”
고민할 여지가 크지 않은 일이었다.
상대의 저의가 어떻든, 서지훈 교수는 거래하려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총장이 되면 대학을 이렇게 바꿀 거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대가성이라고 할 만한 게 조금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기울여 온 자신의 헌신을 인정해 주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절로 믿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합리화라 해도 상관없었다.
“좋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적극 움직여 보지.”
“말씀 감사합니다. 저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표정이 극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눈치챈 자얀도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긴장이 완전히 풀렸는지, 김종필 교수가 소파에 편히 등을 기댔다.
“투자금만으로 대학을 바꾸기는 어려울 거야. 그저 규모가 커지는 것일 뿐이니. 총장이 된다면 다른 계획도 있나?”
“인문계든 이공계든 공통으로 적용할 기조가 하나 있긴 합니다.”
“그게 뭐지?”
“학문후속세대에 대한 배려라고 할까요.”
이번엔 서지훈 교수도 편히 등을 기댔다. 동등한 관계가 만들어졌고,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연구의 효율과 지속성을 위해서는 석박사급 인재들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필요합니다. 지금은 그저 연구실 붙박이 느낌으로 다들 희생되는 느낌인데, 그들에게 분명한 청사진을 제시해 줘야지요.”
“허, 우리 때는 그저 교수님 말씀 잘 듣는 게 다였는데 말이지.”
“요즘 그런 이야기 하면 큰일 납니다. 꼰대 소리 듣기 딱 좋죠.”
김종필 학장이 피식 웃었다.
“그냥 해본 말일세. 연구원들에 대한 처우가 달라져야 한다는 점은 공감하네. 구체적인 안을 세우는 게 쉽지 않아서 문제지.”
“그 문제까지 한번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물론 쉽지 않겠지만…… 음. 아뇨. 쉽지 않다는 말은 일단 뭐라도 한번 해본 이후에 꺼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인문대 쪽 분위기는 어떤가?”
“이쪽은 문제없습니다. 예체대까지는 어느 정도 표를 확보했고, 이제는 상경대 쪽만 공략하면 될 것 같습니다.”
“갈 길이 멀구만.”
“언젠간 가야 할 길이었으니 괜찮습니다.”
서지훈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얀과 김종필 학장도 따라 일어났다.
“귀한 시간 뺏어서 송구합니다.”
“아니야. 좀 갑작스럽긴 했네만, 유익했네.”
먼저 악수를 청한 건 김종필 학장이었다.
서지훈 교수가 손을 잡았다.
“또 다른 소식 있으면 바로 연락주시게.”
“감사합니다. 학장님만 믿고 있지요.”
서지훈 교수와 자얀이 학장실을 나섰다. 캠퍼스 풍경은 그대로였지만, 두 사람은 미래를 향해 한 걸음 내디딘 기분이었다.
자얀이 물었다.
「민우가 이 소식을 들으면 아주 기뻐하겠지요?」
「글쎄요.」
자얀이 고개를 갸웃했다. 서지훈 교수는 하늘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쯤 학회 마무리하느라 정신없겠지요. 우리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하하하. 그건 그러네요. 그 녀석, 어디 하나에 푹 빠지면 주변 볼 겨를도 없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같이 있는 거기도 하지요.」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자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봄바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현대서사학회 학술대회가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부회장 최민식의 연설을 끝으로 모든 식순이 끝났다.
참석 인원은 점점 늘어 종국엔 150명 정도가 되었다. 세미나실의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덕분에 학회장 이재환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형님.”
민우가 다가왔다. 이재환이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너도 고생 많았다. 이제야 뭔가 한시름 놓은 느낌이네.”
“벌써 놓으시면 어떡해요. 다음 학회엔 사람들 배는 더 올 텐데.”
“하하하하. 그런가?”
그때 민영환 교수가 근엄히 걸어왔다. 이재환과 민우가 사담을 멈추고 꾸벅 인사했다.
“음, 고생들 했다.”
“어떠셨어요?”
“맹랑한 것. 지금 나한테 그런 걸 묻고 있냐?”
차마 이재환이 궁금했던 것을 묻지 못해서 민우가 대신 물었는데, 민영환 교수가 구박했다. 물론, 반쯤은 농담으로.
하지만 민우는 끈질겼다.
“궁금하잖아요. 새로운 시도도 좀 했는데, 선생님이 보시기엔 어땠는지 듣고 싶어서요.”
이번 학회에서는 일반 대중을 위한 세션이 몇 개 마련되었다.
기본적인 인문학 지식이 없어도 쉽게 들을 수 있는 강연과 더불어 일반인들도 참석 가능한 토론 세션도 준비되었다.
물론 대뜸 나서서 목소리를 낸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참여자가 적어 생각보다 일찍 끝나긴 했지만, 다음에는 좀 더 나은 자리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다.
민우뿐만이 아니라 학회를 준비한 모든 사람이 품은 공통된 생각이었다.
“뭐, 나쁘지 않더구나. 내 눈엔 좀 익숙하지 않았지만 말이지. 결국 학문을 한다는 것도 자기들끼리 이러쿵저러쿵 떠들다 고립되어 버리면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책도 논문도 마찬가지지. 읽어주는 사람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감사합니다.”
두 제자가 고개를 숙였다. 민영환 교수는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다 결국 웃음을 짓는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을 생각하면서.
“헛걸음한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야.”
“다음 학회에도 초대하겠습니다. 그때는 더 좋은 모습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전에 우리 학회부터 준비해야지? 이 선생은 몰라도 민우 너는 해야 할 일이 있을 텐데.”
“잊지 않고 있습니다. 잘 준비해 볼게요!”
인사를 마친 민우는 뒤쪽에 모여 있는 휴머니티 학생들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