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66화 (366/500)

협상 아닌 협상 (1)

자얀은 내심 기대되었다.

지금까지 만난 몇몇 교수들은 크게 인상적이진 못했다. 다들 자신이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고, 어떤 능력이 있는지 어필하기 바빴다.

한마디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국제적으로 큰 규모의 사업을 펼치고 있는 자얀의 입장에서는 싱거울 수밖에 없는 만남들.

하지만 겉으로는 싱겁다는 표현을 쓸 수 없었다.

모든 일에는 처음이라는 게 있고, 빌드업을 하려면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니까.

이제야 서지훈 교수가 진짜 자리를 마련해 주려는 것이었다.

「그간 좀 지루하셨지요? 나름 생각이 있어서 안배한 것이니 오해는 마십시오.」

「물론입니다. 다 교수님이 계획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짜릿한 반전을 위해서는 앞부분이 좀 밋밋할 수도 있는 거죠.」

「반전까지는 아니지만 분명 즐거울 겁니다.」

「다른 분도 아니고 교수님께서 그렇게 장담하시니 내심 기대되는데요?」

그렇게 두 사람은 공학관으로 들어섰다.

서지훈 교수가 발걸음을 멈춰 문을 두드린 곳은, ‘공과대학장 김종필’이라는 명패가 걸린 커다란 연구실이었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입구 쪽에 조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깔끔한 연구실이었는데, 벽 쪽에 놓인 책장엔 해외 원서가 가득 꽂혀 있었다.

“어떻게 오셨나요?”

조교가 물었다. 서지훈이 정중히 답했다.

“학장님과 약속이 있습니다. 국문과 서지훈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조교가 안으로 안내했다.

안에는 방이 하나 더 있었다. 교수 연구실에 방이 하나 더 있는 건 드문 일인데, 아무래도 일반 연구실을 개조해서 만든 교수 연구실인 것 같았다.

방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책상에 풍채 좋은 김종필 학장이 앉아 있었다.

“학장님. 손님 오셨습니다.”

“오, 드디어 오셨군.”

두터운 뿔테 안경을 쓴 그는 누가 봐도 교수인 걸 알 정도로 지적인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가 안경을 고쳐 쓰며 미소를 지었다.

“서지훈 교수. 이거 상당히 오랜만이군그래.”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서지훈 교수는 깍듯이 인사했다.

“그래, 그래. 작년 교수회의 이후로는 처음 아니던가? 그때는 제대로 이야기도 못 나눈 것 같은데 말이지.”

얼핏 보면 단순히 안부를 묻는 것 같지만, 서지훈 교수는 그의 내심을 간파했다. 왜 필요할 때 와서 고개를 조아리냐, 그런 의미였다.

하지만 서지훈 교수가 누군가. 한때 인문대의 풍운아라고 불린 사내였다.

서지훈 교수가 빙긋 웃었다.

동시에 김종필 교수의 눈매가 매서워졌지만, 서지훈 교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워낙 학장님께서 바쁘셔서 사담을 나누기가 좀 민망했습니다. 큰일을 하시는 분인데 일개 교수인 제가 앞길을 막으면 송구한 일 아니겠습니까.”

“일개 교수라. 하하하. 재미있는 표현이군. 타계하신 송현우 선생께서 들으면 괘씸하다고 생각하겠는데?”

“그러실지도 모르겠군요.”

바로 이 부분이 서지훈 교수가 믿는 구석이었다.

옆에 선 자얀이 메인 카드라면, 송현우 교수라는 매개체가 조커 역할을 했다. 김종필 교수는 송현우 교수와도 교분이 있었다.

김종필 교수가 두 팔을 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으시지. 거기 손님도 좀 소개해 주시고.”

서지훈은 즉시 자얀을 소개했다.

“이쪽은 아부다비 왕가의 일원이자, 아부다비석유투자회사의 회장인 자얀 씨입니다.”

“아부다비 왕가의?”

김종필이 사뭇 놀랐다.

워낙 외모가 젊어서 얕보고 있었는데 뜻밖의 거물을 만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다 싶었는데 이제야 정체를 알게 됐다.

분명 TV에서도 자주 거론된 인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알겠군. 국문과 박 교수와 친분이 있는 그분 아니던가?”

“박민우 선생 이야기를 하시는 거라면 제대로 보셨습니다.”

“허, 이런 귀한 손님이 오실 줄이야…… 서 교수 자네도 기이한 취향이 있군그래. 이런 손님과 같이 온다면 귀띔을 해 줘야지?”

“갑작스럽게 결정이 되어서요. 미리 챙기지 못해 송구합니다.”

“에이, 사람도. 송구할 것까지야.”

그제야 자얀이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한국어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김종필의 눈빛이 달라진 것을 포착한 것이다.

「이렇게 뵙게 되니 인연이라 할 만하군요. 편하게 자얀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반갑습니다. 자얀. 어서 앉으시죠.」

손님 접대가 한 단계 격상했다. 아랫사람을 대하듯 하던 김종필이 격식을 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묘한 조합이었다.

서지훈 교수의 행보에 대해서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최근 교수회에서도 이슈가 되고 있는 게 차기 총장 선거니까.

거기에 학계의 풍운아라고 불리던 서지훈 교수가 총장 선거에 출마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교수는 없었다.

문득 찾아온다고 해서 적당히 훈계나 해 주려고 했는데 이런 거물을 데려온 것이다.

전혀 수를 읽을 수 없었다.

「그런데 예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그냥 견학을 오신 것 치고는 좀 갑작스러워서 말이죠.」

김종필 학장의 말에 자얀이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아랍에미리트, 특히 아부다비에서는 공학 교육부터 시작해서 응용기술까지 전반적으로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 스승님께 좀 신세를 지고 있지요.」

「스승님이라면…….」

「당연히 여기 계신 서지훈 교수님이지요.」

「아, 그러십니까.」

김종필 교수는 웃으며 화답하면서도, 자얀이 언급한 ‘스승’이라는 단어에 집중했다.

「서 교수 자네, 아랍 쪽에 교환교수를 다녀온 적이 있었던가?」

「그럴 리가요. 제가 가봐야 미국 정도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런데 자얀 씨가 스승이라고 하시는군.」

지켜보던 자얀이 나섰다.

「꼭 밑에서 배운다고 스승으로 모실 수 있는 건 아니지요. 전 서지훈 교수님의 사상에 깊게 감화되어 있습니다. 정말로요. 사실 서지훈 교수께서 절 제자로 생각하지 않으실지도 모르지만, 뭐. 혼자만의 짝사랑이라고 할까요?」

그리곤 예의 그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인다. 김종필 교수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아주 든든한 제자를 두셨군그래.」

「하하하. 든든하긴 이르죠. 제가 가르칠 깜냥이 못 됩니다. 워낙 비즈니스 감각이 뛰어난 분이셔서. 사는 세계가 다르죠. 박 선생 덕분에 종종 만나서 차나 한잔하는 사이입니다.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김종필 학장은 ‘종종 만난다’는 의미를 곡해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에 처음 만났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서지훈 교수가 의도하던 것이기도 했다.

김종필 학장이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

그리고 대화의 주도권을 이쪽으로 가져와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 간단한 병법이었다.

「그래서, 우리 대학에 방문한 소감이 어떠십니까? 자얀 씨 정도라면 세계 곳곳에 있는 명문대를 모두 가 보셨을 것 같은데.」

김종필 학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자얀이 환하게 웃었다.

「아주 마음에 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한 곳에 집약되어 있는 느낌이었지요. 대한민국에서 명인대가 최고 아닙니까?」

「그러시군요. 다행입니다.」

「이 정도의 대학이라면, 제가 애써 한국까지 온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죠.」

자얀이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흘렸다.

「목적이라면…….」

「우리 아랍에미리트에는 진보된 공학 기술과 교육 인프라가 필요합니다. 기왕 인연을 튼 거 서로 도움이 되면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서로가 원하는 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떻습니까?」

자얀이 훅 치고 들어갔다.

김종필 교수는 등골을 관통하는 짜릿한 감각을 인내하며 말을 이었다. 눈앞의 대어 때문에 옆에 있는 서지훈 교수에 대한 관심이 멀어졌다.

「혹시 연구 투자를 하시겠다는 것인지?」

「음, 좋네요. 그 정도로 해둘까요. 물론 상황 청취는 좀 해야겠지만.」

김종필 학장이 상체를 좀 더 가까이했다. 친근하게.

「우리 공대에는 산하 연구기관이 상당히 많습니다. 범위를 좀 좁혀 주시면, 도움이 되는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에너지자원, 항공우주기술, 신소재, 그리고…… 조금 민감한 부분이 될 수도 있겠지만, 반도체기술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으음. 그렇군요.」

김종필 학장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인연도 없는데 갑작스레 찾아와서 연구 투자를 하겠다는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던 것.

보통이라면 대학 측에서 먼저 기업에 제안하는 방식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이니까.

「각 연구소에는 대외협력부가 있어서 특정 기업과 계약을 체결해 연구를 진행하기도 합니다. 물론 자체 개발센터도 있고요. 방식이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 딱 정해진 룰이란 건 없습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제가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체류했던 곳이 일본입니다. 한국의 학제는 일본과 꽤 비슷하지 않습니까?」

「아아, 그러셨군요.」

「일본의 기술력은 실로 대단하더군요! 노벨상 수상자를 꾸준히 배출하는 나라답게 기초과학에 대한 중요성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응용과학을 소홀히 하지도 않고 말이죠. 아주 매력적인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하하하.」

자얀이 흥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자식이?’

김종필 학장은 내심 불쾌했다. 지금 눈앞의 예비 클라이언트는 라이벌이기도 한 다른 나라와 비교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자얀의 전략이기도 했다.

한일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은 민우에게 충분히 듣고도 남았으니까.

김종필 학장은 마음 같아서는 자리를 물리치고 싶었지만, 자얀이 얼마 정도의 투자 규모를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연구를 수주할 수 있다면 자존심 정도는 살짝 뒤로 물려도 상관없으니까.

큰 연구 건수 하나면 연구실 몇 개를 몇 년 동안 가동할 수 있다. 밑에 딸린 연구원들의 생계도 해결되고 말이다.

자얀이 멋쩍게 웃었다.

「아, 이거 제가 실수한 것 같군요.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지요.」

「아닙니다. 제대로 짚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술력도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 생각합니다. 노벨상 말씀을 하셨지만…… 사실 노벨상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전반적인 역량을 가늠하셔야지요.」

「자신 있다는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물론입니다. 자신이 없었다면 우수한 연구진이 왜 이곳에 머물고 있겠습니까? 다른 곳으로 떠나지.」

그렇게 반문한 이번엔 김종필 학장이 힘주어 말했다.

「자얀 씨께서 생각하고 계신 투자 규모를 좀 알고 싶습니다만.」

「음, 총액 1천만 달러면 어떨까요? 열 케이스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건 조율 가능합니다.」

「1천만…… 달러?」

김종필 학장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자얀이 고개를 갸웃했다.

「너무 적습니까? 그렇다면 연구에 필요한 기자재를 우리 측에서 모두 부담하는 조건을 얹어 보는 건 어떤가요.」

「허허허…….」

어이없는 조건에 김종필 학장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대체 이 엄청난 조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이유가 뭘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생각보다 많습니다. 음, 그게…… 일회성 투자입니까?」

「그럴 리가요! 저는 일회용품을 싫어합니다. 1천만 달러는 선수금 정도라고 생각하시죠. 성과가 좋으면 꾸준히 투자할 생각입니다. 아예 아부다비에 명인대를 위한 아주 럭셔리한 연구소를 설치해 드릴 의향도 있고요.」

「으음. 좋습니다. 원하시는 조건을 말씀해 보십시오.」

씨익 웃은 자얀이 바통을 서지훈 교수에게 넘겼다.

그제야 김종필은 아차 싶었다.

자얀의 말에 집중하는 터라, 그가 누구의 손에 이곳으로 이끌려 왔는지를 잠시나마 망각한 것이다.

이젠 서지훈 교수의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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