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65화 (365/500)

현대서사학회 학술대회 (3)

빈 강의실은 컴컴했다. 책상과 의자, 그리고 교탁이 놓여 있고 빔프로젝터 등 기본적인 멀티미디어 장비가 설치된 강의실이었다.

민우는 딱히 불을 켜지 않았다.

날이 밝은 탓도 있었지만, 원순철 학장이 들어오자마자 표정을 깔고 팔짱을 끼고 있다.

‘뭔가 일이 잘못 풀린 모양인데?’

그러지 않고서야, 전화도 아니라 그가 이곳까지 직접 찾아올 리는 없다.

“급한 일이셨나 봐요. 이렇게 직접 찾아오시고.”

“전화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긴 하지.”

“그런가요.”

아무래도 원순철 학장은 자신을 100퍼센트 신뢰하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개의치 않았다.

인상 깊은 사건이 좀 있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상대방을 완전히 신뢰하게 되었다고 하면 오히려 의심이 갈 테니까.

민우는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렸다.

“방금 믿을 만한 소식통에서 정보가 하나 들어왔네. 학생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학칙 개정안이 방금 이사회를 통과했다고 말이야.”

“그렇습니까?”

“그렇습니까라니…….”

원순철 학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민우가 너무 태연하게 반응한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이해할 만도 하다. 원순철 학장을 비롯한 인문대 교수들은 지금껏 서지훈 교수가 총장이 되는 것에 배팅했으니까.

민우가 싱긋 웃었다.

“아, 이 타이밍에서는 제가 놀라는 제스처를 했어야 했나요?”

“그런 건 아니네만…… 생각보다 너무 무덤덤한데? 설마 이번 학칙 개정안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모르지는 않겠지.”

“잘 알고 있지요. 혹시 서지훈 선생님과는 말씀해 보셨습니까?”

“아직일세.”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순철 학장이 서지훈 교수를 지지한다고 해도, 아직 둘 사이는 서먹하다. 중개자 노릇을 하는 게 바로 민우였고.

먼저 대화를 나누고 서지훈 교수와 컨택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저나 서지훈 선생님이나 학칙이 개정될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백 총장이 꺼낼 카드는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니까요.”

“예상하고 있었단 말인가?”

“어느 정도는요.”

원순철 학장이 나오려던 말을 삼켰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거다. 하지만 민우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어필한 바 있다.

민우가 선수를 쳤다.

“이번 일로 교양학부 선생님들께서 고심이 많으시겠네요. 특히 학장님도 그렇고, 최재석 선생님 입장이 좀 난처해지셨겠습니다.”

최재석은 학보사 주임교수다.

일전에 민우의 인터뷰 기사를 수정 없이 그대로 내보내라고 허락한 바 있다. 그 기사 때문에 일이 이렇게 커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원순철 학장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건 걱정할 거 없네. 아직 대학본부에서 학보사로 압박을 넣거나 하진 않았으니.”

“하긴, 어찌 보면 백 총장이 판세를 엎을 단초를 제공했으니 공신 대접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군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말을 반전시킨 원순철 학장이 핵심을 물었다.

“대책이 있나?”

“있습니다.”

“좀 설명해 줄 수 있겠나?”

원순철 학장은 굳이 지저분하게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지지하는 입장에서 요구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였으니까.

민우는 그 사정을 이해했다.

“저는 원순철 학장님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소문이 퍼지면 곤란한 부분이 좀 있어서…… 아, 물론 학장님께서 여기저기 말씀하고 다닐 거라는 말이 아니고, 괜히 오해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이해하네. 하지만 우리 쪽 교수들을 안정시키려면 뭐라도 던져줘야 하지 않겠나?”

“그렇군요.”

민우는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학회 시작까지는 이제 3분여가 남았다.

“우리는 이공계 교수진을 공략할 겁니다.”

“교수진을? 학생이 아니고?”

“학생의 주권을 찾아주는 프레임으로 표심을 얻으려고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 표심은 백 총장이 가져가겠지요. 어떤 공약을 걸어도, 백 총장을 완전히 압도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원순철 학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민우도 그렇고 서지훈 교수도 그렇고 공수표를 날릴 만한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렇다면 대책은?

“학생들의 표가 선거에 반영되는 비율은 어느 정도입니까?”

“아직 거기까지는 소식이 없네.”

“그렇군요. 음, 제가 보기엔 학생들의 표 반영률은 전체에서 2할도 채 되지 않을 겁니다. 처음으로 학생들이 참여하는 선거이다 보니 이사회나 대학본부에서도 보수적으로 나오겠지요.”

“그건 나도 동의하네.”

“그렇다면 우리가 노려야 할 건 교수들의 표지요. 가장 비율이 높으니까요.”

“이공계 교수들을 감당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민우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얀까지 나선 일이다. 실패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았다.

“아마 지금쯤이면 슬슬 협상이 시작되고 있을 겁니다. 곧 좋은 소식을 가져다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렇군. 일단 우리와 뜻을 함께하는 교수들에겐 그렇게 소식을 전하지.”

“정 궁금하다 싶으면 직접 연락하라고 전해 주십시오. 이 기회에 커피 한잔하면서 친목을 도모하면 좋을 테니까요.”

민우는 끝까지 여유로운 태도를 견지했다. 그래서일까. 원순철 학장의 의심스러운 표정도 끝내는 누그러졌다.

“귀한 시간을 뺏어서 미안하군. 학회 준비 때문에 바쁘다 들었는데…….”

“괜찮습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당연히 시간을 내어야지요. 참, 오신 김에 학회에 좀 들렀다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명인대 선생님들도 많이 오셨습니다. 민영환 선생님도 계시고요.”

“민영환 교수가?”

원순철 학장이 살짝 놀랐다.

마음속으로는 이번 학회가 소규모로 치러지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민영환 교수 정도라면 학계에서 정점에 오른 사람인데, 여기까지 왔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원순철 학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온 김에 한번 인사나 드리고 가야겠군.”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민우는 원순철 학장과 함께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막, 학회가 시작되었다.

현대서사학회 회장인 이재환 교수의 기념사로 학회 시작을 알렸다.

그가 연단에 오르자 박수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이렇게 많은 분들을 저희 학회로 모실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반갑습니다. 현대서서학회 회장 이재환입니다.”

이재환 교수가 옆으로 나와 허리 굽혀 인사했다. 진심이 느껴지는 인사였다.

다시 연단으로 돌아온 그가 마이크를 쥐었다.

“멀리서 오신 손님들은 물론, 국내의 연구자 여러분, 그리고 휴머니티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특히 학회 장소를 제공해 주신 휴머니티 서강일 학장님께도 인사드립니다.”

박수가 이어졌다.

맨 앞쪽에 앉아 있던 서강일이 미소를 지으며 박수로 화답했다. 그 주변엔 민우는 물론, 최민식과 강예진도 함께 있었다.

“오늘은 우리 학회의 전환점으로 삼을 만한 날입니다. 단순히 많은 분이 참석해 주셔서는 아닙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우리 학회는 좀 더 다양하고 생산적인 역사를 써나가려 합니다.”

이번엔 랑느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통역기를 달고 있어 이재환의 메시지는 분명히 전달되었다. 그 옆에 앉아 있는 미셸과 셀린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희 학회의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여러분들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무언가를 바라지 않겠습니다. 다만 앞으로 저희들의 행보에 조금이라도 격려를 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때 이재환 교수의 시선이 민우를 향했다.

순간 민우가 움찔했다. 이재환 교수가 영악한 미소를 지었기 때문이다.

“이어 특별히 준비한 순서가 있는데요. 어렵게 모셨습니다. 박민우 선생님의 기조연설이 있겠습니다.”

이재환 교수가 손으로 무대를 가리켰고, 박수가 쏟아졌다. 한 방 먹은 표정을 지은 민우는 사양하지 않고 무대로 뛰어 올라갔다.

“이렇게 갑자기 떠미시면 곤란한데요.”

자리를 바꾸며 민우가 작게 투덜거렸다. 이재환 교수가 등을 툭툭 두드렸다.

“섭외료는 못 줘도 떠들 시간은 얼마든지 줄 수 있지. 할 말 있지 않아?”

이재환은 물론, 최민식과 강예진도 민우의 학회 개혁안에 대해 찬동하고 있었다.

바로 그 부분을 짚은 것이다.

“그래도 미리 언질이라도 좀 주시지.”

“그러면 재미없다고 예진이가 그러더라고. 너 뭐 죄지은 거 있어? 엄청 씩씩거리던데.”

“아.”

어쩐지. 강예진이라면 그런 식으로 복수할 만했다. 아까 너무 놀린 걸까?

피식 웃은 이재환이 뒤로 물러났다. 민우가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박민우입니다. 오늘은 얌전히 발표만 하고 가려고 했는데 실패했네요.”

그때 뒤에서 이수빈이 뛰어 들어왔다. 때마침 눈이 마주쳐 그녀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가 뒤쯤에 자리를 잡는 것을 보며 민우가 말을 이었다.

“저도 그렇지만 여기 모인 여러 선생님들께서도 실로 다양한 학회를 경험해 보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즐겁고 새로워야 할 학회가 점점 피곤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말이죠.”

뜻밖의 진지한 이야기에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조금 예민한 이야기가 될 수 있어, 민우는 어조를 부드럽게 다듬었다.

“실제로 매년 논문을 여러 편 써내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양적인 경쟁이 심화되고 있어요. ‘이런 주제로 논문을 쓰면 재미있겠다’가 아니라, ‘이번 학기엔 몇 편의 논문을 써야 한다’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애석하게도 이건 우리 후배들이 떠안아야 할 짐이기도 하고요.”

많은 참가자가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에 공감했다. 논문의 양적인 경쟁은 굳이 국문학계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저는 이곳 현대서사학회를 기점으로 좀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려고 합니다.”

민우가 두 팔을 벌려 청중을 가리켰다.

“여기에는 학계와 연이 없는 일반인들도 여럿 와 계십니다. 그분들은 휴머니티의 학생이긴 합니다만, 우리는 앞으로 일반인들의 학회 참여를 점차 늘릴 계획입니다. 우리끼리 모여서 떠드는 건 이제 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연구 성과가 일반인들도 공감할 수 있게 널리 알려진다면 좀 더 의미 있지 않을까요?”

짝짝짝짝!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잠자코 앉아 있던 민영환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것을 깨닫고는 당황했다. 그는 다시 근엄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리고 모두가 모여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관점과 논리를 공유한다면 좀 더 풍성한 학회가 되지 않을까요? 물론 이상론일 수도 있습니다. 실패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실증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우리의 노력이 조금 더 보람찬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민우의 연설이 끝남과 동시에 몇몇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점잖은 학회에서 보기 드문 장면이 연출되었다.

종국엔 모두가 일어났다.

민우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시작이 좋았다.

***

서지훈 교수와 자얀은 며칠 전부터 함께 움직였다.

얼마 전부터 이공계 교수를 만나고 있는데, 오늘이야말로 메인 이벤트라 할 수 있었다.

준비를 마친 서지훈 교수가 인문관 밖으로 나오니 자얀이 한가롭게 풍광을 감상하고 있었다.

「캠퍼스가 마음에 드신 모양이군요.」

「아, 그럼요! 명인대는 경치가 참 좋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통째로 사들이고 싶군요.」

「하하하. 다른 사람이 들으면 놀랄 겁니다. 자얀 씨는 그럴 능력이 있으니까 말이죠.」

서지훈 교수가 손짓하며 앞장섰다. 나란히 걷던 자얀이 물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디로 갑니까?」

「오늘은 좀 높은 분을 만나러 갑니다. 미리 알려드리면 재미없으니 일단 한번 가보시죠.」

「흥미롭군요. 드디어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나오는 거겠지요?」

「그럼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서지훈 교수는 자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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