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서사학회 학술대회 (2)
“민우야.”
누군가 불렀다. 손님맞이로 정신이 없다가 한숨 돌리고 있던 민우가 고개를 돌렸다.
언제 봐도 반가운 사람이 자신을 향해 손 인사를 하고 있다.
민우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오셨어요?”
“캠퍼스 좀 둘러보다 이제 내려왔네. 오기는 아까 전에 왔다. 근사하던데? 난 놈인 줄 알고 있었는데 사업 역량도 이렇게 뛰어날 줄은 몰랐구나.”
“하하하. 제가 한 거 아닙니다. 장소 섭외는 정연주 선생이 한 거예요.”
“알고 있어. 그래도 대단한 건 대단한 거지.”
그는 바로 현대서사학회의 학회장이자 민우의 대학원 선배인 이재환 교수였다.
두 사람은 반갑게 악수했다.
종종 연락을 주고받긴 했지만, 이렇게 실제로 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덕분에 손님이 많이 왔다. 방명록 보니까 벌써 50명 넘게 온 것 같더라. 부끄러운 말이긴 한데, 바로 전에 열었던 학회에서는 20명도 안 왔거든.”
“오히려 학생들에게 좋은 기회를 주신 선배님들께 감사할 뿐이죠.”
“하하하. 너란 녀석은 참. 그렇게 얘기할 줄 알았다!”
무한한 애정이 두 눈에 담겨 있었다. 이재환 교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민우의 어깨를 다독였다.
“아는 선생들한테 직접 메일 돌려서 참석해 달라고 했다며? 현민준 선생하고 송유진 선생이 그러던데. 메일 받고 깜짝 놀랐다더라. 네가 와달라고 한 탓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고.”
“좋은 거 있으면 널리 알려서 함께해야죠.”
“체면이 걸린 일이라 쉽지 않았을 텐데…… 고생했다.”
실제로 학회에 참석해 달라는 연락은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논문을 청탁하는 거야 그만한 대가가 있으니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단순 참석은 그 사람의 시간만 소비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우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당연히 모두가 민우의 부름에 응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이재환 교수가 말한 두 교수를 포함해서 몇몇 교수들이 초대에 응해 자리를 밝혀 주었다.
민우는 그 결과에 실망은커녕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상대가 몇 명이라도 있다는 게 중요한 거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너무 나이브하게 학회를 운영한 건 아닌지 반성할 수밖에 없더라고. 학회 관계자도 아닌 네가 이렇게 발 벗고 나서고 있는데 우리는 뭐한 건지…… 민식이랑 예진이랑 셋이 반성하는 시간 좀 가졌다.”
“신경 쓰지 마세요. 진섭이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선배님들께 도움 많이 받았잖아요. 이럴 때 갚지 않으면 또 언제 갚겠어요?”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너도 여기서 네 몫 챙겨 가. 무슨 말인지 알지?”
“옙. 잘 알겠습니다.”
남의 학회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라는 의미였다.
민우와 이재환 교수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엘리베이터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손님이 내렸다.
“헉!”
데스크를 보고 있던 차민재가 벌떡 일어났다.
“서, 선생님…….”
“왜, 내가 못 올 곳에라도 왔냐?”
“아, 아뇨. 아닙니다!”
“뭘 그렇게 허둥대고 있어? 흥, 등록비가 얼마지?”
“아, 이만 원입니다!”
노년의 사내가 지갑에서 지폐 두 장을 꺼내 차민재에게 건넸다. 차민재는 허둥지둥하다 옆에 있던 민우에게 소리쳤다.
“바, 박 선생님!”
“응?”
돌아선 민우와 이재환이 말 그대로 깜짝 놀랐다.
꼬장꼬장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노년의 사내와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다름 아닌 그는 명인대의 민영환 교수였다.
“선생님!”
민우와 이재환 교수가 서둘러 뛰어갔다.
두 사람의 지도교수이기도 한 그는 뒷짐을 진 채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흘겨보았다.
민우는 쉽사리 나서지 못했고, 이재환 교수만이 조심스레 말을 붙일 수 있었다.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왜, 내가 못 올 곳에라도 온 모양이지? 이 잘난 학회엔 사람 가려서 받나?”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이재환 교수는 쩔쩔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도교수인 민영환 교수는 얼마 전 ‘현대문학연구학회’라는 메이저 학회의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래서 아끼던 제자인 이재환, 최민식, 강예진에게 도와달라고 콜을 보냈으나 만족스러운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던 것.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학회의 임원진이 또 다른 학회의 임원을 겸임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문제 될 수 있으니까.
“괘씸한 녀석들.”
“죄송합니다.”
이재환 교수도, 민우도 고개를 숙였다. 헛기침을 한 민영환 교수가 손을 내밀었다. 그제야 차민재가 학회지를 넘겼다.
세 사람 모두 숨죽인 채 불호령을 기다렸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민영환 교수였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학계에서의 힘이 엄청났으니까.
“경우라는 게 있지. 학회를 열었으면 지도교수에게 연락 한 통 보내는 게 예의 아니더냐?”
“그게…… 죄송스러워서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 학회도 도와드리지 못했잖습니까.”
“그야 당연한 이야기지! 한 학회의 회장이 다른 학회 임원으로 기웃거리면 남들이 욕밖에 더하더냐? 돌려먹는다고 뒷이야기나 하고 돌아다니겠지. 당연한 걸 가지고 걱정하기는.”
이재환 교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그래도 혼내러 온 건 아닌 것 같다. 민우가 웃으며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학회가 더 빛나는 것 같은데요?”
“입에 침은 바르고 말해야지. 쯧. 그리고 이 선생.”
“예.”
“방해하려고 온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라. 제자들이 뭐라도 한다는데 안 올 수가 있어야지.”
그제야 이재환 교수의 표정이 환해졌다. 멋쩍었는지 민영환 교수가 헛기침했다.
민우가 다시 나섰다.
“선생님. 이쪽으로 오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민우가 손으로 안쪽을 가리켰고, 민영환 교수가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민우가 그 옆으로 따라붙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민영환 교수가 물었다.
“여기가 휴머니티 캠퍼스라고?”
“맞습니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돼서 부족한 게 많습니다만, 여러 선생들이 노력하고 있어요.”
“그것 때문에 명인대가 시끄러운 건 잘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피식 웃은 민영환 교수가 자리에 앉았다. 주목받지 않는 구석 자리였다. 민우는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그의 곁에 섰다.
한편, 무대 앞에서 학회를 준비하던 강예진이 이쪽을 보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곤 행사장 밖으로 재빨리 도망쳤다.
소식을 들은 한진섭은 얼굴만 빼꼼 내민 채 밖에서 이쪽을 관찰하고 있었다.
“지훈이를 총장으로 밀 생각을 하다니…… 정말 너란 녀석은 끝을 알 수가 없구나.”
“다 학교와 학계를 위해서지요. 누군가 해 줄 거라고 생각만 한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니까요.”
민우는 당당하게 말했다. 점잖은 표정을 지은 민영환 교수가 고개를 들어 민우를 올려다보았다.
“자신 있느냐?”
“있습니다.”
“근거는?”
“제 선택을 믿습니다. 무엇보다도 서지훈 선생님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믿고 있고요.”
민영환 교수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사실, 비슷한 질문을 서지훈 교수에게도 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 사람의 대답은 똑같았다.
그러다 보니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오고야 말았다.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해 보거라. 뭐, 이번 기회에 우리 과에서 총장 한 명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기대해 주십시오.”
“참, 이번에 랑느 박사 일행이 학회에 참석한다고 했었지?”
“예.”
민우가 앞 좌석을 가리켰다. 그곳엔 랑느 박사와 미셸, 그리고 셀린느가 책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등재학술지도 아닌 학회에서 그 정도로 섭외했다면, 우리 학회에서는 좀 더 귀한 인사들을 초빙할 수 있겠군. 가능하겠지?”
“아, 예. 노력해 보겠습니다.”
“결과로 증명해 봐.”
“옙.”
민우는 민영환 교수가 이끄는 학회에서 연구이사직을 맡고 있다. 그렇다면 학술대회 섭외에도 발 벗고 나서야 하는 입장이다.
물론 민우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세계 각국에 민우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랑느 박사 말고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따 캠퍼스 좀 둘러보자꾸나.”
“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단순히 학회에만 참석하려 온 건 아닌 모양이다. 민우는 웃으며 그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
“어휴, 민 선생님은 연락도 없이 왜 오신 거야? 심장 멎는 줄 알았네.”
강예진은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아직 민영환 교수와 제대로 인사할 자신이 없었다. 잔소리가 쏟아질 게 뻔하니까.
그에 비해 민우는 여유를 부렸다.
“그래도 가서 인사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매도 먼저 맞는 게 좋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내가 하루 이틀 맞아봤니? 선생님 삐지면 얼마나 오래가는지 알면서 그러냐 넌.”
“잔소리하려고 이런 데 오실 분 아닌 거 누나도 잘 알잖아요.”
민우의 일침에 강예진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단순히 서운하고 화가 났다면 오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강예진은 쉽게 의심을 벗기지 못했다.
“설마 진짜 우리 격려해 주려고 오신 건 아닐 거야. 속지 않아!”
“아끼는 제자들이 뭐라도 하려고 노력하고 있잖아요. 저야 뭐 박사는 서지훈 선생님께 지도를 받긴 했지만, 형님들이나 누나는 박사까지 민 선생님 지도받았잖아요? 오셔서 이런저런 말씀 해주시려고 하신 거겠죠.”
“으음…… 저 노친네가 그럴 리가 없어.”
“말이 심하시네.”
강예진이 무서운 눈을 하며 민우를 노려보았다.
“언제부터 민 선생님 편이 된 거야?”
“전 예전부터 민 선생님 편이었는데요?”
민우가 정색하며 말하자, 강예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배 교육을 잘못시켰다고 중얼거리며.
“안 되겠네. 내가 서지훈 선생님한테 당장 뛰어가서 일러바쳐야지.”
“애석하지만 서지훈 선생님이라면 당분간 저를 어쩌지 못하십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제가 킹메이커 노릇 하기로 했거든요. 그러니 끈끈한 우리 사이를 훼방 놓지 마세요. 계속 그러시면 총장이 보낸 첩자라고 소문낼 겁니다.”
“야!”
결국 못 참은 강예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민우는 낄낄 웃으며 자리를 피했다.
다시 데스크로 돌아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느덧 학회 시작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세미나실은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득하다.
굳이 숫자로 세지 않아도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는 게 체감되었다.
차민재가 기록한 엑셀 데이터를 확인한 민우는 씨익 웃었다.
‘참가자가 총 121명? 이 정도면 대성공이네.’
휴머니티 학생들을 동원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소규모 학회에서 이 정도 참가자를 유치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차민재가 물었다.
“오후에도 손님들이 많이 오실까요?”
“오후엔 별로 안 올 거야. 발표하는 분들만 오시겠지. 바쁜 건 거의 끝났다고 봐도 돼.”
“생각보다 많이 오셔서 놀랐어요.”
“앞으로는 더 많아질 거야. 각오 단단히 해야 한다.”
차민재가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그러다 옆쪽 협탁에 놓인 학회지를 확인했다. 참가자가 많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선생님. 학회지가 좀 부족할 거 같은데요? 제가 좀 가져오겠습니다.”
“아냐. 넌 자리 지키고 있어. 내가 내려갔다 올 테니.”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띵!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렸고, 민우는 깜짝 놀랐다.
안에 타고 있던 사람도 놀라긴 했지만, 표정이 그리 반가워 보이진 않았다.
“마침 잘 만났군. 박민우 교수.”
“학장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람은 바로 명인대 교양학부장인 원순철 학장이었다. 민우는 의아했다. 원순철 학장을 초대한 기억은 없었다.
“여긴 어떻게…….”
“잠시 선생 좀 만나려고 왔지. 시간 좀 괜찮겠나?”
민우는 시계를 확인했다.
“10분 정도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
“이쪽으로 오시죠.”
민우는 아직 사용하지 않는 빈 강의실로 자리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