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63화 (363/500)

현대서사학회 학술대회 (1)

다음 날, 민우는 아침 일찍 일어나 외출 준비를 했다. 이수빈은 새벽 늦게까지 원고 수정을 했는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민우는 그녀가 깨지 않게 슬쩍 내려와 이불을 잘 덮어준 뒤 거실로 나왔다.

어머니가 아침 일찍부터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 왔다. 바로 나가니?”

“밥은 먹고 나가야죠.”

“어서 씻고 오너라.”

민우는 씻은 뒤 아침밥을 먹었다. 어머니가 오는 김에 집에 있던 반찬을 싸 온 모양이다. 못 보던 것들이 많았다.

모두 다 민우가 좋아하는 반찬들이다.

“요즘도 바쁘니?”

어머니도 같이 수저를 뜨며 물었고, 민우는 씨익 웃었다. 아무리 나이를 먹는다고 해도 어머니 입장에서는 아직 애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그래도 과거에 과로하다 쓰러진 전력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제 어머니도 등이 굽을 정도로 연로하다. 잔소리가 그리워지는 날도 곧 오겠지.

“바쁘죠. 요새 하는 일도 좀 늘었고.”

“어휴, 언제쯤 편히 쉰다니? 이제 교수도 되고 좀 편히 사나 싶었더만…….”

“바쁠 때가 좋을 때예요. 일 없어서 집에서 뒹구는 것보단 낫지.”

어머니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마친 민우는 바로 옷을 챙겨입었다. 오늘은 중요한 날인 만큼 정장을 입었다.

신발을 신은 민우는, 돌아서며 배웅을 나온 어머니에게 말했다.

“오늘 윤아 잘 부탁해요. 엄마도 쉬어야 하는데 와달라고 해서 미안하네.”

“걱정하지 말고 잘하고 와. 오늘 늦니?”

“아마 늦을 거예요. 학회 끝나고 손님들하고 뒤풀이해야 해서요. 아마 수빈이도 늦을 거 같고.”

“그럼 자고 가야겠구나.”

“기왕 오신 김에 며칠 쉬다 가세요.”

“수빈이가 불편해해. 윗사람이 집에 오래 있는 거 아니다. 어서 가 봐.”

어머니가 서두르라고 손짓했다. 민우는 집 밖으로 나갔고,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레아의 차에 올랐다.

“좋은 아침입니다. 매니저님.”

“좋은 아침요.”

레아는 민우의 한 달 스케줄을 모두 꿰고 있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차가 출발했고, 민우는 가방에서 인쇄물을 꺼냈다.

레아가 물었다.

“수빈 씨는 같이 안 가시는 건가요?”

“지금 자고 있어요. 오늘 발표 때문에 어제 늦게 잔 거 같더라고요.”

“매니저님도 오늘 발표하시지 않나요?”

“하죠.”

“그런데도 여유가 넘쳐 보이시네요.”

민우가 씨익 웃었다. 그는 여전히 인쇄물에 집중하며 대답했다.

“긴장이야 됩니다. 하늘 같은 선배들 앞에서 발표해야 하는 거니까. 그래도 한편으로는 즐거워요. 이번에는 또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싶어서.”

“늘 긍정적이셔서 좋아요. 미국에서 제가 모시던 보스들은 늘 부정적이었거든요.”

“그래도 제임스 씨는 좀 다르지 않나요?”

센트럴 북스의 제임스 사장 이야기가 나오자 레아가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분은 다른 의미로 부정적인 분이셨죠.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는 보스는 재앙과 다를 바가 없죠.”

“하하하하. 재앙이라.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차의 속도가 살짝 빨라진 것 같았다. 민우는 괜히 레아를 자극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하자 차가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고마워요. 오늘은 제가 알아서 들어갈게요.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어서.”

“예. 혹시라도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고마워요.”

미소와 함께 차에서 내린 민우는 즉시 휴머니티 캠퍼스 안으로 들어갔다. 함께 들어가던 학생 몇몇이 알은체를 하며 인사했다.

로비로 들어서니 현대서사학회 학술대회를 알리는 입간판이 여러 개 서 있었다.

오늘 학회는 6층 세미나실에서 열린다.

민우는 엘리베이터에 올라 바로 6층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왔냐?”

6층 로비에 놓인 길쭉한 책상에 차민재와 강예진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한쪽에는 학회지와 안내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민우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잘 어울리는데요? 역시 선배님은 학회 데스크가 딱입니다.”

“너 지금 염장 지르냐?”

“하하하. 당연히 농담이죠. 저랑 교대해요. 제가 민재랑 데스크 볼게요.”

민우가 손짓하자 강예진이 살짝 놀랐다.

“네가 왜 데스크에 앉아? 오늘 발표도 해야 하는데.”

“전에 제가 접수 맡겠다고 약속한 거 잊으셨어요?”

“당연히 그냥 해본 말인 줄 알았지.”

“진심입니다. 그리고 그쪽이 더 효율이 좋아요. 아무래도 오늘 제 손님들이 많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이 녀석 교육도 시켜야 하고.”

민우가 차민재를 바라보았다. 그는 단단히 각오가 되어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이 강예진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떨떠름했다.

“아, 왠지 이러면 나중에 재환 오빠한테 한 소리 들을 거 같은데.”

“걱정도 팔자십니다.”

“그래! 까짓것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그럼 부탁해. 민재 너도 정신 바짝 차리고.”

“네!”

강예진이 물러났다.

민우는 테이블의 상태를 살폈다. 학회지와 안내지는 한 번에 배부할 수 있도록 잘 정리되어 있었고, 이름표도 이름순으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프랑스에서 온 손님들 이름표는 따로 분류해 놓을 정도로 차민재는 센스가 좋았다.

“지금까지 몇 명이나 들어갔어?”

“9명 들어갔어요. 다들 휴머니티 학생들입니다.”

“아직 30분 정도 남았으니까 이제부터가 시작일 거야. 너무 많이 몰려와도 당황할 필요 없다.”

“넵.”

“학회엔 얼마나 가입했어? 휴머니티 학생들.”

민우가 묻자 차민재는 노트북에 띄어 둔 엑셀 화면을 확인했다.

“46명 가입했습니다. 대부분 대학원생들이고요.”

“생각보다 많구나. 그럼 적어도 40명 정도는 오늘 학회에 나오겠네.”

“학생만 40명이면 꽤 많이 오는 거죠?”

“그렇지. 보통 석사들은 학회에 잘 오지 않으니까. 특히나 이렇게 마이너한 학회에는. 우리가 기반 대학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차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의 말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집념이 보였다.

“기왕 할 거면 제대로 해 봐. 여기 계신 선생님들께도 배울 게 많을 테니. 이런 기회 쉽게 오는 거 아니다.”

“허락만 해 주시면 총무간사를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그래? 그럼 나중에 한번 말씀드려 보마.”

“감사합니다!”

“미리 감사하단 말 하지 마. 아직 허락받은 거 아니니까.”

민우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학회의 총무간사는 보통 박사과정에 있는 대학원생들이 많이 한다. 석사는 아직 경험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상황이 적절히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현대서사학회는 한창 성장하는 학회이고, 또 차민재는 센스가 좋은 제자였으니 한번 맡겨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 거다.

게다가 강예진의 부담도 줄여줄 수 있고 말이다.

학회가 성장하는 만큼, 차민재도 함께 성장한다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그때 세미나실에서 한진섭이 걸어 나왔다. 어깨가 축 늘어진 게 지쳐 보였다.

“하…… 왠지 옛날 생각나는데. 강제 노역에 동원된 기분이랄까. 석사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다.”

“안에서 뭐 했어?”

“통역기 테스트하느라 진땀뺐네. 써보지도 못한 걸 나보고 하라고 하면 어쩌라는 거야?”

“언젠 신방과 복수전공했다고 으스대지 않았냐?”

“선입견 오지고요.”

한숨을 내쉰 한진섭은 옆에 놓인 간식 코너에서 음료수를 하나 챙겼다.

“그런데 수빈이는 안 보이네?”

“이따 오후에 올 거야.”

“못됐구만? 오빠들이 이렇게 아침부터 땀 흘리며 고생하고 있는데 감히 늦잠을 자고 있어?”

“억울하면 너도 발표하시든가요.”

“아유! 우리 이 선생님 무리하면 안 되지. 푹 쉬라고 전해 줘.”

한차례 너스레를 떤 한진섭이 교수 연구실로 향했다. 잠시 쉬려는 모양이었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차민재가 말했다.

“한 선생님은 참 독특하신 거 같아요.”

“왜?”

“뭔가 격이 없다고 할까…… 옆집 형처럼 친근하거든요.”

민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친근하면 나중에 형동생 하자고 한번 말해 봐. 좋다고 할걸? 매일같이 술 마시자고 할 테니 힘들겠지만.”

“어…… 그건 그거대로 좀 곤란한데.”

그때 엘리베이터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렸다.

한국에서 보기 드문 벽안(碧眼)이었으나,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민우가 일어서서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박사님.」

「오, 미스터 박! 아침부터 부지런하시군. 이러고 있으니 문득 옛날 생각이 나는군. 현대문학연구학회였던가? 명인대에서 열렸던.」

랑느 박사와 미셸, 그리고 셀린느가 데스크 앞에 섰다. 민우가 지시하지 않아도 차민재는 그들의 이름표를 챙겼다.

「맞습니다. 그때 처음 뵈었었죠.」

「감회가 새롭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걸 거야.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게 뭔지 아나?」

민우가 웃으며 대답을 기다렸다. 옆에 있던 미셸과 셀린느도 기대하는 눈빛이다.

랑느 박사가 두 팔을 벌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네의 눈빛이 똑같이 반짝거린다는 거야. 참으로 신기한 일이군.」

「예전에 인사동 찻집에서 박사님께서 그러셨잖아요. 어린아이 같다고. 그래서 그런 게 아닐까요? 어른이 되려면 아직 먼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하하.」

민우가 고갯짓하자, 기다리고 있던 차민재가 이름표를 나눠주며 방명록 작성을 부탁했다.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잘 해냈다.

민우가 오늘 식순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설명했다.

「오늘 박사님 연설은 2부에 특별 행사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미셸 발표는 1부, 셀린느 씨는 3부에 있어요. 오전 세션 끝나고 점심 식사도 준비했으니 같이 드시면 되겠습니다. 학회가 모두 끝나고 뒤풀이 행사도 있으니 함께 해 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미셸과 셀린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랑느 박사는 현대 사상의 흐름과 전망이라는 주제로 연설을 계획하고 있고, 미셸과 셀린느는 프랑스에서 연구했던 것 중 흥미로운 테마를 몇 개 소개하기로 했다.

그때 민우는 따로 챙겨온 것들을 그들에게 나눠주었다.

프랑스어로 된 책자였다.

「이건 제가 특별히 준비한 건데요. 학회 논문집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겁니다. 한글로 적혀 있는 것들은 좀 불편하실 거 같아서요.」

「오오…… 이걸 따로 준비했다고? 양이 꽤 많은데?」

책자를 받아든 프랑스 학자들이 연이어 감탄을 터트렸다. 100페이지가 넘는 페이지에 깨알같이 작은 프랑스어가 뿌려져 있었다.

루카치의 안경의 능력을 모두 흡수한 민우에게는 식은 죽 먹기인 일이었다.

그냥 보이는 대로 옮기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한국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어서 좀 욕심 내봤어요. 널리 알려주시면 감사하겠네요.」

「당연히 그래야지. 고맙네!」

껄껄거리며 웃은 랑느 박사가 이번에는 차민재를 주목했다.

「근데 여기 계신 젊은이는 누구인가?」

「아, 소개해 드릴게요. 제 제자인 차민재입니다. 명인대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어요.」

「오, 반갑군.」

랑느 박사가 악수를 청했다. 그제야 차민재가 당황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미스터 박이 제자라고 소개해 준 사람은 처음이지 않나?」

「아…… 제가 그랬습니까?」

「맞아요. 민우는 제자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으니까. 우리끼리 가끔 그런 이야기 했어요. 과연 민우의 후계자는 어떤 사람일까.」

미셸이 덧붙여 말하자, 민우는 멋쩍게 웃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센스가 좋은 친구라서요. 기대하고 있습니다.」

「나도 기대되는군. 두 사람, 왠지 비슷한 눈빛을 가진 것 같아.」

어리둥절하던 차민재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민우의 제자로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곧 프랑스 학자들이 안으로 들어갔고, 그것을 시작으로 학회장에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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