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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362화 (362/500)

치트키 (4)

엄청난 손님을 맞이했으나, 서지훈 교수는 의외로 덤덤했다. 배포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이.

자얀은 한국식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처음 인사드리네요. 자얀입니다. 하지만 처음 뵙는다는 느낌이 안 드는 게 신기하네요.」

「저도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서지훈입니다.」

민우는 깜짝 놀랐다. 서지훈 교수가 이렇게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할 줄이야.

그러고 보니, 서지훈 교수는 예전에 IAHS에 키노트 스피커로 초청을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그 외에도 해외 학술대회에 자주 나간 바 있으니 아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때 서지훈 교수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민우를 흘겨보았다.

「넌 왜 그런 표정이냐?」

「아뇨. 그냥. 왠지 영어로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익숙하지 않아서요.」

「아, 뒷방 꼰대는 뭐 알파벳 정도만 읽으면 된다 이런 건가. 하여간 요즘 것들은.」

「하하하. 설마요.」

씨익 웃은 서지훈 교수는 다시 자얀을 주목했고, 악수를 청했다.

「우리 박 선생 뒷바라지해 주느라 고생 많으십니다. 알 카흐파 의장님의 아드님이시지요? 좋은 일을 많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교수님께 그런 말씀을 들으니 신선한데요? 영광입니다. 방금 말씀은 아버지께 꼭 전해 드리겠습니다.」

「저 또한 영광인 일이군요.」

형식적인 인사가 끝나고, 세 사람은 가운데 놓인 자리로 이동했다. 서지훈 교수가 직접 원두를 갈고 커피를 준비했다.

은은하고 고소한 향이 연구실을 적셔나갔다.

그 향을 음미하며, 자얀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서고를 구경했다.

「뭔가 민우 네 연구실과 비슷한 느낌인데? 책이 굉장히 많네. 두꺼운 것도 많고.」

「내 스승님이잖아. 그래도 많이 달라. 워낙 독서량이 많으셔서 나보다 훨씬 많이 읽으시고.」

「책은 읽는 게 전부가 아니지 않나?」

「자기 것으로 소화시키는 것도 중요하지. 그런 면에서 아직 난 많이 부족해.」

민우의 말에 자얀이 콧방귀를 뀌었다. 자얀은 지금껏 수많은 비즈니스 파트너를 만났지만, 민우처럼 책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랬다면 노벨상이 서지훈 교수님께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안 그래도 조만간 반납하려고. 순서가 잘못됐다고. 원래 주인은 명인대 국문과에 따로 있다고.」

「너무 늦은 거 아니냐? 진즉 그랬어야지. 그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애들 가르치겠어?」

서지훈 교수가 슬쩍 끼어들어 잔소리했다. 민우와 자얀이 웃었고, 각자 커피를 홀짝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먼저 민우가 결론을 말했다.

「자얀이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정말 큰 힘이 될 거예요.」

「그렇구나. 음,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와주실지 알면 나중에 답례를 제대로 할 수 있을 텐데요.」

재치 있는 질문에 만족한 자얀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전에 설명을 좀 해야겠는데요. 저는 서지훈 교수님을 도우려는 게 아닙니다. 민우의 체면을 살려주려는 건 더더욱 아니고요.」

「그건 좀 의외의 말씀이군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과정이 어떻든, 결국 우리 아랍에미리트를 부강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지요.」

민우와 서지훈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친분이 있다고 해도 그냥 퍼줄 만큼 오일 머니가 그렇게 만만한 건 아니다.

자얀이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연기관이 개발된 이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석유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귀중한 자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좀 다르죠. 셰일 혁명, 즉 셰일 가스 시추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원유 시장에 큰 변화를 주었습니다. 물론 정치적인 이슈를 언급하지 않을 순 없지만…… 순수히 아카데믹한 입장에서 본다면 주목할 만한 일이죠. 새로운 에너지에 대한 갈망은 고대로부터 계속되어 오던 거 아니겠습니까?」

「음, 어떤 말씀인지 알 것 같군요. 결국은 기술로 승부를 보게 된다는 말씀이라고 이해하면 되겠군요?」

「정확합니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구가 필요하지요. 그리고 연구를 할 인력도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 아랍에미리트에서도 노력하고 있지만…… 역시 아직은 조금 뒤처진 느낌이지요.」

산유국의 딜레마다.

돈은 넘쳐흐르고 있지만, 이런 부가 끝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리 쌓아 둔 부를 적절한 곳에 투자해야 한다.

하지만 교육은 인프라뿐만 아니라 전통도 중요하다.

돈을 쏟아 넣는다고 해서 근사한 교육 시스템이 완성되는 건 아니다. 오랜 시간과 경험, 그리고 집단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자얀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명인대 이공계열 교수들에게 도움을 좀 받을까 합니다. 물론 그만한 대가는 치러야겠지요. 저는 한국의 우수한 과학기술을 믿습니다.」

「고마운 말씀이군요. 우리 교수들이 들으면 자랑스러워할 겁니다.」

민우와 서지훈 교수는 자얀이 사용한 ‘이공계열 교수’라는 표현에 분명한 계획이 있음을 실감했다.

두 사람은 이공계열 교수를 표밭으로 인식했지만, 자얀은 정반대였다.

자얀이 원하는 것은 과학 교육과 기술 등의 인프라 구축이다. 즉, 기초과학과 응용과학 모두를 잡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학은 물론, 이학에도 투자를 많이 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의 ‘이공계’가 완성되는 것이다.

자얀이 분위기를 환기시킬 겸 손뼉을 한 번 쳤다.

「물론 제가 사업 파트너로 서지훈 교수님을 선택한 건 단순히 이해득실만 따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곳은 수두룩하니까요.」

자얀은 자신감을 보였다. 서지훈 교수도 이에 지지 않고 응수했다.

「흥미로운 말씀이군요. 이해득실만 따진 게 아니라면 어떤 걸 또 따지셨습니까?」

「아마 오래전 일일 겁니다. 어느 날 민우를 보러 연구실로 찾아갔는데, 머리를 싸매며 괴로워하고 있더군요. 학회 일 때문에 말이죠.」

「아아.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네요.」

서지훈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고, 민우는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 모두 자얀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감을 잡았다.

「당시 민우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긴 했지만 결국 그 부담감을 이겨낸 건 민우의 역량이었죠. 그리고 마치 탈피한 애벌레처럼 나비가 되어 훌훌 날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민우가 그러더군요. 그건 토론이 아니라 가르침이었다고.」

그 이후로 학회에서 서지훈 교수와 맞선 적은 없지만, 그때의 가르침을 여전히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자얀이 말을 이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학문이라는 단어로 정의되기 전에 사람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사건이었죠. 뭐, 민우에게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진 않았지만 솔직히 그때는 좀 충격이었습니다.」

「그러셨군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그래서 그때 이후로 줄곧 생각합니다. 그런 스승과 제자가 우리 아랍에미리트에도 많아지길 바란다고요. 하지만 바라기만 해서는 얻을 수 없지요. 그렇다면, 그 두 사람을 지원해주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이해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와주시겠다고 한 거군요.」

「핵심은 그렇습니다.」

자얀이 토로한 것 이상으로, 서지훈 교수도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말했다.

「기대에 어긋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제 일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자얀 씨가 내린 결정이 후회가 되지 않도록 제가 신경 쓸 예정이라서. 민우 녀석도 그럴 거고요.」

「감사한 말씀이네요.」

민우는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며 훈훈한 표정을 짓고 있다. 처음 만나는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편하게 대화를 나눴다.

어쩌면 자얀도 자신과, 그리고 서지훈 교수와 비슷한 결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연구사업은 100만 달러로 가볍게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자얀은 손가락을 모두 펼쳐 ‘10’을 가리키며 말했다.

「100만 달러라면, 한화로 12억 정도 되는 금액이군요.」

서지훈 교수가 덤덤히 말했다.

한편 민우는 좀 기묘한 마음이 들었다. 아까 명인대를 통째로 사면 된다는 발언치고는 금액이 다소 적었기 때문에.

그 표정을 눈치챘는지, 자얀이 피식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100만 달러 케이스 열 건. 이 손가락은 이런 의미죠. 총액 1천만 달러로 시작하겠습니다. 시작은 가볍게. 끝은 무겁게.」

자얀이 폈던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약 120억 원.

이 정도면 명인대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지 않을까?

* * *

그날 밤, 11시 넘어 늦게 퇴근한 민우는 집으로 들어갔다. 논문을 쓰고 있었는지 서재에서 이수빈이 걸어 나왔다.

“자얀 씨 왔다면서요?”

“지금 호텔 잡아주고 오는 길이야.”

“갑자기 무슨 일로? 요즘 좀 뜸했잖아요.”

민우가 실실 웃기만 하자 이수빈이 금방 눈치를 챘다. 두 사람은 안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궁금했던 이수빈이 따라붙은 것이다.

“혹시 이번 일에 끌어들인 거예요?”

“어허, 끌어들이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끌어들인 거 맞네.”

한숨을 내쉬면서도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다.

엄밀히 따지면 이수빈도 한 배를 탄 사람이다. 아내라서가 아니라 그녀의 지도교수인 설예라 교수도 청록회 회원이고, 서지훈 교수를 총장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민우는 옷을 갈아입으며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이수빈은 투자 규모를 듣고 깜짝 놀랐다.

“120억이나? 와, 진짜 스케일 크네.”

“그 전에 나랑 따로 이야기할 땐 그냥 명인대를 통째로 사면 되는 거냐고 했었지.”

“그렇게 해보라고 하지 그랬어요? 그것도 되게 재미있는 전개인데.”

“말이 쉽지. 명인대가 돈이 급한 대학은 아니잖아?”

“엄청 급해 보이는데요? 있는 교수들 다 끌어다가 인문학 프로그램에 때려 넣는 걸 보면요.”

교양학부에서 주관하던 인문학 프로그램은 이제 대학본부에서 완전히 장악했다. 그 후로 각 전공과의 융합이 진행되고 있다.

어떤 교수는 외연이 넓어졌다는 긍정적인 표현을 쓰기도 했고, 어떤 교수는 잡탕이 되었다는 부정적인 표현을 쓰기도 했다.

이수빈은 후자 쪽이었다.

“120억을 쏟아 넣으면 교수들도 솔깃하겠네요.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모르겠네…….”

“글쎄. 그건 봐야 아는 일이지. 연구비 준다고 넙죽 받아서 충성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적어.”

“그럼요?”

민우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연구비의 가치를 생각해야지. 뭐, 제자들 연구비 횡령하는 악질 교수들도 있긴 하지만 그건 일부고. 대부분은 학자들의 사명 같은 게 있어. 내 연구가 국가와 인류에게 얼마나 이바지할 것인가.”

“아하.”

“그러니 서지훈 선생님과 자얀의 진심이 통하기를 바라야지.”

“오빠는 손가락만 빨고 있겠다고?”

“설마 그러겠어? 일단은 내일 학회부터 어떻게 좀 처리합시다. 논문은 수정 끝났어?”

“아직 보고 있어요.”

민우가 피식 웃었다.

“긴장되나 보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작은 학회이지만 구성원들이 다들 아는 사람들이니까. 이재환, 최민식, 강예진 이 세 사람에게 까인 게 하루 이틀이던가.

그들 밑에서 공부한 대학원생이라면 발표대에 서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법이다.

“내가 극복하는 법 알려줄까?”

“응.”

“아주 강력한 백신을 맞는 거지. 메이저 학회에서 설예라 선생님하고 한번 토론해봐. 그러고 나면 누구도 무서워지지 않게 되더라고.”

“오히려 트라우마 생길 거 같은데?”

“그럼 어쩔 수 없고.”

민우는 껄껄 웃으며 수건을 목에 걸었다. 남 일이라는 거냐. 잔뜩 약오른 이수빈은 입술을 툭 내밀며 다시 서재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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