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61화 (361/500)

치트키 (3)

명인대 내부 분위기는 김명현이 예상했던 대로 돌아갔다.

백성웅 총장이 선제 조치를 한 덕에 학생들의 지지율을 어느 정도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덕분에 서명 운동을 시작한 총학생회 측에서는 서명 결과를 대학본부에 전달할 뿐, 이후의 운동은 잠시 중단했다.

이사회에서 어떻게 의결되는지에 따라 이후 행동을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리고 그 소식은 모두에게 퍼져, 이제 명인대 구성원이라면 총장 선거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지금 민우의 연구실에 찾아온 한진섭도 마찬가지다.

“이제 어떻게 하냐? 이거 분위기가 백 총장 재선 쪽으로 흘러가는 분위긴데.”

한진섭은 소파에 편히 앉아 연구실 안에 마련되어 있는 간식을 축내고 있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민우는 그저 웃기만 할 뿐이다.

석사 시절부터 지금까지 민우의 최측근 노릇을 했던 한진섭이다.

그 미소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모를 리 없다.

“뭔가 흉계가 있구만?”

“흉계라니. 누가 들으면 반란이라도 일으키는 줄 알겠네.”

“반란 맞지. 현 총장이 재임을 노리고 있는데 그걸 저지하려는 거니까.”

“뭐, 내가 총장 선거에 나가는 건 아니잖아?”

싱겁게 대꾸한 민우는 마우스를 클릭해 메일 발송 버튼을 눌렀다.

일을 한 꼭지 끝낸 민우는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커피를 한 잔 가득 채워 한진섭과 함께 어울렸다.

“뭐가 그리 바빠? 도통 쉬는 꼴을 못 보겠네.”

한진섭이 투덜거리자, 민우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바쁜 게 아니라 네가 한가한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냐?”

“나야 뭐 학부 교수는 아니니까 비교적 널널하지.”

“잘나셨어 아주.”

한진섭은 국제어학원 소속 교수다. 외국인들을 상대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주로 하기 때문에 격무에 시달리는 일은 크게 없다.

다만 학생들과의 유대관계가 일반 학부나 대학원에 비해 약한 게 사실이라, 몇몇 국제어학원 교수들은 학부 교수 자리를 희망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진섭은 굳이 그런 것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적당히 일하고 월급을 받을 수 있으니 좋다고 노래를 부른다.

일례로 학부 전임교수는 학과 졸업생들의 취업률을 신경 써야 하지만, 국제어학원 교수는 그런 것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여러모로 행정적인 면에서 자유로운 부분이 있다.

“아는 선생님들께 메일 좀 보내고 있었어. 일이 좀 촉박해서 서두르느라 혼났네.”

“서지훈 선생님 좀 지지해 달라고?”

“뭔 소리야. 그런 걸 왜 메일로 보내? 며칠 후면 현대서서학회 학술대회 열리잖아. 시간 괜찮으면 참가해 달라고 메일 보냈지.”

“캬! 세계적인 석학께서 직접 영업을 뛰시는 건가!”

민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하지만 메일의 파급효과는 엄청날 것이다. 비록 이름 없는 학회긴 해도 민우와 잠깐이라도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찾아오려는 학자들은 널렸으니까.

게다가 민우는 국문학만 파지 않았다. 비교문학은 물론 역사와 철학 등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인문학을 다루었으므로, 초대할 수 있는 대상이 많았다.

방금 메일이 53번째 메일이었으니, 그중 절반만 오더라도 학회는 훨씬 활기를 띨 거다.

“랑느 박사님도 오셨으니 불문학과 쪽 학회에서도 손님들이 꽤 온다고 들었어. 빡센 하루가 될지도.”

“민재가 고생하겠네.”

“그래도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참석하는 것과 직접 준비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니까.”

한진섭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학회 준비라면 민우와 함께 밥 먹듯이 해 왔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할 생각이야? 총장이 한발 앞서 나가고 있는데. 대책 없냐?”

“있지.”

“그니까 그게 뭐냐고.”

문득 민우가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그러더니 미소를 짓는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대책을 말해달랬는데 누가 온다는 얘기가 왜 나와?”

“그게 대책이거든.”

바로 그때 노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어?”

벙찐 얼굴로 입을 벌린 한진섭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한진섭도 익히 아는 인물이었다. 민우는 일어나 손님을 맞았다.

「오랜만이다. 자얀.」

「못 본 사이에 잘 지낸 모양이네. 턱이 두 개가 되어가고 있어!」

환하게 웃은 자얀이 성큼성큼 걸어와 민우와 포옹했다. 그는 이슬람 복식 대신 근사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턱만 두 개가 아니야. 뱃살도 접히고 있다. 나이 드니까 어쩔 수 없더라고. 너도 조심해야 할걸?」

「걱정하지 마. 사막 횡단하면 살 쭉 빠져. 한번 해볼래?」

「생각만 해도 칼로리가 소모되는 느낌이네.」

「하하하하.」

이번엔 한진섭과도 인사를 나눴다. 어차피 말이 잘 통하지 않아서, 한진섭은 자리를 비켜주겠다고 말하곤 연구실을 나섰다.

그제야 민우와 자얀은 독대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편히 소파에 몸을 기댔다.

「어디에 있다 온 거야?」

「일본에. 좀 비즈니스가 있었거든. 그래서 네 전화 받고 금방 올 수 있었던 거다. 하루라도 연락이 늦었다면 바로 오기 힘들었을 거야.」

「고맙다.」

「고맙긴. 친구가 부르면 얼른 달려와야지.」

정말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중동의 석유 재벌이라서가 아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와 이런 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친구라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자주 볼 순 없지만, 민우와 자얀은 주기적으로 안부를 전하며 우정을 쌓고 있었다.

요즘은 둘 다 ‘다이아몬드 소사이어티’에 나가지 못해 실제로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버님은 잘 계시지?」

「잘 계시지. 안 그래도 너 한번 보고 싶다고 하셔서 약속 잡아달라고 하시더라. 전용기 보내주신다니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국빈 대접 나쁘지 않았지?」

아무래도 사는 세계가 다르다 보니, 자얀은 어느 포인트에서 부담을 느끼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요즘 일이 많아서 좀 쉽지 않은데, 일단 내가 한번 연락드릴게.」

「그래. 안부는 이쯤 하고…… 이야기는 하지은 씨에게 대충 들었다. 요즘 재미있는 사업 한다며? 휴머니티였던가.」

「이번에는 아쉽게도 내가 주도하는 사업은 아니야. 연주가 기획한 일이지.」

민우는 연주에게 공을 돌렸지만, 자얀은 쿨한 미소와 함께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연주 씨만 아니라 다른 친구분들도 마찬가지로 협력했겠지. 아까 여기 있었던…… 진섭 씨였나? 그분도 그럴 거고. 협력이 가능했던 건 바로 민우 너의 저력 때문이야. 너에겐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

「오랜만에 보는 것도 좋긴 하네. 이렇게 금칠도 해 주고 말이지.」

「하하하! 그러게 말이다. 그래도 아쉽더군.」

「뭐가?」

「휴머니티에 조금 투자하려고 했는데 연주 씨가 거절했거든.」

「그런 일이 있었어?」

민우는 들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정연주가 왜 거절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자얀 입장에서 ‘조금’이라는 건 수백, 혹은 수천억에 달하는 거금일 거고, 그 자금을 소화하기는 쉽지 않았을 거다. 무엇보다도 당분간은 국내 후원처만 찾기로 했으니까.

「연주 씨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했어. 괜히 너한테 부담 주기는 싫어서.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인데 그런 걱정까지 하게 하면 곤란하지 않겠어?」

「어쩐지. 뭐, 마음은 고맙게 받으마.」

「언제라도 마음이 바뀌면 이야기하라고. 총알은 늘 준비되어 있으니.」

그렇게 말하며 자얀은 새하얀 치아를 보이며 웃었다.

가끔은 저런 자신감이 부러울 때가 있다.

「그렇다면 나를 부른 건 휴머니티 때문은 아닌 거 같고…… 우리 프로페서께서 또 무슨 재미있는 일을 꾸미고 계신 거지?」

「내가 대학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좀 일찍 할 수 있게 됐어. 그래서 좀 도움을 청할까 싶어서.」

「오, 드디어 내가 나설 타이밍인가. 어떤 건데?」

「대학 개혁.」

민우의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자얀의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

「그럼 대학을 내가 통째로 인수하면 되는 건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나와서 민우는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자얀에게는 불가능이란 없다.

「그런 건 아니고. 자발적인 개혁이야.」

「개혁이라…… 내가 아는 프로페서는 혁명가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아직은 아니지.」

「아직은?」

민우는 잠시 말을 끊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대학이라는 조직에 속한 사람들의 목표는 단순해. 대학을 세계적인 명문으로 만드는 거야. 명문의 기준은 다양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획일화되어 있어.」

「성과에 집착하는 편이지?」

「맞아. 그래서 매년 발표되는 대학 순위나 여러 지표에 집착하고 있고, 그걸 기준으로 운영 방침이 결정되곤 해.」

「알고 있어. 그래서 논문 게재 같은 연구 성과에 다들 목메는 거 아닌가. 그건 우리 쪽도 사정이 비슷하지.」

「난 좀 생각이 달라.」

「어떻게?」

「‘명문’이라는 진짜 의미에 집중해야지. 우리 대학을 세계적인 명문이 아니라, 누구나 자유롭고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대학으로 만들고 싶어.」

「대학 본연의 기능에 집중하겠다…… 이건가.」

「맞아.」

「하긴, 전통 있는 명문들은 다 그런 기조가 있지.」

다리를 꼰 자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민우에게 슬쩍 물었다.

「앞서 내가 한 질문에는 아직은 아니라고 했는데, 어떻게 하려는 속셈이야?」

「지금 내가 나선다고 해도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겪다가 실패할 거야. 공부만 할 줄 아니까.」

「너무 자학하는 거 아닌가?」

민우는 단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도와드리려는 분이 있어. 서지훈 교수님이라고, 내 지도교수님. 너도 알지?」

「알다마다! 예전에 그분과 학회에서 토론하지 않았었나? 사제대결이라 흥미로웠었지.」

서지훈 교수와 학회에서의 결전을 앞두고, 그 소식을 들은 자얀이 아랍에미리트의 속담이라며 소개해 준 말이 있었다.

‘모래폭풍이 지나간 밤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청명하다.’

돌이켜 보면 그 말이 맞았다. 서지훈 교수가 토론자로 나선 덕에 민우는 한 발 더 내디딜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지금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번 모래폭풍이 지나간다면, 명인대 위로 뜬 밤하늘은 총명하게 빛나지 않을까?

민우가 말했다.

「그분을 명인대 총장 후보로 올릴 거야. 몇 달 뒤에 총장 선거가 있거든.」

「아아.」

이제야 이해된다는 듯 자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속한 가문에서도 권력 다툼은 흔하다. 그래서 지금 민우가 어떻게 움직이려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지도교수님을 왕좌에 올리고, 그다음엔 네가 그 자리에 앉겠다는 계획인 것 같은데.」

「일단은.」

「네가 교수가 아닌 대학 총수인 모습은 잘 상상되지 않지만…… 그것도 나름 잘 어울릴 거 같은데? 하하하.」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은 자얀이 두 손을 깍지낀 채 상체를 슬쩍 내밀었다. 그리고 민우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 주면 되는데?」

「간단해. 서로 있는 걸 교환하면 되는 거지.」

「교환?」

「예전에 얼핏 들었어. 아랍에미리트 쪽에서 이공계 육성사업을 일으키고 있다고.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하잖아?」

「아아, 그러니까…… 자본과 기술을 교환하자는 건가.」

「그렇지.」

「그런데 그게 어떻게 총장 선거와 연관이 된다는 거지?」

민우는 명인대 이공계 교수들의 표가 필요한 상황을 짧게 설명했다. 즉, 연구사업을 지원하여 표심을 얻겠다는 계획이었다.

모든 설명을 들은 자얀이 미소를 지었다.

「간단하면서도 쉬운 일이군.」

「이공계 교수들과의 미팅은 내가 주선해 볼게. 대신, 자얀 너는 내가 아니라 서지훈 교수님과의 인연을 강조해 줘야 해.」

「이해했다.」

자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이제 내 지도교수께 인사드리러 가야겠군.」

「지도교수?」

「서지훈 교수.」

역시 행동력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 민우는 자얀을 데리고 서지훈 교수의 연구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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