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트키 (2)
느지막이 일어난 민우는 윤아를 깨워 화장실로 데려갔다. 오늘은 이수빈 대신 딸을 유치원으로 데려가야 하는 날이다.
칫솔에 치약을 적당히 짜 주고, 윤아에게 건넸다. 이제 윤아는 혼자서도 양치질을 곧잘 한다.
윤아는 특히 민우를 따라 하려는 습관이 강했다.
그래서 양치질뿐만 아니라 기타 다양한 생활 습관을 쉽게 가르칠 수 있었다. 그냥 옆에서 반복적으로 하면 알아서 따라 했으니까.
“치카치카하고 세수하자.”
“우웅. 아빠도 해?”
“아빠도 해야지.”
윤아가 작은 손으로 열심히 칫솔질을 시작했다. 민우도 칫솔을 준비해, 나란히 서서 거울을 보며 양치질을 시작했다.
아직 윤아가 세면대를 사용하기는 조금 작아서, 민우는 미리 곰 캐릭터가 그려진 컵에 물을 받아 주었다.
곧 양치가 끝나고 세수를 시작한다.
언제까지 이렇게 같이 양치와 세수를 할 수 있을까. 요즘 애들은 사춘기가 빨리 온다던데. 그런 걱정과 기대를 하면서, 민우는 윤아를 지켜보았다.
“아빠.”
“응?”
“왜 소윤 언니는 놀러 안 와?”
전에 <프로페서> 드라마 촬영이 확정되고, 허윤과 같이 식사를 했던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요즘 이소윤은 상당히 바쁘다고 들었다.
그래도 청강은 빠짐없이 하고 있다. 수업이 끝나고 복도를 함께 걷는 그 몇 분간이 이야기를 나누는 전부였다.
“소윤 언니 요즘 바빠서 못 와.”
“보고 싶은데.”
“이따 엄마 오면 영상통화 시켜달라고 할까?”
“웅!”
그제야 만족한 듯, 윤아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침 세수도 끝났다. 민우는 윤아를 마저 깨끗하게 씻겨준 다음, 옷을 갈아입혔다. 그리고 바로 유치원으로 향했다.
손을 잡고 걷는 중, 윤아가 말했다.
“나 나중에 소윤 언니처럼 될 거야.”
“언니처럼?”
“의사 선생님 될 거야.”
민우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핏줄이다. 어떤 목표가 생겼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윤아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학습 속도가 무척 빠르다.
문해력은 물론이고 산술능력도 탁월하다. 천재까지는 아니더라도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큰 호기심을 보인다.
민우도 그렇고 이수빈도 문제 해결 능력보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호기심과 끈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공부는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이 잘하는 거니까.
그런 점에 있어서 딸인 윤아는 이대로 계속 잘 자라준다면 의대에 들어가는 것도 꿈은 아니었다.
물론 커봐야 아는 거지만.
요즘 아이들의 장래희망이 아이돌이나 BJ가 대세라고 하니 어떻게 바뀔지는 모른다.
“전에는 아빠처럼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웅…… 근데 언니가 더 멋있어!”
“아빠가 언니한테 진 거구나.”
“아니야. 아빠도 멋있어! 하지만 언니가 더 멋있어.”
뭔가 두 번 맞는 것 같은 느낌인데. 그래도 민우는 즐거웠다.
애들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두어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이소윤이 윤아에게 끼친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쩐지 요즘 의사 선생님이 나오는 동화책을 읽고 싶다고 조를 때 의아하긴 했었다.
“의사 선생님이 되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 해.”
“얼만큼?”
“티비도 못 보고 잠도 많이 못 자.”
“우웅…… 티비…… 그건 싫은데.”
윤아는 고민했다. 애들이 고민할 때 옆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는 건 좋지 않다. 스스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힘을 길러줘야지.
“그래도 할래!”
윤아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거짓말이 아니다. 진짜 하고 싶은 거다.
“열심히 하면 의사 선생님 될 수 있을 거야. 나중에 소윤 언니 오면 한번 물어볼래? 어떻게 하면 의사 선생님이 될 수 있는지.”
“웅!”
힘차게 대답한 윤아.
어느새 두 부녀는 유치원에 도착했다. 딸애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민우는 출근하기 위해 지하철에 올랐다.
그런데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차민재였다.
‘민재가 이 시간에 전화할 일이 없을 텐데…….’
뭔가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민우는 즉시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 선생님. 차민재입니다. 잠시 통화 괜찮으세요?
목소리가 다소 상기되어 있다. 무슨 일이 생기긴 한 모양이다.
민우는 차분히 대답했다.
“응. 괜찮아. 무슨 일 났냐?”
― 지금 명인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홈페이지? 무슨 일인데?”
― 백성웅 총장님 이름으로 공지가 올라왔어요. 총장 선거권 관련해서요. 이야기가 좀 긴데, 요약하면 학생들에게 선거권을 주는 방향으로 일을 추진해 보겠다네요.
“뭐?”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지하철이 멈추고 사람들이 오르내렸다. 민우는 그때까지도 말을 잇지 못했다.
문이 닫히고 지하철이 다시 움직일 즈음에야 민우가 정신을 차렸다.
“알았다. 한번 확인해 볼게. 지금 연구실 나가는 길이니 자세한 이야기는 가서 하자.”
― 예, 선생님. 이따 뵙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민우는 즉시 명인대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PC버전 화면으로 보니 팝업이 하나 떴다. 그리고 장문의 공지가 올라와 있었다.
민우의 눈이 바쁘게 행간을 움직였다.
마지막 백성웅 총장의 친필 사인이 들어간 곳까지 모두 읽은 그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선빵을 쳤구나.’
내용은 간단했다.
지금은 민주사회다. 명인대의 세계화를 위해 총장 선거도 투명하게 치러야 한다. 그래서 관련 규정을 개정하도록 최선을 다해보겠다.
설마 총장이 먼저 선거권을 학생들에게 주는 방향으로 노력하겠다는 말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할 줄은 몰랐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후보 선출권을 가지게 되면 자신에게 불리해지니까.
아니,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좀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바로 움직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마디로 보기 좋게 당한 것이다.
‘하……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했어. 출근하자마자 서지훈 선생님 좀 뵈어야겠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민우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또 다른 계획을 세워나갔다.
***
민우가 연구실로 들어오자, 서지훈 교수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민우도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너도 소식을 들은 모양인데.”
표정은 서지훈 교수도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가 담배를 계속 피웠다면 안주머니를 뒤적였을 것이다.
“오늘 출근하는 길에 민재가 알려주더라고요. 홈페이지에 공지 올라왔다고. 그래서 확인했습니다.”
“그랬군. 놀랐겠네?”
“예. 아직도 뒤통수가 얼얼하네요. 이번에는 제대로 당한 것 같습니다.”
“음.”
서지훈 교수는 침음을 흘렸다. 그의 시선이 책장 쪽으로 향했다. 뭔가 생각이 복잡해 보였다.
민우가 물었다.
“교수협의회 쪽과 사전에 이야기가 된 겁니까?”
“아니. 내가 알기로 어떤 곳과도 협의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총장의 독단인 거야.”
“이사회에서 가만히 있을까요? 아무리 좋은 일이라지만 과정과 절차라는 게 분명히 있는데요.”
서지훈 교수가 빙긋 웃었다.
“당연히 이사장에게는 보고했겠지. 백성웅 총장은 혁명가 스타일이 아니야. 권력에 야합하는 뻔한 무리 중 하나지. 그런 부류의 사람은 아랫사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오로지 윗사람의 의견만 귀담아듣지.”
“그렇다면…….”
“이미 이사회에서는 총장 선거를 직선제로 바꾸는 것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을지도 몰라. 백 총장은 그럴듯한 명분을 갖다 붙여 이사장을 설득했고, 홈페이지에 공지를 올린 거겠지.”
서지훈 교수가 명쾌하게 정리했다.
민우는 입을 다물었다.
서지훈 교수를 총장 후보로 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가 신기루처럼 사라지려고 하고 있었다.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싸움이 힘들어지고 있네요.”
“처음부터 쉬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하지만 어떻게 보면…… 불행 중 다행인 일이 아닐까요?”
서지훈 교수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민우를 바라보았다. 뭔가를 깨달은 민우의 표정은 들어올 때보다 훨씬 밝아져 있었다.
“어쨌든 학생들이 투표권을 가지게 된다는 점에서 목표를 하나 이룬 거잖아요. 제 목표는 두 가지였거든요. 선생님을 총장으로 만드는 것과 동시에 학생들이 직접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거.”
“전자는 불투명해졌지만 후자는 가능성이 충분해졌다 이거냐?”
“예. 총장이 그렇게 공언했다면 이사회에서 직선제 안건이 가결되는 것도 시간문제 아닐까요?”
“하하하! 참 너다운 발상이다.”
서지훈 교수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민우의 말처럼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어쨌든 직선제가 들어설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된 거니까.
“그럼 투표권에 대한 이야기는 제쳐두고, 이제는 어떻게 선거전략을 바꿀지 생각해 봐야겠어.”
“학생들이 투표권을 가져간다고 가정하고 계획을 세워야겠네요.”
“그렇지.”
서지훈 교수가 팔짱을 꼈다. 그는 민우를 바라보며 어떤 기발한 계획이 나올지 기다렸다.
“다른 학교 상황을 보면…… 학생들이 투표한다고 해도 실제로 반영 비율이 그렇게 높진 않더라고요. 학생 대표자들이 선거를 하는 형태라서요. 아마 우리 학교도 처음엔 그렇게 될 거라고 봅니다. 그러다 점차 확대되겠죠.”
“아무래도 보수적인 곳이니까. 게다가 재학생이 만 명이 넘는데 한 명당 표를 하나씩 인정해 주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렵잖아?”
고개를 끄덕인 민우가 계속 설명했다.
“표밭을 분석해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교직원, 교수, 그리고 학생. 이렇게요.”
“음, 그렇지.”
“교직원 표는 고정표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재단 쪽에서 미는 후보를 찍을 가능성이 높죠. 학생들은 후보자가 내세우는 공약에 따라 움직일 거고, 결국 가장 큰 변수를 만들어내는 건 교수들일 겁니다. 철저히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테니까요.”
서지훈 교수가 동의했다. 실제로 가장 투표권을 많이 가진 집단이 바로 교수이기도 했다.
“그럼 결론이 나온 건가.”
“예. 제 생각에는 교수들을 공략해야 한다고 봅니다.”
“내 생각과 같은 결론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두 사제가 서로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명확한 계획을 떠올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하지만 분명한 원칙이 하나 있었다.
“특히 이공계 교수들의 표를 공략해야 합니다. 선생님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하죠. 인문대 교수라는 것.”
“같은 결론이군!”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백성웅 총장이 명인대 이공계를 키우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때문에 이공계 교수들의 표심은 모두 백성웅 총장 쪽으로 향해 있었다. 어쨌든 굵직한 사업들을 따는 데 도움을 주니까.
그런 입장에서 서지훈 교수의 출신은 마이너스가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민우도, 서지훈 교수도 그 연결고리가 약하다는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들은 총장에게 충성하는 게 아니라 단지 이익을 보고 움직이는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표심을 공략하지? 너도 알다시피 나는 연줄도 없는 국문과 교수일 뿐인데.”
“방법이 없는 건 아니죠. 연구비가 많이 필요하다면, 그만큼 끌어다 주면 간단한 거잖아요?”
“너 설마…….”
서지훈 교수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민우가 씨익 웃었다.
“선생님께서 허락만 해 주시면 제가 한번 전면에 나서 보겠습니다. 부담 갖진 마세요. 그 친구라면 제가 하려는 일에 힘을 실어줄 겁니다.”
“그 친구라…… 하하하. 재미있겠어. 좋아! 한번 해 보자. 총장 후보 등록 서류를 보냈으니 이젠 뭐가 되든 움직여야 해.”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잘 부탁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연구실을 나선 민우는 바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