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트키 (1)
다음 날, 예고했던 대로 명인대 학보에 총장 선거와 관련된 기사가 메인으로 실렸다.
주된 논조는 국내의 추세에 맞게 총장 선거에 학생들도 표를 행사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민우의 제자인 차민재는 온라인판 기사가 올라오자마자 링크를 따서 명인대 학생 전용 커뮤니티에 올렸다.
실시간으로 댓글이 달리며 추천수를 확보해, 곧 일간 인기게시물로 올라갔다.
상단에 올라간 이후에는 댓글이 기하급수적으로 달렸다.
└ 익명: 대통령도 뽑는데 총장을 못 뽑는다는 건 코미디이긴 함
└ 익명: 근데 총장을 우리가 뽑는다고 대학이 뭐 달라지기라도 하냐? ㅋㅋ 학자금대출로 등골 휘는 건 똑같을 텐데 시간낭비
└ 익명: 니가 그런 생각을 하니까 학자금 대출이나 받는 거임 장학금 못 받음? 하긴 그 머가리로 ㅠ
└ 익명: 이러니 우리 학교가 아이비리그에 못 비비는 거지 세계 초일류대학은 자정능력이 있음 적어도 직선제로 뽑고 공약이 잘 실현되는지 지켜보는 것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 익명: 아이비리긐ㅋㅋㅋㅋㅋㅋ 개오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디서 은근슬쩍 비비려고 해?
└ 익명: 너 이 새끼 아이디 빌렸냐? 지잡이지?
└ 익명: 명인대가 지잡?ㅋ 팩폭 얼얼하쥬?ㅋ
└ 익명: 한일대 스파이인 듯?
└ 익명: ㄹㅇ
하루가 지나고 나자 댓글이 500개가 넘었다. 온통 난장판이었지만, 전체적인 기조는 ‘투표권이 있어야 한다’로 좁혀지고 있었다.
점점 총장 직선제에 대한 이야기가 피어오르자, 사전에 협의하고 있던 단체들도 힘을 모았다.
공개 토론회를 열어 이쪽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하게 된 것.
이어 학부 총학생회와 대학원 총학생회가 나서 투표권 확보를 위한 학생 운동을 시작했다.
민우는 창밖을 응시했다.
큰 길가에 천막이 쳐 있다. 그리고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서명을 받는 학생회 집행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서명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생각보다 반응이 빠르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야.”
민우가 중얼거렸다.
뒤에는 차민재가 앉아 있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커뮤니티 반응이 엄청나더라고요. 이젠 주간 베스트까지 올라갔으니 아마 한 달 이상은 뜨거울 겁니다.”
“토론회 반응은 어때?”
“처음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이제는 제법 있어요.”
“다행이네.”
창문을 닫은 민우가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차민재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이어갔다.
“선생님 학부 때는 어땠어요? 그때는 시위도 많이 하고 그랬다던데요.”
“그 정도는 아니었어. 나 땐 시위 같은 거 거의 하지 않았거든. 90년대 후반쯤 내 위 학번 선배들이 많이 그랬지. 단과대별로 인원 동원해서 조직적으로 시위하고 그랬다나 봐. 총장실 점거해서 라면 끓여 먹고 난리도 아니었지.”
민우와 차민재는 공통적인 경험을 하나 공유하고 있었다. 바로 상아대에서 학부 생활을 했다는 것.
그래서 차민재는 민우의 말에 깊게 공감할 수 있었다.
“이야. 총장실 점거는 엄청난데요? 저 때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네요.”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 뭐, 이제는 투쟁하는 방식이 조금 바뀌었으니까. 좀 더 영리하게 되었다고 할까…… 그때는 스마트폰 같은 것도 없었고.”
“요즘은 뭐만 하면 동영상 찍어서 인터넷으로 올리니 다들 조심하는 게 있어요.”
“굳이 현장에 나가지 않아도 인터넷으로 모두 할 수 있으니까.”
민우는 웃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그런데 마주 보고 있던 차민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선생님. 괜찮으신 거죠?”
“뭐가?”
“학보사에서 내보낸 기사가 좀 문제였다고 생각하거든요. 너무 노골적으로 선생님 말씀을 실은 것 같아서. 약간 간접적으로 내용을 전달해도 됐을 텐데요.”
민우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다. 그거 내가 그렇게 하라고 한 거야.”
“아, 정말요?”
“기왕 총대 메려면 제대로 메야지. 쓸데없는 데서 전공 살릴 필요가 있나?”
그 말에 차민재는 웃긴 했으나,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걱정됐다. 이 문제는 단순히 총장 선거만이 아니라 교내의 악습과 정면으로 대항하려는 거였으니까.
그리고 그 끝엔 재단 이사회가 있다.
이곳은 국립대가 아니라 사립대다. 사립대에서 재단 이사회가 갖는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는 차민재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런 것치고는 본부가 조용하긴 해. 학생들이 이 정도로 반응하고 있다면 뭔가 액션이 있어야 할 텐데.”
민우는 총장실과 그의 수족인 교육개발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호출이 온다거나 그런 것은 없었다.
“총장님 엄청 열받으셨겠네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지훈 교수님이 출마하신다니…… 게다가 선생님께서도 도와주고 계시고.”
“글쎄. 어떨지는 지켜봐야겠지.”
“잘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간단히 대꾸한 민우는 커피향을 음미하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시각, 총장의 호출을 받은 김명현은 총장실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
“부르셨습니까.”
김명현이 총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안에는 불이 꺼져 있었고, 가운데 위치한 테이블엔 향초가 켜져 있었다. 은은한 향이 총장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다.
총장은 중역용 책상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김명현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왔나?”
“예. 총장님.”
평소라면 자리에 앉으라는 말을 했을 텐데, 오늘은 아무런 말도 없다.
백성웅 총장의 표정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없어서 무엇을 읽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김명현은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터졌다.
그리고 오늘은 조심해야 한다고.
마침 백성웅 총장에게 들뜬 마음으로 보고하고 싶은 일이 있긴 했다.
명인대 인문학 프로그램 일이었다.
초반에 등록 취소가 빈번했지만 이제는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평가도 좋은 편이라 다음 학기 모집 문의가 쇄도하는 중이다.
총장에게 공적을 어필할 절호의 찬스.
‘하지만 오늘은 입을 다무는 게 좋겠어.’
그렇게 다짐한 김명현은 조심스레 총장에게 다가갔다. 책상 옆에 서서 백성웅 총장의 말을 기다렸다.
“요즘 학교 안이 시끄러운 건 자네도 알고 있겠지?”
“예. 총장 선거권 때문에 말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성웅 총장의 표정이 묘해졌다. 웃는 건지 찡그린 건지 알기 힘들 정도로.
“서지훈 교수가 총장 선거에 입후보했다고 방금 연락을 받았네. 재단 사무국에서.”
“그건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 아닙니까?”
“그 과정에서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지.”
피식 웃은 백성웅 총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뒷짐을 지며, 어두운 그림자가 깔린 총장실 내부를 걷기 시작했다.
“청록회라고 알고 있나?”
“금시초문입니다.”
“서지훈 교수 주도로 만든 조직일세. 서지훈 교수를 포함해서 뜻을 함께하는 교수들이 열 명이나 있다더군.”
“명인대 교수회에 비하면 새 발의 피군요. 그런 조직 따위는 신경 쓸 것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 청록회 회원수가 11명이 됐지. 한 명이 늘어난 거야.”
뜬금없는 말에 김명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일순간 불안감과 함께 혹시나 하는 생각이 밀려들어 왔다. 한 명, 서지훈 교수가 만든 그 모임에 들어온 사람이 한 명이라면.
“설마.”
“박민우 교수가 최근에 청록회에 가입했다고 하더군.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말이지. 청록회가 이번 총장 선거 캠프가 됐다는 거야. 거기에 박민우 교수가 들어갔고. 이제 무슨 일인지 이해가 가나?”
“그렇군요. 그래서…….”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서지훈 교수의 총장 선거 출마는 뜻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민우가 가세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민우는 예전부터 매스컴을 통해 대학 개혁과 학계 개편에 대한 이야기를 입버릇처럼 해왔다.
그 상황에서 민우가 총장 선거에 개입했다는 것은 그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총장 쪽 입장에서는 천적이 나타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학보에 그런 인터뷰가 실린 거군요. 투표권 이야기를 해서 조금 의외다 싶었는데 말이죠.”
“자네의 말이 맞았어. 조심해야 하는 건 서지훈 교수가 아니야. 바로 박민우 교수지.”
탄식이 흘러나왔다.
서지훈 교수라면 모를까, 뒤에 민우가 있다면 힘든 싸움이 될 거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이미 박 교수에게 미움을 사 버린 상황이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감도 안 와.”
조금 후회가 되기도 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휴머니티 건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을 거다.
그렇다면 민우가 이렇게 빨리 총장 선거에 개입하지 않았겠지.
반면 김명현의 태도는 너무나도 평온했다.
그에겐 계획이 있었다.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이번 선거에서 이기는 수밖에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박민우 교수라면 이사회 쪽과도 접촉할 거야. 듣기로는 이번 총동문회 행사에도 참석한다고 하더군.”
“대충 그림이 그려지는군요. 아마 이사회와 접촉해서 투표권을 학생들에게도 줘야 한다고 이야기하겠죠. 하지만 이제 논의한다고 해서 투표권이 바로 주어지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애꿎게도 백성웅 총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작년부터 이사회에서도 이야기가 되고 있었다고 해. 이사회가 소집되고 안건이 가결되는 건 금방이야. 그리고 아직 선거까지는 몇 개월의 시간이 남았고.”
“그렇다면…….”
실로 상상하지 못한 이야기가 김명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총장님께서 선수를 치십시오. 이사장님께 특별히 건의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직선제로 전환하는 것을.”
“뭐라고?”
김명현이 걷기 시작했다. 백성웅 총장이 서 있는 곳으로. 백성웅 총장은 여전히 한 대 맞은 것처럼 얼얼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대로라면 직선제로 전환되는 건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이미 이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다면 그쪽에서도 문제를 인지하고 있는 거고요. 거기다 학내 여론도 악화되고 있습니다. 서명 운동하고 있는 건 들으셨겠죠? 그건 아마 시작일 겁니다.”
“그렇지.”
“이 상황에서 박민우 교수가 이사장님과 독대해 교수직을 걸고 딜을 해버리면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설마 박 교수가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겁니다. 그는 교수가 아니라 선생이니까요.”
백성웅 총장이 그게 무슨 소리냐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김명현은 설명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 표심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총장님이 먼저 선공을 펼치는 것뿐입니다.”
“선공이라.”
길이 보이자 이제야 백성웅 총장이 냉정을 되찾았다.
“이제부터는 학생과 학교를 위한 총장이 되십시오. 학생들에게 투표권을 주고, 멋진 공약을 만들어서 민심을 사로잡으십시오. 그렇다면 누가 와도 이기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몇 가지 계획을 떠올린 백성웅 총장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김명현의 표정과 백성웅 총장의 표정은 놀랍도록 닮았다.
속세에 찌들어 있는 그런 시커먼 미소.
“가면을 쓰라는 겐가.”
“공약에는 이행률이라는 게 있습니다. 얼마나 이행됐는지 보는 거죠. 하지만 그게 총장님께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그렇고말고. 재임이 중요한 거니까.”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학생 운동이 시작되고 외부 매스컴에서 냄새를 맡으면 골치 아파집니다. 한발 앞서 움직이십시오.”
“재미있어지겠군. 이사회에서 논의된다고 하면 박민우 교수가 총동문회에서 발언권을 얻는다고 해도 뒷북이나 치는 꼴이 될 게야. 하하하하!”
백성웅 총장이 비열하게 웃었다. 이에 김명현은 두 손을 들어 전화가 놓인 자리를 공손히 가리켰다.
“서두르시지요.”
“그래. 바로 이사장님께 면담 요청하겠네.”
자리로 돌아온 백성웅 총장은 수화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