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록회 (2)
다들 술잔을 비우는 것을 시작으로 청록회 모임이 시작되었다. 분위기는 평소와 똑같았지만, 회원들의 기세는 평소와 전혀 달랐다.
“우리 모임이 설립된 지도 5년이 넘었는데, 이제야 뭔가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구만.”
기영탁 교수가 술잔을 채우며 그렇게 말했다.
서지훈 교수는 씨익 웃었다.
얼핏 보기에 권력욕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영탁 교수야말로 자연인에 가까운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학생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요즘 보기 드문 ‘선생’이기도 했다.
그래서 서지훈 교수는 청록회를 세울 때 가장 그를 먼저 섭외하려고 했었다.
과정은 순탄하진 않았지만, 삼고초려 끝에 그를 이 모임에 모실 수 있었다.
설예라 교수도 오랜 후배로서 큰 힘이 되었지만, 기영탁 교수야말로 청록회의 숨겨진 실세였다. 실제로 예술계 쪽에서 명망이 높으니.
“오래 기다리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아니지. 아니야! 내가 보기에 서 교수 자네도 어지간히 고집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이렇게 갑작스럽게 총장 선거에 나선다고 할 때 솔직히 말해 좀 놀랐어.”
“하하하. 그러셨습니까.”
“10년은 더 묵어야 할 줄 알았거든.”
감상을 밝힌 기영탁 교수가 술잔을 들이켰다. 이번에는 서지훈이 그에게 공손히 술잔을 채워주었다. 고맙다는 의미였다.
“시간이 너무 흘러가면, 나도 정년퇴임을 할 테고. 명예교수니 석좌교수니 남아있다고 해도 예전처럼은 힘을 실어줄 수 없으니 말이야.”
“사실 저도 교수님처럼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변수가 있었습니다.”
“으음? 어떤 변수인가?”
옆에 있던 다른 교수가 묻자, 서지훈 교수는 잠시 설예라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여 주자 그제야 말했다.
“실은 이번 총장 선거 출마 건은 제가 독단으로 결정한 게 아닙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인가?”
좌중이 술렁였다.
서지훈 교수는 그만한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여기에 큰 뜻을 품은 교수들이 이렇게나 모여 있었던 거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야? 자네를 움직이게 한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겐가?”
기영탁 교수가 은근히 묻자, 서지훈 교수가 솔직하게 말했다.
“박민우 선생이 출마를 추천했습니다.”
“뭐? 하하하하!”
기영탁 교수가 무릎을 탁 치며 소리높여 웃었다. 모든 교수들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혹시나 해서 긴장했던 사람들의 표정이 풀렸다.
“청출어람이니 뭐니 말이 많더만 이런 곳에서까지 존재감을 드러내는군. 박민우 교수, 확실히 난 사람은 난 사람이야. 자네 같은 고집불통을 한 번에 움직이게 하다니!”
“맞아요. 제가 매번 총장 선거에 나가보라고 옆에서 부추겨도 씨알도 안 먹혔는데 박 선생이 한마디 하니까 바로 움직이더라고요.”
설예라 교수도 한마디 거들었고, 서지훈 교수는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들의 의견을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박 선생처럼 교내 정치에 문외한 사람이 그런 제안을 하니 흘려들을 수가 없더군요.”
“하긴, 오히려 그런 맑고 깨끗한 마음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이니까.”
기영탁 교수의 말에 일부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한 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교수다.
어떤 현상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데 이골이 난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그때 다른 교수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하지만 박민우 교수가 직접 나서도 되는 일인데. 서지훈 교수님께 그렇게 제안한 게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하네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음, 불쾌하게 듣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천만에요. 괜찮습니다.”
서지훈 교수가 표정을 부드럽게 바꾸었고, 질문한 교수가 다시 말을 이었다.
“스타성을 따져봤을 때 아무래도 박민우 교수가 나서는 게 더 확률이 높으니까요. 그런데 지도교수라는 이유로 서지훈 교수님을 추천했다는 게 좀…….”
“마음에 걸리신다는 말씀입니까?”
“예에. 뭐, 정치권이나 청와대에서도 콜이 자주 오는 분 아닙니까. 총장이 아니더라도 어디 장관 자리는 쉽게 얻을 수 있는 분인데 말이죠. 게다가 정치적인 스탠스가 아예 없던 분이 이런저런 일을 준비한다는 게 뭔가 좀 이상하기도 하고 말이죠.”
날카로운 질문이었지만 서지훈 교수는 가벼이 웃어넘겼다.
자신과 민우의 관계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서 설예라 교수뿐이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그 수많은 일을 어떻게 설명할까.
서지훈 교수가 명확히 선을 그었다.
“박 선생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의외지만 그렇게 쉽게 의리를 저버릴 사람은 아닙니다. 저는 박민우 선생이 학자로서 시작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누구보다도 곁에서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니까요. 이건 제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으음, 그렇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박민우 선생에겐 한 가지 분명한 신념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원칙을 지킨다면 한없이 든든한 아군이 된다는 거죠.”
몇몇 교수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팔짱을 낀 기영탁 교수도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무서운 적이 되는 겁니다. 백성웅 총장은 그러지 못했지요. 그래서 이렇게 코너에 몰리게 된 거고요.”
잠시 말을 끊은 서지훈 교수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교수들을 진정시키려는 듯이.
“그러니 우리 청록회의 존재 이유가 흐려지지만 않는다면,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아군이 될 겁니다.”
“우리만 잘하면 된다는 말을 그렇게 길게 할 필요는 없네!”
기영탁 교수의 농담에 다른 교수들의 표정이 풀렸다.
그때였다.
문에서 노크가 들리고,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놀란 몇몇 교수들이 자리에서 일어날 정도로.
“늦어서 죄송합니다!”
바로 민우였다.
차분히 앉아 있던 서지훈 교수와 설예라 교수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영탁 교수가 친히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그 스승의 그 제자구만. 지각하는 버릇도 물려받았군.”
“서지훈 선생님도 지각하신 모양이네요. 제가 더 죄송합니다. 잘 보필했어야 하는 건데.”
“하하하. 사람 참. 어서 앉으시게!”
민우는 비어 있는 말석에 앉았다.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화려한 커리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민우는 말석에 앉은 것만으로도 가슴이 격동함을 느꼈다.
대학을, 그리고 학계를 바꿀 첫 단추를 이곳에서 끼게 되는 거니까.
“오늘 못 온다고 하지 않았어?”
서지훈 교수가 물었다.
“마음에 좀 걸렸어요. 중요한 이야기가 오가는데 제가 빠지는 것도 좀 죄송스럽고. 어쨌든 사고를 친 건 저잖아요?”
민우가 겸손히 말했다.
내가 이번 일을 주도했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을 크게 벌인 것에 대해 죄송하다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었다.
젊고 당차지만 굽힐 땐 굽힐 줄 아는 겸손한 사람.
그 사소한 화법이 교수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기영탁 교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앞으로도 잘 부탁함세.”
“제가 감히 이 모임에 껴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다른 교수님들도 잘 부탁드립니다.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하하하. 누가 누굴 가르칩니까? 오히려 우리들이 배워야지.”
“오늘내일하는 늙은이들은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교수들의 너스레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기영탁 교수가 잔을 들었다.
“새로운 회원이 오셨는데 축배를 들어야지. 자자, 다들 건배하세.”
모두 잔을 채우고 잔을 들었다. 민우도 마찬가지였다.
“박민우 교수의 가입을 환영하며, 건배!”
“건배!”
잔이 부딪쳤다.
오늘따라 술이 달콤함을 느끼며, 서지훈 교수가 민우를 바라보았다.
“박 선생. 여기 계신 분들이 궁금해하실 테니, 간단히 계획을 설명해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예.”
빈 술잔을 내려놓은 민우가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크게 두 가지 트랙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첫째는 학생의 주권을 되찾아주는 일이고, 둘째는 이사회를 공략하는 겁니다.”
“으음, 학생들 이야기는 대강 들었네. 총장 후보 투표권을 준다면서?”
“예.”
민우는 사소한 워딩에도 신경을 썼다. 다른 사람이라면 학생들을 움직인다고 했겠지만, 그는 학생들의 주권을 되찾겠다는 표현을 썼다.
이것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다. 혁명과도 같은 거다. 우리가 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것은 분명한 효과가 있었다.
교수들의 눈빛이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내일이 지나면 반응이 올 겁니다. 오늘 학보사에서 연락을 받았는데, 총장 선거 관련한 특별 기사를 발행하기로 결정됐다고 하더군요.”
“학보사에서? 거긴 어용 언론 아니던가?”
“최재석 주임교수가 승인했다고 합니다.”
“의외인데. 최재석이라면 교양학부 쪽 교수였지?”
“예. 요즘 대학본부와 교양학부 교수들 사이가 별로 안 좋거든요.”
“그렇군.”
하지만 교수들은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학보사와 메일로 기사가 전달된다고 해도, 그냥 읽고 넘어가면 그만이니까.
일간지 발행부수가 꾸준히 감소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그건 민우도 감안하고 있던 일이었다.
“우리 일을 도와주겠다고 나선 학생들이 몇 있습니다. 신문기사를 읽는 학생들은 몇 없을 테니까요. 학생 커뮤니티를 공략해야 합니다.”
“음, 요즘 에타인지 뭔지가 유행이라고 하던데.”
“명인대 자체 커뮤니티가 더 큽니다. 프리미엄도 있고요. 그래서 양쪽 모두 공략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학생 전용 커뮤니티에 우리가 접근하기는 어렵죠. 저와 뜻을 같이하는 학생이 학보사에서 기사를 발행하면 커뮤니티에 올려 공론화를 시킬 겁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차민재였다.
명인대 재학생 신분을 얻었기 때문에 학생 전용 커뮤니티에 접속할 권한이 있다.
무엇보다도 차민재는 민우와 연구실을 함께 쓰며, 지금까지 있었던 일련의 사건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남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나서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민우는 차민재가 협력하겠다는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자신의 미래는 자신이 준비해야만 그 가치가 빛나는 법이니까.
기영탁 교수가 턱을 쓸어만지며 말했다.
“확실히 뭔가 풀리긴 하겠군. 안 그래도 이사회에서는 요즘 언론 반응에 민감하긴 하니까.”
“다행스럽게도 요즘 총장 직선제를 도입하는 대학이 많이 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버티기는 어려울 겁니다.”
민우의 설명에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서지훈 교수가 물었다.
“그럼 두 번째 계획은? 이사회를 공략한다고 했는데.”
“곧 열릴 명인대 총동문회에 참석할 생각입니다. 이사장님과 이사진들도 참석한다고 하니, 발언권을 얻어 무대에 좀 올라가 보려고요.”
올라가서 어떤 이야기를 할 건지는 묻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었다. 서지훈 교수가 재차 물었다.
“동문회 사무국에서 허락해 줄까?”
“한번 해봐야죠. 총동문회는 처음 참석하는 건데 그쪽에서도 좀 신경 써주지 않을까요? 정 안 되면 이사장님과 독대할 생각입니다.”
“자리를 걸겠다는 이야기군.”
서지훈 교수의 말에 민우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는 교수직에 조금의 미련도 없었다.
오라는 곳도 많았고, 명인대 이사회에서는 민우를 뺏기고 싶지 않아 했다. 이 상황이 누구에게 유리한지는 뻔히 답이 나와 있는 상황.
민우가 말했다.
“제자들의 생계가 걸린 일입니다. 어쩌면 우리 학계의 미래가 걸린 일일지도 모르죠. 그런데도 제가 자리를 지키기 위해 급급한다면 좀 우습지 않을까요?”
민우의 표정엔 여유가 넘쳤다. 곧 그가 말을 이었다.
“전 최선을 다할 겁니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