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57화 (357/500)

청록회 (1)

교양학부 최재석 교수가 학보사 사무실에 나타난 것은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그는 얼마 전 민우의 인터뷰를 허가한 사람이기도 했다.

또한 교양학부장인 원순철과는 동문으로 끈끈한 유대감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원순철 학장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늘은 학보 발행 전 기사를 체크하고, 보충할 부분이 없는지 기자들과 회의를 해야 했기 때문에 사무실에 나온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음, 그래.”

최재석 교수가 학생들의 인사를 받으며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회의라기보다는 기자들이 작성한 기사를 한번 훑어보고 그대로 내보내도 될지, 아니면 수정을 해야 하는지 확인하는 단계다.

명인대 학보사에서 활동하게 되면 장학금 혜택이 있기 때문에 주임교수가 그 활동 여부를 꼼꼼히 체크해야 했다.

문제가 생기면 책임자인 주임교수가 책임을 져야 하니까.

무엇보다도 학보사는 언론사다.

때문에 주임교수는 제대로 된 기사가 나가게 하는 것은 물론, 학생들이 한쪽으로 치우쳐 기사를 쓰지 않게끔 하는 컨트롤 타워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것이다.

컴퓨터 부팅이 끝나고, 잠시 책상을 정리한 최재석 교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자, 다들 마감한 기사 가지고 와라.”

“네.”

기사를 미리 인쇄해 둔 학생 기자들이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최재석 교수의 자리로 움직였다.

규모는 작아도 명인대 학보사는 명인대를 대표하는 언론사라고 할 수 있다. 누구도 쉽게 생각하지 않았다. 앞으로 할 기자 생활의 초석이 될 테니까.

검토를 받으러 온 기자는 총 세 명이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학생이 최재석 교수에게 기사를 내밀었다.

“음…….”

안경을 쓴 최재석 교수가 기사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간혹 밑줄을 그어가면서.

밑줄이 그어질 때마다 검토를 요청한 학생의 이마에 식은땀이 하나씩 맺혀갔다.

검토를 끝낸 최재석 교수가 물었다.

“학생식당의 만족도를 조사한 기사인데, 기본적으로 불만족스럽다는 입장에서 쓴 기사겠지?”

“그렇습니다. 최근 학내 게시판에서도 퀄리티가 나쁘다는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올라오고 있어서요.”

“그런 것 치고는 볼륨이 많이 빈약해.”

“아.”

최재석 교수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빛났다. 손으로는 펜을 까딱거리며 부족한 부분을 사정없이 파헤쳤다.

“우리 학생식당은 외주로 운영되고 있어. 그렇다면 업체 측 이야기도 좀 들어봐야 하지 않나? 학생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건 좋지만, 이렇게 나가면 단순 비판밖에는 안 돼. 좀 더 깊게 파고 들어가서 약점을 잡으란 말이지.”

“죄송합니다. 보강하겠습니다.”

“좀 더 노력해야 할 거야. 기자라는 직업이 목표라면.”

최재석 교수가 밑줄을 친 검토본을 학생 기자에게 건넸다. 그리고 다음 차례가 왔다.

“음. 박 교수 인터뷰는 어떻게 잘되었나?”

다름 아닌 그 학생은 바로 얼마 전 민우와 인터뷰를 한 학보사 기자였다.

학생이 자신 있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 기사는 분명 학내에서 파장을 일으킬 거라 자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 협조적으로 잘해주셔서 뜻밖의 이야기도 좀 들었는데요. 인문학 프로그램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곧 있을 총장 선거에 초점을 맞춰보았습니다.”

“총장 선거라…….”

최재석 교수의 눈빛이 깊어졌다. 원순철 학장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모두 듣고 인터뷰를 승인하긴 했지만 여전히 뒷맛이 개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방금 검토했던 다른 학생 기자의 기사보다 두어 배는 집중해서 원고를 읽어 나갔다.

“흐음.”

낮은 탄식을 내뱉은 최재석 교수가 원고를 내려놓았다.

밑줄은 하나도 그어지지 않았다.

그 의미는 단순했다. 크게는 둘 중 하나다. 원고를 아예 내보낼 수 없거나, 아니면 이대로 내보내도 좋을 정도로 잘 써졌다거나.

“인문학 프로그램이 총장 선거의 도구로 사용될 여지가 있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박 교수께서 그런 표현을 직접적으로 하셨나?”

최재석 교수는 민우보다 한참 위의 선배였지만, 그에게 존칭을 썼다.

“아닙니다. 박민우 교수님께서는 직접적으로 그런 표현을 하진 않으셨지만, 제 판단으론 도구로 활용될 여지는 충분하다 생각됩니다.”

“기자의 생각과 판단을 기사에 넣는 건 위험하다고 했을 텐데.”

“이건 생각이나 판단이 아닌 인과관계를 따진 것입니다. 실제로 조사해보니, 인문학 프로그램에 다른 전공 교수님들도 참가한다고 들었습니다. 이제는 교양학부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명인대 전체의 프로그램이 된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인과관계는 명확하다고 봅니다.”

학생의 설명에 최재석 교수는 딱히 반론하지 않았다. 정확한 추론이었고,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니까.

“내 소속이 어디인지 알고 하는 말이지?”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검토드리고 싶었습니다. 주임교수님의 입장이 아니라 교양학부 교수님의 입장도 듣고 싶었거든요.”

“으음.”

최재석 교수의 고민이 깊어졌다.

그는 딱히 명예욕이나 출세욕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저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소소한 보람을 얻어가는 평범한 교수였다.

그래서 그만이 할 수 있는 고민이 있었다.

원고를 내려놓은 최재석 교수가 학생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본인의 기사가 발행되었을 때 학내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나? 다른 일도 아니고 총장 선거인데 말이지.”

“충분히 생각했습니다. 선거권은 민주사회의 기본 권리입니다. 공론화시킬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분들도 호응해 줄 거라 생각합니다.”

“반대로 생각해보지. 그 말의 의미는, 이 기사를 윗선에서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야.”

최재석 교수가 정곡을 찔렀으나, 학생의 표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래서 흥미가 돌았다.

자신의 제자는 아니지만, 최재석 교수는 오랜만에 시험해 보기로 했다.

그가 엄숙히 입을 뗐다.

“잘 알고 있겠지만 우리 학보사는 대학의 예산으로 움직이는 곳이지. 자네나 다른 학생 기자들도 장학금을 받고 있고. 나쁘게 말하면 어용 언론이라고 생각해도 된다는 거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명인대 학보사는 반세기가 넘는 역사와 전통을 가진 곳입니다. 많은 선배님들이 사회로 진출해 우리 대학의 명예를 드높이고 있고요. 그분들이 어용 언론에서 일하며 대학을 위한 기사를 썼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학보사의 역사와 전통을 부정하고 폄하하는 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분들의 땀과 노력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최재석 교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자기가 원했던 것 그 이상의 대답이었다.

“일회성으로 끝낼 생각은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이제는 인문학 프로그램의 문제가 아닙니다. 비정규직 노조나 총학생회 쪽과 접촉해서 실태를 고발하고 모든 학생 구성원들이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내려고 합니다.”

일이 커졌다.

하지만 최재석 교수는 오히려 희열을 느꼈다. 이렇게 도전적인 자세를 지닌 후배를 보는 게 얼마 만인가.

“적어도 5부작으로 기획을 해야 할 거야. 그래야 충분히 논의가 되겠지.”

“그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만…… 교수님께선 괜찮으신 겁니까?”

“하하하. 지금 날 걱정하는 게야?”

최재석 교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가 한 말이 맞아. 학보사의 역사와 전통을 부정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지. 내 학부 시절도 그러했고…….”

잠시나마 아른한 추억에 잠긴 그가 검토한 원고를 학생에게 건넸다.

“발행하게.”

단 한 번의 수정도 없이 오케이 사인이 떨어진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학생의 표정이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뒷일은 내가 책임질 거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네!”

학생이 기쁜 마음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최재석 교수는 다음 학생 기자의 원고를 받으며 생각에 잠겼다.

‘우리 대학의 표어를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들어 달라고?’

민우가 인터뷰에서 당부했던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그대로 기사에 실렸다.

그렇기에 최재석 교수는 웃음이 나왔다.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다.

‘도통 끝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니까.’

학부부터 대학원까지 명인대 출신이었던 그조차 하지 못했던 말인데, 상아대라는 이름 없는 대학의 졸업장을 지닌 교수가 명인대 학생들에게 그런 말을 해 준다는 것은 아이러니처럼 느껴졌다.

‘아니, 아이러니가 아니지. 아니고말고. 그만큼 고여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명문대라는 허울에 가려진 채 말이야.’

최재석 교수는 마음을 다잡으며 다음 원고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

근사한 정장을 걸친 서지훈 교수가 고급 한옥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한정식으로 유명한 식당이기도 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직원이 공손히 인사하며 서지훈 교수를 맞았다.

“일행이 있으십니까?”

“청록회.”

오늘 모임의 이름이 담백하게 나왔다. 직원이 다시금 고개를 숙이며 그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삐걱거리는 한옥의 복도를 한참 걸어, 끝쪽 방에 멈춰 섰다. 곧 직원이 문을 열었다.

“하하하! 드디어 오셨구만!”

안에는 미리 온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총 아홉 명이었고, 그중에는 아는 인물도 하나 껴 있었다. 바로 국문과 설예라 교수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차가 좀 막혀서.”

“원래 히어로는 가장 늦게 오는 법이지.”

“하하하하! 정답일세!”

누군가의 농담에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서지훈 교수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놀랍게도 상석이었다.

청록회는 서지훈 교수 주도로 조직한 명인대 교수 모임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푸르고 깨끗한 학교와 학계를 만들자는 취지로 조직된 단체였다.

하지만 그렇게 힘을 쓰는 곳은 아니었다.

구성원이 대부분 인문사회계 혹은 예체능 쪽이었기 때문에 학내에서 발언권이 세지 않았던 탓이다.

물론, 개개인을 놓고 보았을 때 각자의 영역에서 일가를 이룬 유명한 사람들이긴 했다.

하지만 대형 연구 수주로 재미를 보고 있는 대학 입장에서는, 돈이 되지 않는 인문계나 예체대보다는 이공계 교수들을 우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교수회의에서도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지 못하는 중이다.

“그런데 또 다른 주인공이 보이지 않는군?”

이중 가장 나이가 많은 기영탁 교수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미대 교수였는데, 서양화의 대가였다.

이름이 나오지 않았는데도 서지훈 교수를 포함해 이곳에 모인 열 명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챘다.

“워낙 바쁜 친구라서 말이죠. 근래에 새로 오픈한 캠퍼스도 있고 해서. 초대하긴 했습니다만 아마 오늘은 참석이 어려울 겁니다.”

“아아, 그 휴머니티인가 하는 거 말이군.”

“며칠 전에 개강한 탓에 초반에는 좀 바쁠 거라고 하더군요.”

“허, 그래도 지도교수가 이렇게 큰일을 하려고 하는데, 좀 와서 자리도 빛내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기영탁 교수가 농담처럼 말했으나, 조금의 진심은 있었다. 그때 옆에 있던 교수가 잔을 채워주었고, 서지훈 교수가 잔을 들었다.

“우리와 함께하겠다는 것 자체가 큰일 아니겠습니까? 총장 선거가 끝나면 우리는 아마 박 선생에게 크게 보답해야 할 겁니다. 그 친구, 보통이 아니거든요.”

“흐흐흐. 소문은 익히 들었지.”

“건배하실까요?”

설예라 교수가 제안했고, 모두 잔을 들었다.

기영탁 교수가 목청을 돋웠다.

“서지훈 교수의 건승과 청록회의 부흥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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