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2)
고민은 길지 않았다. 민우는 바로 답했다.
“축사는 제가 먼저 하겠다고 나선 건 아닙니다. 백성웅 총장께서 해달라고 부탁을 하셔서 하게 됐지요.”
오피셜로는 처음 밝히는 내용이었다.
그래서일까. 학생 기자들의 표정이 더욱 진지해졌다.
“그렇다면 총장님께서도 박민우 교수님이 인문학 프로그램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계셨던 겁니까?”
“그건 저한테 할 질문이 아니라 총장께 해야 할 질문 같은데…….”
“교수님께서도 느끼시는 바가 있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편하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민우는 내심 감탄했다. 학부생에 불과한, 이제 2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학보사 기자였으나 소스를 뽑아내는 것에 능숙해 보였다.
사실을 말해달라는 것보다 느낀 점을 말해달라는 것이 답변을 받기가 더 쉽다.
사실을 이야기했을 때 책임져야 하는 부분을 상쇄시켜 주는 간단한 화법이니까.
밖으로 나가면 학보사 경력이 인정된다고 들었는데, 제대로 교육을 받은 듯했다.
물론 오랜 세월 미디어를 상대해 온 민우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말이다.
“느낀 바를 필터도 없이 그냥 말하면 좀 곤란해질 거 같은데.”
“괜찮습니다. 자극적인 기사는 내보내지 않을 거니까요. 실명이 거론되는 인터뷰라 더 신경 쓸 생각입니다. 필요하시면 초안을 보내드릴게요.”
“그런가요.”
민우는 능청스레 연기하며 대답을 이어갔다. 실제로 그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대로 기사가 나가서 험한 꼴을 보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민우가 입을 열었다.
“총장께선 처음부터 인지하고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신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애초에 인문학 프로그램 자체가 총장께서 신경 쓰는 사업이기 때문입니다. 조만간 총장 선거가 있는 건 다들 알고 있죠? 연임을 위해 다시 출마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공연한 비밀이죠.”
기자들이 살짝 놀랐다. 인문학 프로그램 취재를 하러 왔는데 총장 선거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으니까.
“잠깐만요. 그 말씀은…… 그러니까, 인문학 프로그램을 사업화해서 연임의 도구로 쓴다는 그런 말씀입니까?”
“도구라는 표현은 좀 위험하네요.”
“아,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시간은 넉넉하니까 편하게 합시다.”
민우는 웃으며 기자들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여기에서는 최대한 조심스럽고 중립적으로 접근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그래야 기자들이 자신의 발언을 믿어줄 거니까.
기자들이 흥분을 가라앉히자 민우가 이어 설명했다.
“어쨌든 인문학 프로그램은 겉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큰 사업입니다. 아마 명인대 창립 이후로 가장 큰 외부사업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이 사업을 성공시킨다면 확실히 분위기를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겠지요. 어쨌든 전국적으로 대학 입학 정원이 점차 줄어드는 추세고, 출산율도 낮아지니 외부 학생을 유치할 수 있는 사업이 더욱 주목받을 겁니다.”
기자들은 바쁘게 필기했다. 그러다 문득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어 펜을 멈추고 민우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니 상당히 중요한 사업인 것 같은데요. 그래서인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사업이라면 교수님을 배제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오히려 중용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음, 거기엔 좀 애매한 일들이 있지요.”
민우가 은근히 미끼를 흘렸고, 두 기자가 그 미끼를 잽싸게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여쭤보고 싶은데요.”
“앞서 말한 총장 선거와 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구체적으로 부탁드립니다.”
“이번에 국문과 교수님 중 한 분이 총장 선거에 나가기로 되었습니다.”
두 기자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단 한마디였지만, 명문대생인 그들이 이해하지 못할 만큼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다.
이미 명인대 인문학 프로그램에서 국문과 교수들이 모두 배제되었다는 사실은 유명했다.
즉 배제된 원인을 알고 싶어 했는데, 민우의 입에서 힌트가 흘러나온 것이다.
“혹시 총장님께서 국문과 교수, 정확히는 출마하시려는 교수님과 박민우 교수님을 견제하시는 걸까요?”
기자 하나가 매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화두였다.
민우가 씨익 웃었다.
기다리고 있던 질문이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이대로라면 인터뷰를 금방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추측할 수는 있지만 단정할 수는 없지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무척 민감한 문제이기도 하고요.”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다는 거네요.”
“사실 인문학 프로그램에서 배제되었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말들은 신경 쓰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문제가 중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어떤 일입니까?”
“총장 선거에 학생들이 조금도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재학생들에게 선거권이 없다는 거죠.”
민우가 꺼낸 말에 두 기자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인문학 프로그램 취재를 하러 왔는데 뜻밖의 보물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민우가 팔을 벌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여기 계신 두 기자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을 자격은 있지만 대학 총장을 뽑을 자격은 없지 않습니까.”
“아, 그렇죠. 안 그래도 요즘 논의가 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논의는 10년 전부터 되고 있었습니다. 제가 명인대 대학원 들어오기 전부터 논의되고 있었죠.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논의만 하면 평생 논의만 하다 끝납니다. 학생들은 평생 대학에 있지 않거든요. 적당히 시간을 보내 세대교체가 되면 대학본부에 유리한 결정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민우의 어조가 강경해졌다. 두 기자는 필기를 바쁘게 이어갔다.
“즉, 교수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은…….”
“학생들이 좀 더 본인의 권리에 신경을 썼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귀한 시간 들여 공부하는 곳인데, 총장을 뽑을 권리조차 없다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미 몇몇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그 권리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명인대는 뒤처져 있어요.”
“조금 이야기가 새어나간 것 같은 느낌입니다만, 방금 인터뷰 내용을 기사로 내보내도 괜찮을까요?”
“괜찮습니다. 가감 없이 그대로 써 주세요. 덧붙여 학생들이 우리 명인대의 표어를 다시 한번 생각해봤으면 좋겠다는 말도 전해주십시오.”
Veritas lux mea.
진리는 나의 빛.
그것이 바로 명인대를 상징하는 표어였다. 두 기자는 민우를 바라본 채 잠시 말을 삼켰다.
“지금은 인문학 프로그램을 논하는 것보다 학생들이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는 게 우선입니다. 제가 할 말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오늘 인터뷰 감사합니다. 좋은 기사가 나올 것 같네요. 기사 발행되면 교수님께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예. 잘 부탁합니다.”
인터뷰는 모두 끝났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학보사 기자들은 서둘러 연구실을 나섰다. 민우는 자리로 돌아와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엔 여전히 여유가 넘치고 있었다.
***
며칠 후, 민우는 직접 차를 몰고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오늘은 랑느 박사와 미셸, 그리고 셀린느가 입국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특별히 정연주도 시간을 내어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정연주는 이미 약속 장소에 나와 있었다.
“많이 기다렸어?”
“아뇨. 저도 지금 왔어요. 학회 준비는 어때요?”
“별문제 없어. 다들 잔뼈가 굵은 분들이거든. 그리고 생각보다 민재가 일을 잘하더라고.”
현대서사학회 정기 학술대회가 다음 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재환, 최민식, 강예진은 물론 민우와 이수빈까지 학회 준비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 교수님의 그 제자네요. 저도 그런 제자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부러우면 너도 교수하든가.”
“그럴까요?”
“재단 이사장에게 듣는 수업은 어떤 기분일까 궁금하네.”
두 사람은 랑느 박사 일행이 나올 게이트에 서서 기다렸다.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캐리어를 끌고 랑느 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미셸과 셀린느도 따라 나왔다. 민우가 힘껏 손을 흔들었다.
「박사님!」
「오, 미스터 박!」
랑느 박사가 반색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민우는 그와 가볍게 포옹했다.
「멀리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피곤하진 않으세요?」
「괜찮네. 오랜만에 오는 한국이라 기대가 되더군. 기내식도 나름 훌륭했지만 빨리 호텔에 가서 불고기를 먹어야겠어.」
「하하하! 여전하시네요.」
이어 민우는 미셸과 인사했다. 그와는 가끔 안부 메일과 연구자료를 주고받고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미셸.」
「얼굴을 보니 잘 지냈냐고 묻지 않아도 될 거 같네요.」
「살이 좀 찌긴 했죠?」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는데요? 하고 싶은 일을 실컷 하고 사는 사람처럼 말이죠!」
미셸의 너스레는 여전했다.
「한국에 처음 온 거죠? 느낌이 어때요?」
「아직 공항이잖아요. 나가 봐야 알지. 랑느 박사님이 매일 불고기 노래를 부르셔서 한번 먹어보고 싶네요. 빨리 호텔로 갑시다!」
마지막으로 민우는 셀린느와 마주했다.
시니컬하고 무기력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녀의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고, 얼굴엔 활기가 넘쳐 보였다.
그래서일까. 예전에 미국에서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성숙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잘 지냈어?”
민우는 깜짝 놀랐다.
셀린느가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인사를 걸어왔던 것이다.
“한국어 공부했어요?”
“공부했어. 아직은 좀 어색한데. 공부했어. 열심히.”
“잘하네요. 한국어 공부하기 쉽지 않을 텐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거예요?”
“베데스다 분수.”
민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금방 한계가 왔는지, 문장을 생각하던 셀린느가 영어로 말을 이었다.
「거기에서 민우 씨가 <아틸라 마르셀>에 대해 이야기했었잖아요. 네 삶을 살라고요.」
「아아.」
이제야 기억이 났다.
<아틸라 마르셀>은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이라는 영화의 원어 제목이다.
민우는 베데스다 분수 앞에서 그 영화를 언급하며 자신이 왜 공부하는지, 그리고 자신만의 인생을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셀린느는 변했다.
「덕분에 이렇게, 삶이 즐거워졌네요.」
셀린느가 팔을 벌렸다.
그리고 다가오더니 민우를 살짝 껴안으며 양쪽으로 볼을 맞댔다. 전형적인 프랑스식 인사였지만, 민우는 깜짝 놀랐다.
셀린느가 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죠?」
「아니 갑자기 그렇게 나오면…….」
「프랑스에서는 다들 이렇게 인사하는데요? 우리 처음 만난 것도 아닌데.」
짓궂게 말하며 셀린느가 웃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민우는 왠지 놀림감이 된 것 같아 얼굴이 빨개졌지만, 그래도 좋았다.
오랜만에 만났어도 어색함 없이 이렇게 어울릴 수 있는 것도 타고난 복이겠지.
이번엔 정연주도 한마디 거들었다.
“수빈 언니한테는 비밀로 할게요. 형식적인 인사였는데 얼굴까지 빨개지면서 좋아하셨다고. 음, 그래도 역시 뭔가 대가를 받는 게 좋지 않을까요? 청문대에 한 학기만 강의 나와주시는 건 어때요?”
“야.”
셀린느가 이 상황을 프랑스어로 통역해주니, 랑느 박사와 미셸도 배를 잡고 웃고 말았다.
프랑스에서 온 동료들은 여전히 유쾌했다.
현장 시찰
다음 날, 민우는 휴머니티 캠퍼스로 향했다.
오늘은 명인대 강의가 없는 날이라, 연구실을 비우고 휴머니티 캠퍼스에서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휴머니티에 막 도착할 무렵 핸드폰이 한차례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로 온 문자였다.
― 이제 일어났네요. 어제 덕분에 잘 먹고 잘 쉬었어요! 그런데 휴머니티 캠퍼스는 언제 데려갈 건가요?
끝까지 내려보니 ‘미셸’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과연 소르본의 개구쟁이라는 별명답게 궁금증이 많은 것 같았다. 민우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으며 그에게 답장했다.
― 내일까지는 서울 좀 돌아다녀요. 특강은 이틀 후니까 잘 쉬어두고. 서울에서 가볼 만한 곳 찍어 줄게요.
― 오케이. 기대하죠! 가능하면 지하철로 이동할 수 있는 곳을 알려주세요! 한국의 지하철이 그렇게 좋다고 친구가 말해줬거든요!
개구쟁이처럼 환하게 웃는 미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민우는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어제 랑느 박사와 미셸, 셀린느와는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그들이 노래를 부르던 불고기를 먹으며 밀린 이야기를 나눴다.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은 그들이 생각보다 ‘휴머니티 프로젝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랑느 박사는 일정이 있어 한 달 뒤에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지만, 미셸과 셀린느는 비자가 만료될 때까지 한국에 남아있겠다고 했다.
민우가 교수 연구실로 들어섰다.
“어서 와라.”
서강일이 교수 연구실을 지키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하지은이 이젤에 캔버스를 올려두고 열심히 스케치하고 있었다.
민우는 자리에 짐을 풀고 앉았다.
서강일이 다가와 캔커피를 책상에 내려놓자 민우가 피식 웃었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아침부터 서비스 좋은데?”
“누굴 양심도 없는 사람으로 아나. 어제 고생했으니 이 정도는 해줘야지. 랑느 박사님하고 다른 선생님들은 잘 들어가셨어?”
“지금쯤 호텔에서 푹 쉬고 계실 거야. 미셸 씨는 벌써 서울 돌아다닐 준비 하고 있고.”
“적응이 빠르네.”
“워낙 활동적인 친구라서.”
원래 서강일은 어제 함께 인천국제공항에 나가 프랑스에서 온 손님을 맞이하려 했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가지 못했다.
그런데 서강일의 표정이 그리 밝지는 않다. 안 좋은 일이 있다기보다는 조금 생각이 많아 보였다.
민우가 잔소리하듯 말했다.
“뭘 그렇게 긴장해? 이제 즐기기만 하면 되는데.”
“후우…… 네가 왜 팀장직을 넘겼는지 이제야 좀 알 것 같단 말이지. 막상 시작하니까 신경 써야 하는 게 한둘이 아니더라.”
“하하하하. 이제 알았냐?”
어제부로 휴머니티 캠퍼스가 정식 오픈했다.
휴머니티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일과가 종료된 이후에 수업이 열린다. 오후 7시가 첫 강의다.
한 시간 단위로 수업이 열리기 때문에 시간이 맞지 않으면 다음 수업을 들어도 된다.
그렇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수업이 있고, 일요일에는 자유 세미나, 혹은 초청 강의가 열린다.
물론 자유로운 사람들을 위해 시설은 아침부터 개방해 놓는다. 대학원생처럼 특별히 공부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열람실을 이용할 수 있다.
아무런 비용도 내지 않고 열람실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큰 메리트였다.
“프랑스에서 온 손님들은 내가 알아서 케어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넌 전체적인 구성만 생각해. 디테일은 우리가 책임질 테니까.”
민우가 말했고, 그 믿음직스러운 말은 서강일의 불안감을 해소해 주기 충분했다.
“그래.”
“메로나 선생은?”
“한일대 행사.”
서강일은 아마 참석하기 어려울 거다. 이미 지도교수에게 방출 통보를 받은 상황이니, 당분간은 몸을 사리는 게 좋겠지.
그리고 지금은 휴머니티 캠퍼스에 집중하는 게 훨씬 이익이고.
그래도 끈은 유지해야 하니 강민희가 대신 참석한 것 같다.
“참, 미셸 씨랑 셀린느 씨는 한국에 좀 오래 있겠다더라. 특강 더 배정해도 될 거 같아. 랑느 박사님은 계획대로 다음 달에 프랑스로 돌아가실 거 같고.”
“그래? 좋은 소식이네. 한번 조정해 볼게. 수고.”
민우의 어깨를 툭툭 친 서강일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짐을 모두 푼 민우는 한숨 돌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1층 보니까 학생들이 생각보다 많이 왔던데. 한번 둘러보러 가 볼까?’
이른바 현장 시찰이었다.
그리고 민우가 계획하고 있던 파격이기도 했다. 어딜 가든 교수들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 대학 캠퍼스보다도 더욱 열린 공간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우연히 하지은과 눈이 마주친 민우는 손을 한 번 흔들어 준 다음 1층으로 내려가려 했다.
“오빠!”
뒤에서 하지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좀 급박해서, 무슨 일인가 싶어 민우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돌아섰다.
“점심 어디서 먹어?”
“어디서 먹긴? 여기서 먹어야지.”
“그럼 같이 먹자. 지갑을 두고 나왔지 뭐야.”
“아니 넌 무슨 나한테 돈 맡겨놨냐? 허구한 날 사달라고 하네.”
아무리 봐도 재벌가의 영애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니까.
하지만 왠지 하지은이 왜 그렇게 이야기했는지 알 것 같았다. 새로 들어선 식당에서 밥을 먹어보고 싶은데 같이 갈 만한 사람이 딱히 없었던 거겠지. 서강일과는 아직 데면데면하고.
알았다며 대답한 민우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딩동!
캠퍼스 1층에는 개방형 라운지와 카페, 그리고 구내식당이 자리해 있다.
라운지와 카페에 앉아 책을 읽거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 바로 이거야.’
민우가 원하는 그림이 펼쳐져 있었다.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과 사귀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경험은 책에는 적혀 있지 않으며, 다른 사람과 교류할 때 체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우는 일단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받아온 뒤 라운지로 움직였다.
적어도 휴머니티 캠퍼스에 입학한 학생 중 민우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그 반수 이상이 민우의 팬이기도 했다.
라운지에서 한 무리의 학생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민우가 그 근처를 지나가자, 학생이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어디 가세요?”
“어디 가는 건 아니고 그냥 둘러보고 있었어요. 다들 어떻게 시설을 이용하나 싶어서.”
면접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았던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대학원생들이다. 민우는 면접이 끝나고 따로 이력서를 보며 대학원생 출신 학생들의 모든 데이터를 머릿속에 넣어 둔 상태였다.
민우가 손을 들며 제안했다.
“커피 한 잔 더 할 사람? 제가 쏠게요.”
“저요!”
모여 있던 학생들이 하나둘 일어나 민우의 뒤를 따랐다. 여섯 명의 학생들에게 각각 음료를 사주고, 민우는 그들과 함께 라운지에 자리를 잡았다.
모두가 민우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거리고 있다.
그 시선을 즐기며 민우가 불쑥 물었다.
“어때요? 휴머니티에 들어온 소감이.”
누구를 콕 집어 지목하진 않았지만, 모두가 한마디씩 하고 싶어 했다.
“너무 재미있어요. 학교라는 울타리에 좀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여기에 오니까 마음 맞는 사람들이 많아서 좋아요. 아싸에서 인싸가 된 느낌?”
“놀기 좋다는 거군요. 오케이. 접수. 대학원생들을 위한 오전 클래스를 열어야겠네.”
“앗, 그건 좀…….”
“하하하하.”
다음으로 민우는 옆에 있던 남학생을 주목했다. 그러자 남학생이 말했다.
“박민우 교수님께 커피를 얻어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명인대생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네요.”
“그럼 인증샷을 찍어야죠.”
민우는 핸드폰을 꺼내 남학생과 나란히 섰다. 그리고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남학생의 표정이 어색해 보였다.
“이거 올려도 되죠?”
“그럼요. 얼마든지.”
“교수님. 저희랑도 사진 찍어요! 다 같이 찍는 건 어때요?”
“그럴까요?”
학생들의 요청에 민우는 포즈를 잡았다. 여섯 명의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였고, 그중 학생 하나가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민우가 은근히 당부했다.
“다들 SNS에 많이들 올려 줘요. 그래야 우리 캠퍼스 홍보되고 좋지. 해시태그 넣는 거 잊지 말고.”
“네!”
학생들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민우도 SNS에 접속해 방금 찍은 사진을 업로드했다. #휴머니티 #급벙개 #성공적 이라는 해시태그도 같이 넣었다.
민우는 거의 준연예인급 인사였다.
게시글을 올리자마자 하트가 하나씩 붙기 시작했다. 민우는 이미 10만이 넘는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었다.
댓글도 쏟아지기 시작했다.
부럽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다음 학기엔 꼭 등록하고 싶다는 메시지도 종종 보였다.
“다들 다음 주에 학회 있는 거 알고 있죠?”
“현대서사학회 맞죠? 그거 참가하려고 가입했어요.”
“저도요.”
민우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현대서사학회는 특별 규정을 만들어, 휴머니티 수강생에 한해서 가입비를 면제해 주었다. 그래서 부담 없이 학회에 가입할 수 있다.
사실 가입비도 그렇고 논문 심사비나 논문 게재료도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전일제 대학원생들이 돈을 벌어봐야 많이 벌 수 없으니까.
이 또한 민우가 개선해 나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리 등록하면 좀 편할 거예요. 학회 자료도 다운받을 수 있으니 예습 삼아 읽어보는 것도 좋겠죠.”
“기대돼요. 학회는 좀 막연하고 멀게 느껴졌는데…….”
민우는 방금 말을 꺼낸 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번에 석사과정에 처음 들어간 학생이었다. 학부 티를 아직 벗지 못한 병아리. 문득 처음 학회 준비를 할 때가 떠올랐다.
민우는 그 경험을 학생들과 공유했다.
“좀 어렵고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누구에게나 처음이라는 게 있으니까, 축제라 생각하고 같이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학계에서 같이 활동할 사람들을 만나는 곳이기도 하니까요. 용기를 내면 그만큼 얻어가는 게 많을 겁니다.”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학생 하나가 슬쩍 손을 들더니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교수님. 휴머니티에서도 스터디나 강독회를 만들어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그러려고 세미나실도 만들고 그런 거니까요.”
“그럼 교수님도 같이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오오~”
“대박!”
주변에 있던 동료들이 손뼉을 치며 좋은 의견이라고 칭찬했다.
민우는 살짝 식은땀을 흘렸다.
여기에서 같이 스터디를 하자고 권유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용기를 내면 그만큼 얻어간다는 말을 이렇게 적용할 줄이야.
하지만 민우는 긍정했다.
몸이 힘든 건 상관없었다. 대한민국의 학계를 지탱해 줄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무언들 못할까.
“좋습니다! 가볍게 강독회라도 하나 할까요? 고전 어떻습니까. 요즘 다시 읽어보려고 하는데.”
“좋아요!”
“그럼 세미나실 잡고 일정을 짜야겠네요. 이병욱 학생이죠?”
“아, 네.”
민우는 처음 질문을 던진 그 학생을 지목했다.
이병욱은 자기의 이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냐, 그런 반응이었다.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본 건 면접 때뿐이었는데 말이다.
민우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먼저 스터디 제안한 사람이 좌장 해야지. 강독회 일정 잡고 세미나실 예약해요. 비상연락망도 짜 보시고.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옙!”
문득 민우는 주변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 있음을 느꼈다.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점심시간이 되려면 시간이 한참 남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민우는 이번엔 다른 학생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