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1)
어제 서강일과의 술자리는 3차까지 이어졌다. 가벼운 마음으로 격려 차 들른 거였는데, 막상 술을 마시기 시작하니 술술 들어갔다.
그래서 다음 날, 민우는 이수빈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연구실로 출근해야 했다.
술을 많이 마시진 않았다. 그 이상으로 쌓인 이야기가 많아서, 술을 밀어 넣는다고 해도 금방 깨곤 했다.
‘희한하게 한결 더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드네. 강일이하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강일과는 사적으로, 그리고 공적으로도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런데도 이런 느낌이 든다는 건 좋은 신호였다.
보이지 않는 벽을 깨고, 그 사람의 삶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니까.
민우는 커피를 마시며 오늘 스케줄을 확인했다.
오늘은 강의도 있고, 인터뷰도 잡혀 있다.
민우의 시선이 인터뷰 스케줄로 향했다.
다름 아니라 얼마 전에 인터뷰를 요청했던 명인대 학보사 기자와 만나기로 했다. 인문학 프로그램 관련으로 인터뷰가 진행될 예정이다.
‘꽤 중요하지. 명인대 학보사는…….’
보통 대학의 학보사라고 한다면 교내 소식을 전하는 신문사를 말한다. 학교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규모가 작다. 동아리보다 조금 큰 정도.
하지만 명인대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오래전부터 명인대 학보사는 온라인 뉴스레터를 운영하고 있고, 교내 구성원은 물론 졸업생, 즉 동문회 구성원에까지 소식을 전하고 있다.
즉, 이번 인터뷰가 기사화된다면 파급력이 꽤 커진다는 소리다.
‘신중해야겠어. 어떤 기자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감정적으로 나서서 좋을 건 없겠지.’
그때 노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일찍 출근했네? 오늘 늦을 줄 알았는데.”
이수빈이었다. 손에는 숙취 해소 음료가 들려 있다. 그녀가 직접 뚜껑을 열고 민우에게 내밀었다.
“이거 마실 정도로 안 마셨는데.”
“새벽 네 시에 들어온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이수빈이 라임을 맞춰 반박하자, 민우는 단번에 깨갱 하며 물러났다.
“그냥 술은 안주 느낌이었어. 할 이야기가 많다 보니까 시간이 늦어진 거고. 지금 이렇게 빌빌거리는 건 피곤해서 그렇고.”
이수빈의 미심쩍은 눈빛을 확인한 민우는 얼른 숙취 해소 음료를 받아들고 한 번에 마셨다.
이수빈이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누가 설명을 듣고 싶대요? 사람 사 온 성의를 생각해 달라는 거지. 고맙다는 한마디 하기가 어려운 일인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근데 강일 오빠는 왜 그런대요? 무슨 일 있대요?”
“아니, 그냥.”
굳이 자세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이수빈이 서강일과 가깝다고는 해도, 어제는 개인적인 이야기도 많이 나왔으니까.
이수빈이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남자들끼리 한 이야기다 이거지? 좋아. 그렇게 나온다면, 오늘 아침에 윤아 등원 내가 대신 해준 거 잊지 말아줬음 하네요. 설거지도 내가 했다?”
“알았어. 이번 주는 내가 다 할게.”
“뭐 심각한 일은 아니죠?”
이수빈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천성이 선한 사람이었다. 가십거리가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다. 진짜 무슨 일이 있는가 걱정스러워하는 질문이었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살다 보면 힘들 때가 있잖아. 아무래 애써도 일이 잘 안 풀리는 시기. 그 시기가 온 거지.”
“휴머니티 이어받아서 정신없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고민이 많은 것 같네요.”
“그런 거 같아.”
바로 한일대 교수직을 두고 한 이야기다.
민우는 팔짱을 꼈다. 쉽지 않은 문제였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평생을 목표로 한 일이야. 그렇게 쉽게 단념할 수 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겠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야 왜 그 자리에 그렇게 목을 매냐고 하겠지만…… 난 좀 이해되는 부분이 있어.”
“상아대 때문에?”
“나도 한때 모교로 돌아가서 후배들을 키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으니까.”
실제로 민우는 상아대에 자리를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때는 여러모로 부족한 시기였고, 주변의 시기와 질투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원생에게 있어 모교는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아무도 받아 주지 않을 시기에 강의 경력을 쌓을 기회를 주고, 여러 동료와 교수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너도 그렇지 않아?”
“그렇긴 해요. 명인대 말고는 생각한 적이 없기도 하고.”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거 같아. 그때까지는 내색하지 말고, 녀석이 혼자서 잘 이겨낼 수 있도록 마음속으로 응원해 주자고.”
“알았어요.”
생긋 미소를 남긴 이수빈이 연구실을 나섰다.
***
그날 오후, 명인대 학보사 인터뷰를 앞둔 차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이욜~ 아주 때깔이 좋아 보이는데?”
완전한 시비조였지만, 민우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 일이세요? 연락도 없이.”
“내 학교 내가 오겠다는데 연락을 왜 하냐?”
그렇게 말한 사람은 바로 민우의 선배이자, 명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강예진이었다.
대학원 시절에는 후드티를 즐겨 입던 그녀였는데 이제는 제법 단정하게 입고 다닌다.
요즘은 이름보다 교수님이라는 소리를 더 많이 듣고 있으니까.
“앉으세요.”
“오냐. 맛 좋은 커피나 대령해 봐.”
“예이.”
민우가 깍듯하게 커피를 따라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 다리를 꼬고 도도하게 앉은 그녀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무섭게 보세요?”
“대체 무슨 꿍꿍이야? 프랑스 선생님들 학회에 초대하겠다는 건 그렇다 치는데, 이번에는 장소까지 제공하겠다고?”
“왜 그러세요. 좋으시면서. 겸사겸사 참가자도 늘리고 좋죠.”
민우가 능글맞게 반격하자 강예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좋은 건 좋은 건데, 일거리를 그렇게 무책임하게 늘려버리면 어떻게 해? 가뜩이나 기반 대학이 없어서 일 부탁할 사람도 없는데.”
“부탁할 사람이 없다뇨? 누나가 하심 되잖아요.”
“…….”
너무나도 당연히 되묻는 민우 덕분에 침통한 표정을 지은 강예진은 고개를 떨궜다.
소규모 학회는 여러모로 운영이 어렵다.
재정상태가 좋지 않은 건 물론이고, 기반 대학에서 대학원생과 학부생을 동원해도 간신히 운영할 수 있을까 말까다.
적어도 KCI급 학회가 아니라면, 논문이 들어오지도 않고 회원도 적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민우가 도와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하. 더러워서 살 수가 없네. 하루빨리 정교수 되든가 해야지…….”
“하하하. 제가 데스크에서 접수 도와드릴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소리야? 너 정도 되는 사람을 데스크에 세우면 아홉 시 뉴스에 나올걸? 아니면 그것이 알고싶다나.”
“뭐 어때요? 손님 접대하는 건데. 누가 하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마음이 중요한 거지.”
“오…… 빈말이 아닌가 보네?”
“당연하죠.”
어차피 발로 뛰어다닐 각오는 하고 있었다. 휴머니티 학생들을 케어하려면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진짜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그냥 오실 리는 없고.”
“왜 왔겠니. 민 선생님 뵈러 왔지 뭐.”
“무슨 일 있어요?”
깊은 한숨이 강예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민우가 몸을 움찔할 정도로.
“마음이 좀 많이 상하셨나 봐. 우리끼리 학회 만들어서 한다고 하니까.”
“아…….”
강예진을 비롯해 이재환, 그리고 최민식은 민영환 교수의 제자였다. 박사까지 지도를 받은 터라 총애하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특히 강예진은 박사를 졸업할 때까지 민영환 교수의 연구실에 머물며 그를 보좌했다.
“전화로 드릴 말씀은 아니라서 인사드리고 오는 길이야. 겉으로는 괜찮다고 하시는데 민 선생님 너도 알잖아? 소심하신 거.”
“그렇긴 하죠. 근데 그건 좀 소심한 거랑은 다른 거 같아요. 애써서 키운 제자들이 끼리끼리 놀겠다고 하면 마음이 안 좋을 거 같아요.”
민우의 한마디에 강예진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민우 너…… 지금 민 선생님 변호하는 거야?”
“하하하. 변호는 아니고요. 그냥 요즘 애 키우다 보니 그런 생각이 좀 들어서요. 제자를 키운다는 것도 어찌 보면 육아와 비슷한 느낌이라서.”
“그래. 넌 어른이고 나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지.”
“아직도 만나는 사람 없어요?”
“나 같은 애를 누가 데려가겠어? 성질 더럽고 돈도 많이 못 버는데 처먹는 건 많으니.”
민우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강예진의 자학 개그는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차민재가 안으로 들어왔다.
도서관에서 오는 길인지 품에 책이 잔뜩 들려 있었다.
“민재야. 이리 와 봐라.”
책을 내려놓은 민재가 재빨리 다가왔다. 민우가 강예진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제 제자인 차민재입니다. 상아대 후배기도 하고요. 인사드려. 강예진 선생님이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박 교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그렇게 많이 하셨을까나?”
배배 꼬인 말투로 묻자, 차민재가 당황했다. 민우는 피식 웃었다.
“이번 학회에 이 친구도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제가 시킨 건 아니고 자진해서 하겠다고 하네요. 똑똑한 친구라서 일 잘할 겁니다.”
“부족하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차민재가 꾸벅 인사했고,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던 강예진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가 둘이 닮은 것 같은데?”
“어디가요?”
“그냥, 민우 네가 석사과정일 때가 생각나서. 뺀질뺀질한 게 아주 그냥 딱이야.”
“그거 욕 아닙니까?”
“알아서 해석하세요.”
강예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짝 놀란 민우도 따라 일어났다.
“벌써 가시게요? 오랜만에 오셨는데 좀 더 있으시지.”
“가야지. 바쁜 사람 붙들어 봐야 욕밖에 더 먹겠냐.”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강예진이 지갑에서 명함을 꺼냈다. 그리고 명함을 차민재에게 건넸다.
“연구실에서 갑질당하거나 불쾌한 일을 당하면 언제든 이 번호로 연락하도록.”
“아, 감사합니다.”
“그럼 간다.”
손을 흔들며 강예진이 연구실을 나섰다. 때마침 민우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민우는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네, 박민우입니다.”
― 안녕하세요 교수님. 명인대 학보사 김찬주 기자입니다. 통화 괜찮으세요?
“그럼요. 괜찮습니다.”
― 인터뷰 장소는 어디가 편하신지 여쭤보려고요. 저희가 직접 연구실로 찾아가면 될까요?
“어디든 괜찮습니다. 편한 대로 하세요.”
― 네. 그럼 곧 찾아뵙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민우는 너저분한 책상을 정리하며 인터뷰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한 시간 뒤, 기자 두 명이 연구실로 찾아왔다.
***
“안녕하세요. 교수님. 김찬주입니다.”
“허영호입니다.”
두 학생이 민우에게 인사했다. 민우는 두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며 반갑게 맞았다.
“어서들 오세요. 이쪽으로 앉죠.”
차민재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기자들이 편히 질문할 수 있도록 석사연구실에 가 있으라고 했다.
“먼저 인터뷰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바쁘시다고 들었는데요. 최대한 빨리 끝내 보겠습니다.”
“아, 시간 많으니까 천천히 해도 됩니다. 부담 없이 질문하세요.”
“사진 찍어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한 명이 카메라를 들고 앵글을 잡았고, 나머지 한 명이 인터뷰를 시작했다.
“우선 저희가 찾아뵌 건 말씀드렸듯이 인문학 프로그램 때문인데요. 환영식 때 현장 취재를 하긴 했지만 여전히 궁금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렇군요.”
“교수님도 아시다시피 인문학 프로그램이 외부에 공개된 이후로 잡음이 좀 많았습니다. 바로 박민우 교수님께서 프로그램에서 배제되었다, 그런 말이었는데요. 갑자기 축사를 맡게 되신 배경이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훅 치고 들어오네.
민우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생각보다 수위가 높네요. 그런 질문 해도 괜찮은 겁니까? 학보사 담당 교수님이 발행 허가를 안 해줄 거 같은데…….”
“괜찮습니다. 주임 교수님 허가를 받은 내용입니다.”
“아, 성함이?”
“최재석 교수님입니다.”
최재석 교수의 프로필을 기억에서 떠올린 민우가 미소를 지었다.
최재석 교수는 인문학부 소속 정교수다. 벌써 원순철 학장이 손을 쓴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