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페르니쿠스적 전환 (5)
“이야, 드디어 올 게 왔네요.”
민우는 파일을 들어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 문학상을 제정할 당시 민우는 심사에 참가하는 것으로 협의했었다.
하반기 수상이라 심사가 좀 늦게 시작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내용을 보니 당초 계획했던 대로 세 분야에서 수상자를 뽑는다. 창작, 번역, 학술 이 세 분야다.
크게 보면 세 분야이지만 세부 내용으로 들어가면 종류가 꽤 다양하다. 기본적으로 대상과 신인상이 있고, 공로상도 있다.
그뿐이 아니다.
문학 부문을 예로 들면 시와 소설, 희곡 등 장르에 따른 수상 가이드가 나와 있어 실제로 상을 받는 사람은 열 명이 넘는다.
대상과 신인상 정도만 뽑는 일반적인 문학상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막상 이렇게 놓고 보니까 좀 걱정이 되긴 하네요. 수상자가 너무 많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문학상의 의의가 우수한 문인을 선정하는 것도 있지만, 가장 큰 목적은 역시 후원이에요. 상을 주는 게 아니라 그 문인을 후원한다는 의미니까요. 한국 문학의 전통이 끊기지 않고 더욱 찬란하게 빛나게 하는 게 목표잖아요? 그러려고 이름을 빌린 건데.”
“그렇죠.”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원의 느낌이라면 얼마든지 뿌려도 된다. 지음사가 주관사이긴 해도 후원사도 많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문제는 없을 터다.
그래서 민우가 평소 생각해왔던 것을 꺼낼 타이밍을 잡았다.
“후원사는 계속 모집하고 계신 거죠?”
“그럼요. 지금은 좀 여력이 부족하지만, 언젠가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학상으로 만드는 게 내 목표예요. 그러니 도움은 많을수록 좋죠.”
“휴머니티 캠퍼스에서도 문학상에 후원하고 싶은데요.”
“진심이에요?”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송승현 이사가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휴머니티 캠퍼스는 이미 지음사의 후원을 받고 있지 않나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생각보다 휴머니티 운영이 금방 안정될 거 같습니다.”
“그 중동 부자 친구가 도와주기라도 했어요?”
자얀 이야기였다. 아부다비석유투자회사 회장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최근 사업 영역을 보다 공격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 연방평의회 회장인 알 카흐파 의장의 뒤를 이을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친구한테 손 벌리긴 좀 그래서요. 스케일이 큰 것도 아니고요. 우리 힘으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네요.”
“좋아요.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죠.”
“기왕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말씀드려도 됩니까?”
송승현 이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해보라는 제스처였다.
“휴머니티 캠퍼스 학생들을 위한 인턴십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요.”
“인턴십이라면…… 출판 쪽이겠죠?”
“예. 아무래도 인문학 프로그램이다 보니 책을 만드는 일에 관심이 다들 많습니다. 요즘 1인 출판이나 웹 퍼블리싱 같은 게 유행이니, 지음사에서 조금 도와주신다면 좋은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지음사가 아닌 우리 출판그룹의 다른 계열사도 상관없는 거겠죠?”
“물론입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송승현이 답했다.
“그건 조금 고민을 해 보죠. 안 된다는 건 아니고, 어느 정도 수준으로 도와줄 수 있는지 실무진과 협의를 해 보겠어요.”
“감사합니다.”
이야기가 살짝 주제에서 벗어난 느낌이라, 민우는 다시 문학상에 대한 질문을 이어갔다.
“수상작 저작권 이슈는 어떻습니까?”
“저작권은 작가에게 귀속되는 걸로 했어요. 최근 수상작의 저작권을 회수하는 출판사가 몇 있어서 시끄러웠잖아요. 기왕 좋은 일 하는 거면 쿨하게 해야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무튼 민우 씨가 욕먹는 일은 만들지 않을 거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요.”
“걱정 안 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사님이 직접 챙기시는 일인데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고.”
계획서를 끝까지 다 읽은 민우가 파일을 내려놓았다. 잠시 머릿속으로 내용을 정리한 뒤 질문을 꺼냈다.
“그러니까 제가 도와드릴 부문은 번역상 심사뿐인 거죠?”
“문학이나 학술 카테고리는 아무래도 민우 씨와 이해관계가 두텁고, 또 직접 심사에 참가하는 게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어요.”
민우가 예전부터 걱정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전문성이나 공평성에 문제가 제기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송승현 이사가 사전에 잘 정리해 주었다. 민우는 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건 그래요. 제가 뭐 소설이나 시를 쓰는 것도 아니고, 학술 쪽은 저보다 경험이 풍부한 분들이 많으시니까요.”
“하지만 번역 부문은 그렇지 않아요. 객관적으로 봐도 민우 씨보다 커리어적인 측면에서 나은 사람은 국내에 없어요. 그러니까 번역 부문 심사위원장을 맡아서 진행해 줬으면 하네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제가 따로 준비할 게 있을까요?”
“후보군 선정이나 기타 행정 업무는 우리 지음사에서 진행할 거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나중에 담당자가 따로 연락할 거니까, 그때 다시 이야기 나누죠.”
“예.”
용건이 생각보다 간단히 끝났다. 왠지 싱거운 느낌이 들었다. 이 정도 일이라면 메일이나 전화로 처리해도 됐을 텐데.
“문득 옛날 생각이 나네요.”
“어떤?”
“김영화 작가님 <태엽시계> 번역할 때요. 그때 테스트 받았잖아요? 그게 생각이 나서.”
김영화 작가의 <태엽시계>는 민우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복권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민우는 지음사의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김태현 번역가를 완벽히 압도했고, 두 영국인 전문가의 선택을 받아 번역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 번역 테스트를 받던 사람이 몇 년 뒤 문학상의 심사위원장으로 돌아왔다.
긴 세월도 아니었다.
그저 몇 년이 지났을 뿐인데 왜 이렇게 아득하게 느껴지는지.
그건 송승현 이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민우 씨 뒤끝 있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역시나네요. 왜, 그 블로그 건도 그랬었잖아요? 닉네임이 별사탕이었던가요?”
“하하하. 그러네요. 블로그가 있었구나. 솔직히 그땐 좀 화가 나기도 했었죠.”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거구나.”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민식이 형 박사논문 출간 준비할 때 혼난 적 있잖아요. 본인이 이뤄 놓은 학문적 성취는 아무것도 없는데, 학문이란 이렇고 이런 거다 라고 떠드는 건 좀 우습지 않냐고.”
당시 최민식의 박사논문을 공저로 출간하기 위해 계획서를 제출했었는데, 송승현 이사는 민우의 커리어를 문제 삼아 반려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기억을 생생히 떠올린 송승현 이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안하다는 말 듣고 싶은 거 맞네!”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그냥, 제가 뭔가 이뤄 놓은 게 적지 않구나 하는 묘한 느낌이 들어서요.”
“이뤄 놓은 거 많죠. 앞으로는 더 많을 거지만.”
그때 송승현 이사가 다리를 꼬고 차분히 민우를 응시했다. 그리고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대학에서도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려오더라고요.”
그 순간, 민우는 본론이 따로 있음을 느꼈다. 송승현 이사의 분위기가 타이트해졌다. 마치 법정을 지배하는 판사처럼.
“민우 씨.”
“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 왜 서지훈 교수님을 총장으로 만들 생각을 했지요? 내 생각엔 본인이 직접 나서는 게 좀 더 수월할 것 같은데.”
장난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묵직한 질문이었다. 애초에 자신의 남편을 서지훈 교수라고 칭할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민우도 표정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하게 맞섰다.
“어느 쪽이 더 결과가 좋을지만 생각했어요. 저보다는 서지훈 선생님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과정이 순탄치 않겠죠. 민우 씨가 직접 출마했다면 이사회의 견제도 피할 수 있을 테고, 학생이나 교수들의 호응도 이끌어낼 수 있었을 텐데.”
“개인적인 욕심이 좀 있기도 했죠.”
“욕심?”
민우는 웃었다. 욕심이라고 표현했지만 사리사욕이 조금도 묻어있지 않는 순수한 미소를 지었다.
“요즘 좀 생각이 바뀌고 있어요. 이런저런 일을 겪다 보니, 연구실이나 강의실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참된 교수의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아니, 그렇다면 오히려 더 출마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직 그 분야에서는 아마추어입니다. 좀 더 배워야 해요. 그래서 서지훈 선생님을 도와드리려는 거고, 목표를 이루면 보좌하면서 많이 배울 생각이에요.”
피식 웃은 송승현 이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해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엔 자연스레 왕위를 계승한다?”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거잖아요.”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민우 씨 자서전에 적힌 구절이죠. 배신당하지 않게끔 노력해 봐요. 나도 응원하고 있을 테니.”
송승현 이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우도 따라 일어났다. 그녀가 민우를 밖까지 배웅하더니 지나가듯 한마디 던졌다.
“얼마 후에 명인대 총동문회가 열릴 거예요.”
“얘기는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제대로 참석한 적 없죠?”
“아무래도 학부는 상아대 출신이라서요. 대학원 동문회는 나간 적이 있는데, 총동문회는 나간 적이 없네요.”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민우는 명인대 정교수로 임용됐다. 거기에 누구나 인정하는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다. 가기만 해도 환영받을 것이다.
실제로 노벨상 수상 이후 총동문회에서 먼저 연락이 오기도 했다. 꼭 참석해 달라고.
그간 미뤄오고 있었지만, 이제는 분명한 목표가 생겼다.
총동문회야말로 서지훈 교수가 차지해야 하는 마지막 보루였으니까. 민우는 기꺼이 나가서 서지훈 교수를 보좌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번엔 나갈 생각입니다. 해야 할 일도 있고요.”
“좋은 소식 기대할게요.”
송승현 이사의 응원은 담백했다.
***
늦은 밤 휴머니티에 들어선 민우는 엘리베이터에 올라 6층을 눌렀다.
그의 손에는 비닐봉지가 들려 있다. 그 안에는 캔맥주 몇 개와 안주로 삼을 만한 과자가 들어 있었다.
컴컴한 복도 너머로 교수 연구실이 보였다. 그곳만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서강일이 논문을 읽으며 뭔가를 필기하고 있었다.
“궁상맞게 혼자 뭐 하고 있어? 메로나라도 부르지.”
“왔냐?”
민우가 봉지에서 캔맥주 하나를 꺼내 그에게 슬쩍 던졌다. 민우도 자신의 몫을 하나 꺼내 캔을 땄다.
그리고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 서강일의 앞에 앉았다.
“논문 써?”
“아니. 강의 준비. 첫 강의인데 잘 준비해야 하지 않겠냐.”
“너 정도 내공이면 그냥 들어가도 되지 않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니겠더라고.”
서강일도 캔을 따고 맥주를 천천히 들이켰다. 시원한 탄성과 함께, 그가 손등으로 입을 슥 닦았다.
“대학에서 강의할 땐 쉽잖아. 듣는 사람이 모두 전공 대학생들이니 수준을 고민할 필요가 없지. 하지만 여긴 달라. 편차가 굉장히 심해.”
‘남녀노소’라는 말이 정확히 들어맞는 곳이었다. 대학원생도 많지만,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사람도 많다.
“그렇긴 하겠네. 첫 타자라 부담이 크겠어. 그래도 얻어가는 게 많을 거야.”
“나도 배울 게 많을 거라는 생각은 드는데…… 글쎄다. 교수 임용 이력서에 한 줄 쓰지도 못 하는 일인데 이게 맞나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뭔가 즐겁고 설레기도 하고.”
새로운 일을 하게 되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미래에 대한 걱정이 공존하는 상태.
대학원생이라면 으레 겪을 만한 그런 감정이다.
공부를 하는 것은 재미있지만, 그 이상의 것을 보장해주지는 않으니까.
“거기에 대한 답을 내렸다면 네가 박사까지 마쳤을까? 그리고 이 자리에 있었을까?”
“……아니겠지.”
“좋은 기억과 경험만이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논문이 쓰레기통에 처박히고, 온갖 비판에 시달리더라도 얻어가는 건 확실하잖아. 만족과 보람. 내가 해냈다는 성취감. 뭐, 남들이 쥐뿔만큼도 알아주지 않긴 하지만 기분은 좋잖아?”
서강일의 시선이 민우를 향했다. 창밖에 펼쳐진 서울 야경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어쩌면 그거야말로 돈이나 직위로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가끔 해.”
“별종이구만.”
“하하하. 서강일 선생님! 머리 아픈 이야기는 그만하고 술이나 마십시다.”
“부족하겠는데?”
“2차 가면 되지 뭐.”
민우가 캔을 내밀었고, 두 사람은 쾌활하게 건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