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53화 (353/500)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4)

원순철 학장은 생각에 잠겼다.

쉽게 결정 내릴 만한 제안은 아니었다. 당장 대학에서 쫓겨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총장은 물론 이사회의 눈 밖에 날 것이다.

아마 정년을 채울 때까지 여러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조용히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

교수 말고 다른 일을 해본 적 없는 원순철 학장으로서는 많은 것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대체 이 사람은…….’

원순철 교수는 눈앞에서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민우를 응시했다.

마흔도 채 되지 않은 이 젊은 교수에게서 도박하는 느낌은 조금도 나지 않았다. 마치 당연한 일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순간 원순철은 자신이 지금까지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 회의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젊은 시절엔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일을 했었더라?’

그런 생각도 들었다.

지난한 세월을 거쳐오며 그때의 그 감성이 정확히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지금과는 좀 달랐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세대로 따지면 한 세대 정도 차이 나는 젊은 교수에게 이런 자극을 받는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새롭게 태어날 명인대라…… 듣기 좋은 말이군. 하지만 듣기 좋은 말은 위험한 말이라는 옛말도 있지 않나?”

“저는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생각을 여쭙고 있는 거죠.”

“만약 서지훈 교수가 총장이 된다면 우리 대학은 어떻게 바뀔 거라고 생각하나?”

“적어도 상식이 통하는 대학이 될 겁니다.”

“상식이 통하는 곳을 만들기란 말처럼 쉽지 않을 게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권유드리는 거지요. 명인대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선생님들이라면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민우의 목소리는 확고했고, 좌우로 기울던 원순철 학장의 마음이 한쪽으로 완전히 쏠리게 됐다.

“좋네. 협력하지.”

“아! 감사합니다. 이렇게 빨리 결정을 내려 주실 줄은 몰랐네요.”

민우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하지만 원순철 학장은 여전히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정을 내렸지만, 걱정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총장 선거는 쉬운 일이 아니야. 지금부터 바쁘게 움직인다고 해도 표를 모으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지.”

“저도 인지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계획이 있으니 너무 심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신 학장님께서는 교양학부 내에서 우리와 뜻을 같이할 교수님들을 좀 선별해 주세요.”

“음…… 다들 인문학 프로그램으로 마음이 상해 있으니, 누군가 총장을 상대하려 한다면 금방 협력할 거야. 최선을 다해보지.”

“감사합니다. 학장님.”

원순철 학장과 뜻을 모은 민우는 즉시 연구실을 나서 서지훈 교수 연구실을 찾았다.

서지훈 교수는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바쁘십니까?”

“적당히.”

“슬슬 지원서 쓰셔야 할 타이밍 아닌가요?”

“안 그래도 지금 쓰고 있어.”

명인대 총장 선거는 공모제다. 입후보 자격이 있는 사람은 대학본부에 서류를 보내 접수하면 된다.

이후에 총장후보추천위원회에서 후보자 심사를 하고 투표를 시행한다. 투표에는 교수와 직원만 참석할 수 있다.

여기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이 총장 후보자가 되며, 상위 3인을 선별하여 대학 이사회에서 최종 결정을 한다.

쉽게 말해 명인대에서 총장 후보자가 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표를 얻어야 하며, 총장후보추천위원회의 검증을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명인대는 사립대학이기 때문에 법인 정관에 따라 이사장이 최종 결정하게 되어 있다.

아무리 표를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이사회의 신임을 얻지 못하면 총장이 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즉, 서지훈 교수는 이런 부분에 있어 큰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이사회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까.

“방금 원순철 선생님이 왔다 갔습니다.”

“그 양반이? 전에 좀 트러블 있다고 하지 않았었냐. 한 선생이 그러던데.”

“사과하러 오셨더라고요.”

서지훈 교수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재미있는 일이라면 당장 들어야겠구나. 앉아라.”

두 사람은 소파에 자리했다.

민우는 원순철 교수와 나눈 대화를 모두 서지훈 교수에게 전했다. 서지훈 교수는 사뭇 놀라면서도 민우의 수완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역시 너도 한다면 하는구만. 대학이 아니라 여의도로 가야 하는 거 아니냐? 적성에 잘 맞을 거 같은데.”

“매번 드리는 말씀이지만 운이 좋았어요.”

“운하고는 관계없는 일이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건 돈을 버는 것보다 몇 배는 어려운 일이니까. 게다가 잘못을 용서한다는 건 더더욱 힘든 일이고.”

왠지 얼굴이 간질거렸다. 그래서 민우는 부끄럽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이제 기름칠은 다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움직여야죠.”

“안 그래도 아는 선생들 좀 만나기로 했다. 그때 원순철 선생도 부르면 되겠어.”

일이 착착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다. 이번엔 서지훈 교수가 물었다.

“다음 계획은 뭐냐? 전에 말했던 그건가?”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대학에서 총장 선거가 직선제로 바뀌고 있는 추세잖아요. 듣자 하니 명인대도 그런 논의가 몇 번 있었던 걸로 알고 있고.”

“지금도 거의 뭐 직선제나 다를 게 없지. 교수나 직원들은 투표권이 있으니까.”

“하지만 반쪽짜리라는 의견이 많죠. 정작 대학의 주인인 학생들에게는 투표권이 없으니까요.”

서지훈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 명이 넘는 지성인들이 모여 있는 곳인데, 대학의 책임자를 직접 선출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민우가 설명을 이어갔다.

“총장 임기가 4년이나 되는데…… 매년 치르는 선거 같은 것도 아니고 이번을 놓치면 또 4년을 기다려야 하는 거니까요. 알아보니 몇몇 단체에서도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실제로 지금 명인대 학부 및 대학원 총학생회나 노동조합 등 여러 내부 단체에서 관련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한마디로 ‘주권’을 되찾자는 의미였다.

이 당연한 권리가 아직 주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서서히 확산되고 있었다.

민우는 이 시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대로 학생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다음 총장 선거가 열리는 4년 뒤로 모든 것을 미뤄야 한다. 달아오를 때 확실히 음식을 익혀야 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살짝 불만 붙여줘도 활활 타오를 것 같습니다.”

“어떻게 붙이느냐가 문제겠네. 불이 너무 커지면 안 돼. 자칫하다간 피아 구분 없이 모조리 태워버릴 수도 있으니까.”

“동남풍을 불러오면 되죠.”

“니가 제갈량이냐?”

두 사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민우는 계획을 말했다.

“어제 학보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습니다. 인문학 프로그램에 대한 일이긴 한데, 곧 있을 총장 선거 이야기도 좀 해 보려고요.”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하지 않겠어?”

“그래서 생각해 둔 게 하나 더 있습니다. 기회를 좀 잘 만들어서 이사장님을 한번 뵙고 오려고요.”

“이사장님을?”

뜻밖의 설명에 서지훈 교수의 눈이 살짝 커졌다. 민우는 자신 있게 씨익 웃었다.

“그건 좀 의외네. 너 윗사람 만나는 거 별로 안 좋아했잖냐.”

“절 싫어하진 않으시니 뭔가 이야기가 좀 통하지 않을까 싶네요. 아마 제가 인터뷰하면서 돌아다니면 먼저 호출할지도 모를 일이고요.”

“하긴, 그것도 그렇군. 네가 우리 대학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잘만 이용한다면 유리하게 일을 풀어나갈 수도 있겠지.”

“어쨌든 제가 총장이 되려고 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선을 긋고 논리적으로 대응한다면 어느 정도 이야기가 먹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이야기였다. 서지훈 교수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해 주었다.

“어떻게 해서든 선생님 총장 만들어 드려야죠. 8월까지는 좀 바쁘게 돌아다녀 볼 생각입니다.”

“뭐 네가 알아서 잘하겠다마는…… 너무 무리는 하지 마라.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면 그것도 우스운 일이니.”

“예.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나가려던 민우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몸을 다시 돌렸다. 서지훈 교수가 그쪽을 주목했다.

“아, 선생님. 이력서는 잘 쓰셔야 해요. 괜히 서류에서 탈락하면 모양 빠지잖아요.”

“뭐 인마?”

“하하하하. 먼저 가겠습니다.”

민우는 꾸벅 인사하고 연구실을 나섰다.

***

그날 밤, 민우는 강남에 위치한 지음사 본사로 움직였다. 오늘은 송승현 이사와 미팅이 예정되어 있었다.

조수석에서 잠시 눈을 감고 쉬고 있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서강일이었다.

“여보세요.”

― 바쁘냐?

“아니. 지금 이동 중이야. 지음사 가는 길.”

― 특별 과정까지 세팅 다 끝났다. 정규 과정 200명, 특별 과정 50명. 이렇게 진행될 거야. 다음 주 수요일에 첫 강의 열릴 거고. 행정인력 준비도 다 마쳤어.

휴머니티 이야기였다.

오늘 하루는 총장 선거 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터라 약간 신선하게 들렸다. 벌써 첫 강의라니. 시간이 참 빠르다.

한편으로는 좀 우스운 생각도 들어서 민우가 피식 웃었다.

“그런 건 그냥 단톡방에 공유하면 되잖아? 일일이 이렇게 전화로 보고하실 필요 없으신데요.”

―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겸사겸사.

“이 아저씨가 징그럽게 왜 이래. 혹시 민희랑 싸운 건 아니지?”

― 애도 아니고 뭐 맨날 싸우냐? 다들 바쁘다 보니 일에 치이고 집에 오면 싸울 힘도 없어.

민우는 한일대 상황이 좀 어떤지 물어보려 했다가 그만두었다. 그 일은 서강일 혼자 정리하게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

분명한 것은, 서강일이 예전과는 달리 의욕적으로 뭔가 하고 있다는 거다.

그렇다고 답을 내렸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다.

그래도 이번 학기가 지나고 나면 어느 정도 길을 찾았으면 하는 게 민우의 바람이었다.

“넌 어딘데?”

― 텅 빈 연구실에서 혼자 궁상떨고 있지.

“한일대?”

― 아니. 휴머니티.

“전화할 만하네. 그 넓은 데 혼자 있으면 외로워지는 법이지.”

잠시 말이 끊겼다.

너무 조용한 나머지, 전화가 끊긴 것으로 착각한 민우가 액정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전화는 아직 연결되어 있었다.

민우는 다시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잠시 후 서강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이런 말 하면 왠지 혼날 거 같은데…….

“이제 와서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만 아니면 뭐 혼날 게 있겠어?”

― 답답하다. 이 길이 맞는 건지 잘 모르겠어. 아직도 얼떨결에 여기저기 끌려다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야.

아무래도 갑작스레 휴머니티를 책임지게 되어 부담감이 커진 것 같았다. 게다가 곧 개강이기도 하니까.

민우가 답했다.

“마부가 한 명도 아니고 아홉 명이나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그리고 그게 맞는 길인지 아닌지는 도착해봐야 아는 거잖아.”

― 알아. 그냥 푸념이지 뭐.

“오늘 늦게 들어가냐?”

― 아마도.

“그럼 기다리고 있어. 볼일 마치고 잠시 들를 테니까.”

약속을 잡은 민우는 통화를 마쳤다. 아무래도 오늘 일찍 들어가기는 틀린 것 같아, 이수빈에게 미리 톡을 보내놓았다.

곧 민우는 지음사에 도착했다.

이사실로 올라가니 송승현이 퇴근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이사님. 저녁은 드셨어요?”

“먹었어요. 민우 씨는?”

“저도 대충 때웠어요. 오늘 좀 정신이 없어서, 하마터면 늦을 뻔했네요. 요즘 일이 좀 많습니다.”

민우는 재킷을 벗어 한쪽에 걸쳐놓고 자리에 앉았다. 송승현은 파일을 몇 개 챙겨 테이블에 깔아놓고, 민우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니까 왜 조용히 있는 사람한테 바람 잔뜩 넣어서 일을 벌여요? 팔자에도 없는 총장이라니…… 하,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렇게 말하면서도 송승현은 딱히 불쾌하거나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정말 어이가 없었던 것 같다.

하긴, 서지훈 교수는 누구나 아는 듯 감투에 그리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바람이라뇨. 좋은 일인데. 서지훈 선생님이 들으면 서운해하시겠는데요?”

“총장이 되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되고 난 이후에 뭘 할지가 걱정이라서 하는 말이에요.”

“음…… 그건 된 이후에 고민해도 괜찮을 거 같습니다.”

“하긴, 서류 심사에서 탈락할 게 뻔하니까.”

쿨하게 독설을 내뱉은 송승현이 파일 하나를 펼쳐 민우의 앞에 내려놓았다.

“제1회 박민우 문학상 후보자 리스트예요. 한 달 정도 심사에 들어갈 건데 사전에 의견 조율 좀 하려고 모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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