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페르니쿠스적 전환 (3)
휴머니티의 별도 과정 개설 문제와 현대서사학회 협조 건을 한 번에 처리한 민우는 오랜만에 연구실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간 읽고 싶은 책과 논문이 많았는데, 이런저런 일 때문에 시간을 내지 못했던 것이다.
모든 것이 결정된 이후 민우의 연락을 받은 최민식은 뛸 듯이 기뻐했다.
소규모 학회가 어려워하는 것이 바로 공간 확보와 참석자 문제인데, 이 두 문제가 한 번에, 그것도 너무 쉽게 해결되었으니까.
거기에 민우와 이수빈이 발표를 자청하고 나선 덕에 발표자 섭외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무엇보다도 휴머니티 캠퍼스의 최첨단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학회 입장에서는 상당히 고무적일 수밖에 없었다.
학회 초대 회장인 이재환도 따로 연락해서 민우에게 고맙다는 말을 더할 정도로.
물론 강예진은 괜히 일거리를 늘렸다며 투덜거리긴 했지만 말이다.
‘계획한 대로 잘돼야 할 텐데. 가능하면 시행착오를 줄이고 싶다.’
소박하지만 민우에게는 분명한 욕심이 있었다.
휴머니티에서도 처음 학회를 유치하는 만큼 일정 수준의 성과를 거두고 싶었다.
‘랑느 박사님도 요청을 받아 주셨으니 어느 정도 주목은 받을 수 있겠지. 문제는 휴머니티 학생들이 학회에 얼마나 적응하느냐인데…….’
민우는 잠시 책에서 시선을 떼고 생각에 잠겼다.
일반적인 학회의 구성으로는 학생들의 관심을 끌기가 어렵다. 전문적인 용어와 개념의 해석은 둘째치고, 그 기저에 깔린 사상 자체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학회를 지나치게 쉽게 만들면 그것 나름대로 문제가 된다.
즉, 절충안을 찾아야 한다는 문제가 남는다.
‘논문 발표가 아니라 특강을 두어 개 정도 넣으면 분위기도 환기되고 좋으려나? 포스터 세션은 아직 무리일 것 같고.’
일단 민우는 특강에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면접을 치르면서 느끼고 깨달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부족할지 모르겠지만, 대학원에 들어와서 제대로 공부를 하기 시작하며 느꼈던 것들을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그들의 지식이 조금이라도 더 윤택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고 셀린느의 특강도 좋을 거야. 한번 부탁해 봐야겠다.’
셀린느는 학문적 무기력증을 겪으며 진리로 향하는 길에 굴곡을 많이 남겼다. 인생에 굴곡이 많은 사람일수록 남에게 해줄 말이 많은 법이다.
그리고 그 말은 대부분 좋은 조언이 된다.
그렇게 정리한 민우는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다시 시선을 책으로 고정했다.
똑똑.
그때 점잖은 노크가 들렸다. 민우는 잠시 책을 덮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렸다.
민우는 책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의외의 손님이 찾아왔던 것이다.
“학장님. 여기엔 어쩐 일로…….”
“바쁘신가?”
“아닙니다. 그냥 책 좀 읽고 있었습니다. 들어오시죠.”
고개를 끄덕인 원순철 학장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조금 초췌해 보였다.
“연구실을 같이 쓰는 학생이 있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안 나올 겁니다. 쉬는 날이거든요.”
“그렇군.”
그 한마디로 민우는 원순철 학장이 그냥 지나가다 들른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가 들을까 걱정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민우가 제안했다.
“일단 앉으시죠. 모처럼 오셨는데 커피 어떠십니까?”
“좋지.”
원순철 교수는 소파에 앉았지만, 그리 편해 보이지 않았다. 민우는 커피를 컵에 따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제 연구실엔 처음 오시는 거지요?”
“그러게 말이야. 근처인데도 들르기가 쉽지 않군그래.”
입술이 타들어 가듯 말랐던 원순철 학장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더니 컵을 빤히 바라본다.
“커피 맛이 좋은데?”
“종종 오십시오. 많이 도와드리진 못해도 커피 정도는 얼마든지 드릴 수 있으니까요.”
씁쓸히 웃은 원순철 학장이 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민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민우는 굳이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전에 하지 못한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러 온 걸까? 아니면 다른 문제로 따지러 온 것일까? 총장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잠시 후, 원순철 학장의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일전의 일은…… 사과함세. 리셉션 홀 밖에서 내가 말이 좀 심했던 것 같아.”
뜻밖의 사과가 나왔다.
억지로, 떠밀려서 하는 사과가 아니었다. 그래서 민우는 흔쾌히 웃었다.
“아닙니다. 그때는 저도 좀 무례했던 것 같네요. 저야말로 사과 말씀드립니다.”
“아닐세. 박 교수야말로 옳은 말을 했지. 교수라는 직위를 떠나 인격을 무시한 행동이었어. 내가 생각이 짧았지. 다시 한번 사과함세.”
“그만하세요. 부끄럽습니다.”
민우도 공손히 사과를 받았다. 덕분에 어색한 분위기가 어느 정도는 환기되었다.
일단 원순철 학장은 싸우러 온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무기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싸운다기보다는, 뭔가를 상의하러 온 사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애초에 축사 건도 총장이나 김명현의 작품일 테니, 엄밀히 따지면 원순철 학장의 잘못은 크지 않다.
그래서 민우는 그가 쉽게 마음을 열 수 있도록 표정에 여유를 뒀다.
“인문학 프로그램 수강생들 이탈이 계속되고 있어. 이야기는 들었겠지?”
“들었습니다. 유감이군요. 어느 정도 책임을 통감합니다.”
원순철 학장은 민우의 말에 회의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객관적으로 봐도 박 교수의 연설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네. 공부를 막 시작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깨닫는 것들이 많았을 거야.”
“하지만 대학본부엔 민폐를 끼치고 말았군요.”
“글쎄.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 우리가 접근 방법을 잘못한 게 아닐까 하는.”
원순철 학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민우는 이어질 그의 말을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실은 어제 공학계열 교수들이 찾아왔었네. 인문학 프로그램에 대해 이것저것 캐묻더군. 참 불쾌한 경험이었지.”
“생각보다 빨리 움직였군요. 아마 공학계열이 끝은 아닐 겁니다. 상경계도 있고, 예체능계도 있으니까요.”
“이게 자네가 말했던…… 주도권이 넘어간다는 그런 일인가?”
원순철 학장은 억울해 보였다.
하긴, 준비하는 데 들어간 시간과 노력이 아깝겠지. 하지만 대학 대부분은 이공계열 교수들의 힘이 세다. 대형 사업을 따오는 주체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우는 결국 인문학 프로그램은 이공계 주도로 확장될 것이라 예상했다. 최근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간과 과학’이라는 테마가 화제였으니까.
“그때 김명현 실장에게 물어보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그럴 겨를이 없었네. 김 실장이 금방 자리를 뜨기도 했고.”
“제가 보기에 인문학 프로그램은 공격적으로 학제 간 융합을 노릴 겁니다. 프로그램 볼륨을 키울 방법은 사실상 그것밖에는 없거든요.”
“역시…….”
원순철 학장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백성웅 총장과 함께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물음을 자신에게 던진 민우는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음을 느꼈다.
그리고 민우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저는 학장님께서 단순히 비즈니스로 인문학 프로그램을 설계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학장이라는 입장에서 어느 정도 수익은 고려하셨겠지만 좀 더 학구적인 부분에 신경을 많이 쓰셨겠지요.”
“우리 교양학부는 학부생들의 기본 소양을 책임지는 곳이지. 그런 의미에서 수익이 전부는 아니라는 말에 모든 교수들이 공감하고 있어.”
“하지만 이대로는 어떨까요?”
“…….”
“인문학 프로그램은 이미 학장님의 손에서 벗어났습니다. 백성웅 총장은 인문학 프로그램을 성공시켜서 총장 선거에서 재선을 꾀할 거고요.”
꽤 직접적인 이야기가 나오자 원순철 학장이 살짝 놀랐다.
하지만 민우는 말을 정제하지 않았다. 지금은 애매한 변화구가 아니라 직구를 던져야 할 때다.
“명인대는 바뀌어야 합니다.”
민우가 힘주어 말했다.
“사실 이건 우리 대학만이 아니라 모든 대학의 숙명 같은 거지요. 시대가 변하더라도 학문의 요람이라는 기본 정신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지금 총장은 그럴 의지가 없지요.”
“자네…….”
“무엇보다도 인문학을 근간으로 하는 교양학부라면, 그리고 그 교양학부의 책임자라면 마땅히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민우의 강변에 원순철 학장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한숨이 나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자네의 말이 맞네. 문제가 있지. 하지만 최고의 명문대라는 타이틀이 그 문제를 교묘히 숨겨왔지.”
“그래서 저는 우리 대학을 좀 바꿔보려고 합니다. 모두를 위해서 말이죠.”
“무슨 방법으로?”
“얼마 후 있을 총장 선거에 서지훈 선생님을 후보로 밀 생각입니다. 교내 정치에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뒷짐만 지고 있다가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죠.”
민우와 원순철 학장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던 두 사람.
원순철 학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알기로 서지훈 교수는 지지기반이 없네. 설령 출마한다고 해도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거야. 특별한 방법이 있지 않는 한…….”
“방법은 있습니다.”
“뭔지 물어봐도 되나?”
“그건 학장님이 어떤 모습을 보여주시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아직 그런 비밀을 공유할 만큼 우리의 신뢰가 깊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민우가 웃으며 말했다. 원순철 학장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도 괜찮겠나?”
“얼마든지요.”
“왜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건지 잘 모르겠군. 총장 선거나 인문학 프로그램의 향후 계획 같은 건 민감한 문제이지 않나?”
“맞습니다.”
말을 이어야 했음에도, 원순철 학장은 뜸을 들였다. 꺼내기 힘든 이야기가 나올 순간인 듯했다.
“나도 그렇고…… 교양학부의 몇몇 교수들은 자네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었지. 그건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생각보다 솔직하시네요.”
민우는 씨익 웃었다. 괜찮다며 고개를 주억거리기까지 했다.
“이해합니다. 저도 다른 사람을 질투해본 적이 있거든요. 프로그램에서 배제된 것도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선생님들도 명인대의 훌륭한 교수 아닙니까.”
“…….”
“과거에 붙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정도로 저는 꽉 막힌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니 그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심인가?”
“진심이 아니었다면 커피도 내어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그거, 나름 아끼는 원두로 내린 거거든요.”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민우는 단순히 생각했다.
원순철 학장이 자신의 연구실까지 오기 위해서 큰 용기를 발휘해야 했을 거라고.
결국 노크했고, 안으로 들어와 사과까지 했다.
그런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구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학장이라는 자리는 내가 아니라 자네에게 더 어울리는 자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군.”
“하하하. 아닙니다. 저는 아직 어려서요.”
“지금까지 우리가 나눈 대화는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셈이지.”
원순철 교수가 그제야 웃었다. 민우는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상체를 조금 더 앞으로 기울며, 은밀히 말했다.
“학장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조금 갑작스러운 말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저희와 함께하시겠습니까? 새롭게 태어날 명인대를 위해서 말이죠.”
새롭게 태어날 명인대라는 한마디가 강한 울림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