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페르니쿠스적 전환 (2)
김명현은 차분한 표정으로 복도를 걸었다.
뚜벅거리는, 다소 신경질적인 구두굽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몇몇 직원들이 그를 향해 인사했지만 김명현은 호응하지 않았다.
이미 그의 두뇌는 몇 가지 가능성을 두고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꾼 거지? 다른 건 몰라도 그 부분만큼은 이해가 안 돼.’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은 그저 하고 싶은 일을 동료들과 하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말한 건 다름 아닌 민우 본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누가 보더라도 경쟁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명인대 인문학 프로그램 환영회에서 축사를 하는 것으로 말이다.
김명현은 자연스레 얼마 전 목격한 민우의 축사를 떠올렸다.
내용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위해, 나아가서는 총장을 위해 호의를 베풀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진짜 문제는 그 이후의 일이다.
축사가 끝나고 그는 리셉션 홀에서 나와 원순철 학장과 대립했다. 그리고 그때 민우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거칠게 굴었다.
‘상부에 보고하긴 했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잔잔한 호수 같던 그가 갑자기 왜 변했을까.
그것에 대한 답을 끊임없이 찾으며 그는 총장실 문을 열었다.
“바쁘신데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아니, 안 그래도 부를 참이었어. 앉지.”
김명현은 소파로 이동하며 백성웅 총장의 표정을 살폈다.
뭔가 일이 있는 듯했다.
총장의 표정엔 불편함이 가득했다. 거기에 약간의 불안감까지.
명인대 인문학 프로그램 이슈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고, 그 이상의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일단 김명현은 차분히 자리에 앉았다.
백성웅 총장도 마주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인문학 프로그램에 소소한 이슈가 있다며? 자네가 전화하기 직전에 바로 보고 받았네.”
“계산 가능한 범주 내에 있던 일입니다.”
“계산 가능한 범주? 말을 재미있게 하는군. 수학 문제를 풀 때 틀릴 것을 예상했는데도 오답을 넣는 멍청이가 있던가?”
그 한마디로 백성웅 총장의 현재 심기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문제는, 그가 인문학 프로그램 수강 취소자가 대거 쏟아져 나와 화가 난 게 아닌 것 같다는 점이었다.
김명현은 자신의 직관을 철저히 믿는 사람이었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하지만 이탈자를 고려해서 만든 게 추가 합격자 시스템입니다. 오늘 내로 추가 합격자를 등록시켜서 공백을 메울 겁니다. 올라오기 전에 이미 지시를 내려 놓았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첫 사업인데 잡소리가 나는 거 곤란해. 고급 세단을 뽑았는데 여기저기서 플라스틱 떠는 잡소리가 나면 기분 나쁘지 않나?”
“옳으신 말씀입니다.”
눈을 빛낸 김명현이 승부수를 던졌다.
“하지만 총장님께서 걱정하시는 바는 인문학 프로그램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왜 그렇게 생각하나?”
“제 느낌이 그렇게 말하고 있네요. 뭔가 중요한 곳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인문학 프로그램이 그렇게 중요한 변수는 아니잖습니까?”
“음…….”
백성웅 총장은 낮은 신음을 흘리며 녹차가 담긴 찻잔을 두 손으로 쥐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어 손바닥이 뜨거웠다.
김명현은 핵심을 제대로 짚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따로 있었으니까.
그리고 김명현은 그 중요한 일을 토대로 다시금 승부수를 던졌다.
“얼마 후 있을 총장 선거에 어떤 문제가 생겼다. 이게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어떻습니까?”
“하하하핫!”
백성웅 총장이 웃었다. 하지만 썩 유쾌한 웃음은 아니었다.
“자네 말이 맞아. 조금, 아니지. 제법 묵직한 문제가 생겼지 뭐야.”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서지훈 교수가 총장 선거에 출마한다는 소문이 있네.”
“예?”
김명현이 사뭇 놀랐다.
평소 차분하고 냉정하기만 한 그의 표정이 변하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확실한 소스입니까?”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지.”
“하지만 제가 아는 서지훈 교수라면, 그런 명예욕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나도 그래. 그렇게 알고 있었지. 하지만 요즘 일어나는 일들을 가만 지켜보니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되더군.”
“하나의 결론이라면…….”
“요즘 우리가 하는 일에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인물이 하나 있지 않나?”
백성웅 교수가 나직이 물었고, 김명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불현듯 누군가의 모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김명현의 입에서 그 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박민우 교수.”
“맞아. 인문학 프로그램 이슈도, 서지훈 교수 건에도 모두 박 교수가 관여하고 있는 게 분명해.”
김명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하지만 궁금한 게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서지훈 교수는 이사회에서 신임을 받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총장 선거에 출마한다고 해서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럴 확률은 적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냐.”
“그럼 무엇입니까?”
“완성된 판을 망치는 건 못난 조각 하나거든. 엉뚱한 조각이 끼어들면, 그 조각이 아무 의미도 없는 걸 떠나 퍼즐이 완전히 균형을 잃게 돼. 신뢰가 없어진다는 말이지.”
한마디로 서지훈 교수가 출마하는 상황 자체가 부담스럽다는 말이었다.
이사회나 교수들 중 적이 많다고 해도, 그보다 압도적인 숫자의 아군이 존재하니까. 서지훈 교수는 학생들의 지지를 받는 교수였다.
“거기에 박민우 교수도 거슬려. 서지훈 교수는 모르겠지만 박민우 교수는 이사장님께서 특별히 아끼고 계시니 말이야.”
“확실한 캐시카우니까요.”
“그래서 머리가 아픈 거야! 놈들이 흉계를 꾸미고 있는데도 손을 쓸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지.”
백성웅 총장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확실히 재선을 노리는 그에게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턱을 괴며 곰곰이 생각에 잠기던 김명현이 불쑥 말했다.
“어쩌면 문제는 서지훈 교수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차피 이대로라면 서지훈 교수가 총장 후보로 출마한다고 해도 득표에 실패해 취임은 불가능할 겁니다. 교수들이나 교직원들은 여전히 총장님을 지지하고 있으니 말이죠.”
백성웅 총장의 눈썰미가 한번 꿈틀거렸다. 왠지 이어질 김명현의 말에 불안감을 느낀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박민우 교수가 아닐까 싶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봐.”
“서지훈 교수가 갑작스럽게 총장 후보로 출마한다는 건 부자연스러운 일이죠. 아마 박민우 교수와 어떤 교감이 있었을 겁니다.”
백성웅 총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이미 김명현의 추측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바보가 아니죠. 학내 정세를 정확히 읽고 있을 겁니다. 서지훈 교수도 그렇고 박민우 교수도 인망이 높은 사람들이니까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장 선거에 나서려는 건…… 뭔가 믿을 만한 구석이 있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역시 그렇지.”
“총장님께서는 짐작 가는 바가 없으십니까?”
“있다면 이런 걱정도 하지 않았겠지. 자네는?”
조금 더 생각해보던 김명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들이 어떤 무기를 만들고 있는지 말이죠.”
“잘 부탁하네.”
“맡겨 주십시오. 그런데 총장님.”
“뭔가?”
“이미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오히려 지금 경계해야 할 것은 서지훈 교수가 아닙니다. 바로 박민우 교수죠.”
인상을 찌푸리던 백성웅 총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또 뭔 소리냐는 듯이.
“인문학 프로그램 축사를 마치고 박민우 교수가 원순철 학장에게 한 이야기가 인상 깊더군요.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뭐였지?”
“박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크게 본다면 학장이나 자기나 같은 처지라고 말이죠. 그러면서 다음 학기가 되면 인문학 프로그램은 교양학부의 컨트롤에서 벗어날 거라고 충고했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꽤 중요합니다.”
“그랬단 말이지. 그러니까 원순철이가 박민우에게 붙을 가능성이 있다?”
“예. 우리 쪽의 적이 늘어난다는 것은, 박민우 교수나 서지훈 교수의 편이 늘어나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될 겁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료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죠. 그래서 박 교수를 경계하라 말씀드린 겁니다.”
확실히 이 상황에서 민우의 충고대로 흘러간다면, 원순철 학장은 대학본부에 반감을 가질 게 분명했다.
그때 민우가 포섭을 시작한다면 어떨까.
백성웅 총장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참고하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쉬십시오.”
굳게 입을 다문 김명현은 꾸벅 인사한 뒤 총장실을 나섰다.
***
다음 날 저녁, 명인대 근처에서 휴머니티 임시 회의가 열렸다.
당초 참석하겠다고 밝힌 모두가 모였다. 중식 레스토랑의 원탁에 앉아 코스요리를 먹으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눴다.
“명인대 쪽 반응은 어때? 김명현 그 사람이 시비 걸지
않았어?”
서강일이 물었다.
이미 그는 민우가 했던 일에 대해 모두 전해 들었다. 원순철 교양학부장에게 충고하듯 한마디 날린 것도 전부.
민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새우 요리를 입에 넣었다.
“아무런 액션도 없다. 총장실 호출도 없고. 그냥 조용해.”
“이상하네. 총장 성격상 한번 불러서 잔소리를 해도 모자랄 텐데.”
“그러게.”
한진섭과 주예린이 한마디씩 꺼냈다. 같은 명인대 식구라 총장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신경 꺼도 돼. 원순철 학장도 속이 좀 쓰리겠지만 그쪽이 무리한 부탁을 한 건 사실이니까. 추가 모집은 어떻게 할까?”
“네 축사를 듣고 마음을 바꾼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이제 와서 안 된다고 하기도 좀 그렇지 않냐?”
사실 나머지 사람들도 서강일의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우의 연설을 듣고 마음을 바꾼 사람들이다. 그들의 의욕을 무시할 수 없었다.
민우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형평성 문제가 나올 수도 있지. 면접 본 사람들도, 날짜를 놓쳐서 지원하지 못한 사람들도 불만이 생길 거야. 특혜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러니 별도 과정을 운영하는 게 좋을 듯해.”
모두 찬성했다. 결론은 서강일의 몫이었다.
“그럼 특강 편성하고, 안 그래도 랑느 박사님하고 제자들 와서 강의해 준다고 했으니 그쪽도 포함해서 특별과정 한번 만들어 보자.”
“오케이.”
“랑느 박사님 일행은 언제 입국이지?”
“다음 주 목요일.”
“얼마 안 남았네. 기념으로 식사 한번 해야 하지 않나?”
서강일이 물었고, 이번엔 정연주가 나섰다.
“그건 제가 준비할게요. 모두 시간을 맞추기는 어렵겠지만 최대한 좋은 시간 잡아 볼게요.”
“잘 부탁합니다.”
오늘의 안건은 모두 논의되었다. 테이블에 놓인 음식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후식으로 마실 만한 차가 나왔다.
“기왕 모인 김에 하나 의논하고 싶은 게 있는데.”
모두가 민우를 주목했다. 민우가 말을 이었다.
“키워보고 싶은 학회가 하나 있어. 아니, 키운다기보다는 함께 하고 싶은 학회라고 해야 할까.”
“어딘데?”
“현대서사학회. 명인대 선배들이 만든 학회야.”
그렇게 답한 민우는 서강일과 강민희의 반응을 살폈다. 명인대와 한일대는 전통적으로 라이벌 관계였으니까.
다행히 두 사람은 특별히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민우가 이어 설명했다.
“아직 걸음마 단계이긴 해도 좋은 학회가 될 것 같아. 그래서 우리가 학회에 인프라를 제공하고, 우리 학생들에겐 견학 기회를 주고. 그렇게 해 보는 건 어떤가 해서.”
“일종의 체험학습 같은 건가?”
“참석 인원이 많으면 학회 측에도 좋은 거니까. 바꿔 말하면 일반인들도 학회에 참석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잖아. 우리나라에선. 분명 좋은 경험이 될 거야.”
그렇게 말한 민우는 이수빈을 바라보았다.
학회 구성원들과 간접적인 관계가 있던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라는 의미였다.
“한번 해 볼까? 해 보고 나서 좋은 생각이었는지 아니었는지 판단해도 늦진 않겠지.”
서강일의 허락도 떨어졌다. 민우는 즉시 핸드폰을 꺼내 최민식에게 톡을 날렸다.
“그럼 그 학회에도 랑느 박사님 초청해도 되겠네요. 학회 참석하시는 거 좋아하시니까요.”
정연주의 말에 민우가 어설프게 웃었다.
“학회에서 감당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는데?”
“오히려 옛날 생각난다며 좋아하실지도 모르죠. 그리고 오빠가 계획하던 새로운 모습의 학회잖아요. 분명 마음에 드실 거예요.”
세계적인 석학의 피드백을 받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