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50화 (350/500)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1)

따로 볼일이 있었던 한진섭, 주예린과 헤어지고, 민우는 이수빈과 인문관으로 들어왔다. 몇몇 학생들이 둘을 알아보고 인사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그렇게 힐끔힐끔 쳐다보지 말고.”

민우의 한마디에 이수빈이 살짝 놀라며 웃었다.

“아니, 뭐. 그냥. 오늘 왠지 오빠의 다른 면을 너무 많이 본 것 같다고 할까. 이렇게 다른 사람하고 부딪치는 사람은 아니었잖아요? 좋은 게 좋은 거다, 이런 느낌으로 스무스하게 넘어갔었잖아요.”

“그렇긴 하지.”

민우는 그렇게 대꾸하며 계단을 올랐다. 321호를 지나쳐 바로 옆에 있는 이수빈의 연구실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뭔가 하던 대로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고, 그냥 그런 거지. 지도교수님을 사지로 내몰아 놓고 나만 호의호식할 순 없잖아. 나도 뭔가 액션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민우는 단순히 휴머니티를 위해 축사를 한 게 아니었다. 나아가서는 김명현, 조금 더 나아가서는 백성웅 총장을 겨냥하고 있었다.

민우가 준비한 대학 개혁안을 성공시키려면, 서지훈 교수를 총장에 앉히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으니까.

물론 그 정도는 학내 사정에 밝은 이수빈도 짐작하고 있었다.

“서지훈 선생님이 총장이 되면, 우리 학교도 많이 바꿀 수 있겠죠?”

“그럴 거라고 생각해. 비슷한 일을 해 본 경험이 있으신 분이니까.”

“그다음은 뭐예요?”

조금 모호한 질문에, 민우가 이수빈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수빈이 재차 물었다.

“왠지 서지훈 선생님을 총장으로 앉히는 게 끝이 아니라 시작인 것 같아서.”

역시 이수빈은 정확히 앞날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민우가 입을 열었다.

“다음은 학계지. 불필요한 격식을 없애고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떠들 수 있는 그런 창의적인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 그건 뭔가 문제를 해결한다기보단 새로운 문화를 만든다는 느낌일 거야.”

그 또한 어느 정도 계획이 나온 상태였다. 민우는 이재환과 최민식, 그리고 강예진이 키우고 있는 학회에서 그것을 실현할 계획이었다.

문득 이수빈은 예전에 카페에서 민우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대학은 대학대로, 학계는 학계대로, 정부는 정부대로 바꾸겠다는 바로 그 말을.

“그다음은 정부구요?”

“아마 그게 제일 어려운 일이 될 거야. 현장에서 조언하는 느낌으로는 제대로 먹히지 않을 테니까.”

“진섭 오빠가 괜히 정계에 진출할 생각이냐고 물은 건 아니었겠죠.”

민우는 선선히 인정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민우는 야권과 여권 가릴 것 없이 어느 정당에나 진출할 수 있다. 그만큼 정치적 가치가 높은 인재였다.

하지만 그 어떤 정당의 부름도 받지 않았다. 그쪽과는 아예 담을 쌓고 있었던 것.

장관급 하마평에 오르내린 것도 몇 번 있었다.

정계와는 달리 공직에 진출한다는 것에 크게 거부감은 없지만, 학문하는 것과 조금 거리가 있다는 생각에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이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을, 민우 스스로가 인지하고 있었다.

“명인대 국문과 교수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지금은 그렇지 않더라도…… 내일의 내가, 혹은 몇 년 뒤의 내가 바뀔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어.”

“걱정하는 거예요?”

“아니. 사람이 바뀌는 건 당연한 거야. 좀 더 성숙해지는 과정이지.”

“나는 오빠가 정치를 하든, 공직에 나가든 응원할 거예요. 그러니 너무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든든하네.”

“돈만 잘 벌어오면 그만이지 뭐.”

“하하하하.”

민우와 이수빈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같은 생각을 했다.

휴머니티를 비롯해 일련의 사건들이 만든 파장이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원인이 되었다는 게 왠지 운명처럼 느껴진다고.

어쩌면 교수라는 직업에 내포된 어떤 사명 같은 게 아닐까?

이수빈이 말했다.

“그래도 살살해요. 사람이 너무 변해도 주변에서 의심할 테니까요.”

“변한 게 아니야. 그간 조용히 연구실에서 공부만 하고 있으니까 나를 호구로 본 모양인데…… 그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 생각과 판단이 잘못되면 그걸 옳게 교정하는 게 교수의 책무기도 하잖아?”

민우가 개구쟁이처럼 말했고, 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되는 것도 있지만,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면 조금 안심된다.

“원순철 학장님이 가만히 안 있겠죠?”

“문제는 원순철 학장이 아니야. 총장이지. 어차피 원순철 학장이든, 김명현 실장이든 총장 쪽 사람에 불과하니까. 총장 선거에 변수를 주지 않기 위해 뭔가 손을 쓰겠지. 어쨌든 오늘 축사는 괜찮았잖아?”

“그렇죠. 아무것도 모른다는 전제하에서는. 어떨 거 같아요? 학생들이 축사 듣고 조금 흔들리는 거 같던데…….”

“그건 기다려봐야 하지 않을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민우는 씨익 웃으며 테이블에 놓인 과자를 까먹었다.

이수빈은 그런 민우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저렇게 태평할 수 있을까. 걱정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그리고 그다음 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

‘이거 재미있게 됐는데?’

평소보다 너덧 배는 많이 도착한 메일을 둘러보던 민우가 씨익 웃었다. 딸칵거리는 마우스 소리와 함께, 민우는 도착한 메일을 차분히 읽어보았다.

보낸 사람은 모두 달랐지만 내용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거의 비슷했다.

‘홈페이지 문의 게시판도 좀 확인해 봐야겠어.’

민우는 창을 전환하고 웹브라우저를 띄웠다. 그리고 휴머니티 홈페이지에 접속해 관리자 아이디로 로그인했다.

문의 게시판에도 평소보다 많이 게시물이 쌓인 상황이었다.

― 휴머니티 추가 접수는 안 하나요???ㅠㅠ

― 명인대 인문학 프로그램 취소했어요. 휴머니티에 등록하고 싶어요

― 정규 과정 말고 별도 과정도 있다고 하던데 신청 방법 안내 바랍니다

― 명인대 취소했어요!! 박민우 교수님 강의가 듣고 싶어요!!!!!!!

이런 느낌의 게시물로 도배되어 있었다. 게시물 번호를 확인하니 문의가 50개가 넘게 쌓여 있었다.

메일도 마찬가지였다. 휴머니티의 추가 등록을 문의하는 내용이 많았다. 그리고 대부분 명인대 인문학 프로그램의 등록을 취소한 사람들이었다.

민우는 냉정하게 지금 상황을 파악해 보았다.

‘아무래도 나가서 연설한 게 효과가 있었던 것 같네. 나도 아직 죽진 않았구나.’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 소식을 들은 멤버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잊고 있었지만, 민우는 루카치가 남긴 유품의 능력을 완전히 흡수했다. 호소력 있는 연설 내용과 그 능력이 합쳐져 시너지를 낸 것이다.

일단 민우는 톡창을 열어 휴머니티 멤버들에게 이 상황을 알렸다.

나: 휴머니티 추가 등록 가능하냐는 문의가 엄청 늘었다. 50건 이상인 것 같아. 명인대 프로그램 취소했다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고

섭섭한애: ???? 갑자기?

주님: 갑자기는 아니지 개강 축사에서 그렇게 떠들었는데 예견된 일임

섭섭한애: ㅋㅋㅋ김명현 그 양반 빡쳤겠는데~

내무부장관: 연락 온 거 없어요?

생각해보니 전화벨이든 뭐든 울려야 하는데 너무 조용했다.

메일에서 명인대 프로그램 등록을 취소했다고 밝힌 사람만 스무 명이 넘었다. 그쪽에서도 이상하다는 기류를 눈치챘어야 정상이다.

나: 아직은 없어. 곧 소환령 떨어지겠지. 환영회 때 원순철 학장하고 약간 충돌이 있었으니 위에서는 어떻게든 날 부를 거야

내무부장관: 걱정이네……

나: 별일 있겠어? 그냥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겠지

정연주: 박 교수님! 청문대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섭섭한애: 엌ㅋㅋㅋㅋㅋㅋ

주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깨알 같은 홍보에 민우가 피식 웃었다. 이게 교수들이 모인 단톡방인지 의심이 갈 때가 종종 있다.

나: 추가 모집에 대해서는 다들 어떻게 생각해?

섭섭한애: 50명 정도는 더 뽑아도 되지 않을까

주님: 22222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정연주: 아니면 별도 프로그램 만들어서 이탈자들 흡수하는 방법도 있어요. 메인 프로그램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우리 캠퍼스로 사람들이 모일 수 있게 하는 거죠!

나: 괜찮은 생각이네. 강일이는 어때?

서강일: 톡으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닌데, 주말에 한번 만나서 이야기해봅시다. 시간 안 되는 사람은 톡으로 의견 주시고

메로나: 주말은 넘 늦어. 내일 바로 모여야지. 문의가 그렇게 많이 들어왔는데 언제 기다리고 있어?

강민희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서 의견을 내는 건 역시나 생소했다. 서강일이 리더 역할을 하기 때문이긴 해도, 좋은 변화라 생각됐다.

서강일: 그럼 내일 저녁에 급한 대로 모이는 걸로 합시다

섭섭한애: 충성충성

주님: 낼봐요~

정연주: 저도 내일 참석할게요!

서강일이 깔끔히 정리해 준 덕에 이번 주말에 회합이 잡혔다. 장철호와 이유리, 하지은은 사정이 있어서 참석이 어렵다는 말을 남겼다.

‘어디 한번 해 봅시다. 김명현 씨.’

민우의 시선은 다시 모니터를 향했다. 그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고, 휴머니티에 남겨진 질문에 답변이 달리기 시작했다.

***

“실장님!”

교육개발실 직원 하나가 급하게 실장실로 들어왔다. 잠시 명상에 잠겨 있던 김명현이 나른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이 시간에는 방해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죄, 죄송합니다. 좀 급한 일이라서. 우선 이것 좀…….”

보고서를 넘기며 직원이 설명을 시작했다.

“오늘 오전부터 인문학 프로그램 등록 취소자가 연이어 나오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벌써 취소자가 30명이 넘었습니다!”

“뭐라고?”

김명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바쁘게 보고서를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현재 시각 오후 5시를 기준으로 이미 32명이나 되는 사람이 등록을 취소했다.

쾅!

김명현의 주먹이 책상을 사정없이 때렸다.

“대체 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만, 몇몇 학생들이 상담 중 휴머니티를 언급했다고 합니다.”

“휴머니티…….”

김명현의 눈이 가늘게 좁혀지더니, 이내 살기와도 같은 날카로운 기세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돌연 그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명쾌한 대응책이 나오진 않았다. 멀뚱히 서 있던 직원은 애가 타는 느낌이었다.

“약관을 좀 손봐야 했었나. 패널티가 없으니 취소자가 속출하는군.”

“그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박민우 교수의…….”

“시끄러워.”

나직이 경고한 김명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책상 앞으로 돌아 나오며 보고서를 직원에게 신경질적으로 내밀었다.

“내 프로그램에 하자가 있다고 생각하나?”

“그, 그럴 리가요.”

“분수도 모르고 끼어들려고 하지 마라. 돌아가 봐.”

여전히 직원이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용기 내어 물었다.

“저…… 그럼 이 문제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하나? 예비 합격자들 전화 돌려서 추가합격 시켜야지!”

“알겠습니다.”

직원이 서둘러 나갔고, 탄식을 흘린 김명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 저편에 걸린 태양이 진한 노을을 뿌리고 있었다.

“이제야 제대로 해 볼 생각이 드셨나?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그렇게 혼잣말한 김명현이 비릿한 미소를 짓더니 내선 전화를 들었다. 그리고 다이얼을 눌렀다. 잠시 후, 전화가 연결되었다.

“예. 총장님. 김명현입니다. 다른 게 아니라 보고드릴 게 있어서요. 예. 그러셨습니까. 그럼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김명현은 정장 재킷을 걸치고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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