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49화 (349/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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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문명은 현대사회에 들어 눈부시게 발달했습니다. 교육도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지요.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교육은 많은 화두를 안고 있습니다. 무엇을 배워야 올바른 것인가. 어떤 것을 배워야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 그런 고민이 많아지는 시점이지요.”

그때 리셉션 홀의 뒷문이 슬쩍 열리더니 익숙한 얼굴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이수빈과 한진섭, 그리고 주예린이었다.

그들은 주변에 의식되지 않게 맨 뒤쪽 구석에 조심스레 자리를 잡았다.

행사 진행요원들이 그들을 바라보았지만 딱히 관심을 두진 않았다.

민우는 그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발달된 기술은 때때로 교육을 받을 권리를 앗아가기도 합니다. 매년 새롭게 리뉴얼되는 스마트폰은 물론, 나이 든 사람들은 따라갈 수 없는 교육 프로그램들이 그렇지요. 또한 그런 기반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옳은 것인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는 정보의 홍수에 살고 있으니까 말이죠.”

민우는 천천히 예열하듯 분위기를 고조시켜갔다.

한편 그 장면을 지켜보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명인대 총장인 백성웅과 교육개발실장인 김명현, 그리고 교양학부장인 원순철이었다.

“저 연설이 원 교수님의 작품입니까?”

백성웅 총장이 넌지시 물었고, 원순철은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아니, 조금이 아니라 아예 다른 논조군요.”

“역시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나…….”

백성웅 총장의 입이 씰룩여졌다.

그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내려오라고 고함을 칠 것 같았지만, 옆에 있던 김명현이 조심스레 타일렀다.

“좀 더 지켜봐도 되지 않습니까. 박 교수도 명사입니다. 자기 입맛에 맞는 축사를 할 수도 있겠죠.”

“크흠.”

백성웅 총장은 표정을 다듬었다. 이런 일에 감정을 보였다는 것을 자책하면서.

“무엇보다도 이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지금에 와서 연설을 그만하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요.”

김명현의 말이 맞다.

백성웅 총장은 내심 탄식했다. 이태하 이사장이 중간에 끼어들지만 않았더라도 민우를 저 자리에 올리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한편, 그들이 나란히 앉아 다소 걱정스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민우도 알고 있었다.

이번엔 민우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여유로운 제스처와 함께.

“그런 의미에서 이번 프로젝트는 대단히 가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온라인이라는 막연한 공간을 넘어 오프라인에서 여러분들과 만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으니까요. 어때요. 즐겁지 않습니까?”

민우가 팔을 벌리며 포용하는 자세를 취하자, 객석에서 박수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민우는 잠시 말을 끊고 갈채를 즐겼다.

정작 VIP석에 있던 책임자들은 마음이 편치 못했다. 물론 겉으로는 웃었지만 말이다.

민우는 시시각각 변하는 관계자들의 표정을 즐기며 연설을 이어갔다.

“때문에 이 기회는 저도 그렇고 여러분들에게도 중요하며,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힘주어 강조한 민우는, 다시금 의미심장하게 이야기를 풀어갔다.

“이 프로그램의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학점과 취업에 연연하지 않고, 누구나 배우고 싶은 것들을 배우고, 전해주고 싶은 것들을 가르칠 수 있는 그런 지성 공동체가 되었으면 한다고. 모두가 꿈을 이룰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고.”

객석에 앉아있는 학생들의 표정이 애매하게 변했다. 함께 온 사람들과 귓속말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보였다.

왜냐하면 방금 나온 민우의 발언은 명인대 인문학 프로그램과는 조금 궤가 다른 말이었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빌어먹을.”

앞쪽의 VIP석에서는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 민우를 쳐다보고 있던 백성웅의 눈은 이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방금 민우는 폭탄을 던졌다.

학점과 취업에 연연하지 않는 것은 명인대 인문학 프로그램이 아니다.

누구나 배우고 싶은 것들을 배우는 곳도 아니며, 전해주고 싶은 것들을 가르칠 수 있는 그런 지성 공동체는 더더욱 아니다.

모두가 꿈을 이루기보단, 치열히 경쟁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더 많은 곳이었다.

즉, 지금 민우가 설명한 내용은 ‘휴머니티 캠퍼스’에 대한 것이었다.

VIP석에 앉아 있던 세 사람이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다들 박사학위 정도는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주어는 없어. 시비 걸 거면 얼마든지 걸어 보라고.’

그렇게 생각한 민우는 미소를 지었다.

이후로 프로그램 개설 목적과 이념, 비전 같은 것들을 열심히 열거해도 ‘휴머니티’라는 말은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좋은 공간, 그리고 멋진 교수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 스스로의 변화가 없다면 이 기회는 반쪽짜리 기회로 남게 될 겁니다. 무슨 소릴까, 이런 생각이 드실 텐데요.”

민우가 연단을 걷기 시작했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그리고 여유롭게 팔을 벌리며 말을 이어갔다.

“이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인문학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왜 인문학을 공부하는 걸까요. 거창한 건 치워두고 간단히 생각해봅시다. 마음 같아서는 여러분께 여쭤보고 싶지만 시간이 부족하니 제 생각부터 말씀드릴게요. 제가 내린 답은 이렇습니다. 바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

청중들의 집중력이 고조되었다. 민우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즉, 내가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절대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것이죠. 그래서 생각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생각의 힘을 기르는 것이 바로 인문학의 핵심입니다.”

민우는 조용히 VIP석을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체념한 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는 관찰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실험도 필요하겠죠. 관찰과 실험, 어디서 많이 들어보셨죠? 바로 과학의 기본 방법론입니다. 즉 과학도 넓은 의미에서는 철학, 즉 인문학에서 파생된 하나의 방법론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죠.”

이번에는 시선이 한참 뒤로 넘어갔다. 그곳에는 휴머니티의 원년멤버들이 소심하게 손을 흔들며 응원하고 있었다.

민우가 피식 웃었다.

“즉 이 과정은 문학과 역사, 철학, 그리고 과학을 넘나드는 방대한 프로그램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좀 더 깊게 관찰하고 생각하려고 한다면, 이 프로그램에서 얻어가는 가치는 훨씬 더 풍부해지겠죠. 여러분들의 저력을 믿습니다.”

민우는 여기에서 끊을까 하다, 얼마 전 있었던 인상적인 일을 떠올렸다. 그걸 말하지 않으면 후회가 남을 것 같았다.

민우가 다시 마이크를 입에 가져갔다.

“얼마 전에 많은 분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과 비슷한 입장의 분들을 200명 넘게 만났었어요.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지만…… 그런데 현실이 참 막막하더군요.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며 사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곳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력서에 한 줄 채우기 위해 등록한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현실이 막막하다는 표현은, 그들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무엇을 이루기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숭고한 일입니다. 존경할 만한 일이죠. 하지만 그 희생이 점점 커지고, 이루고자 하는 것이 멀어진다면, 그것은 희생이 아니라 절망이 될 겁니다.”

민우는 잠시 말을 끊고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내부는 숨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그런 현실의 부조리함을 인지하고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이 과정을 끝낸 여러분들이 모두 갖출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상 축사를 마칩니다. 박민우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민우가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했다.

박수가 끊이질 않았다. 절반 이상, 아니 종국엔 거의 모두가 일어서서 민우의 멋진 연설에 갈채를 보냈다.

하지만 VIP석에 앉아 있던 세 사람은 일어서기는커녕, 민우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기만 했다.

물론 민우는 그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 연단에서 내려와 리셉션 홀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박민우 교수!”

역시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우는 잠시 멈춰선 뒤, 여유롭게 돌아섰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원순철 학장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이야?”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왜 내가 보내준 걸 참고하지도 않고 멋대로 연설을 하냔 말이야!”

웃음이 나오지도 않았다.

다른 곳도 아닌 교양학부의 수장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이기적일 줄은 몰랐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맞는 것인가.

“일단 좀 진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손님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 말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나?”

“지금 협박하시는 겁니까?”

민우가 강하게 나오자 원순철 학장이 움찔했다. 진지하던 민우가 돌연 미소를 지었다.

“왜 제가 학장님께서 보내주신 대본을 읽지 않았는지는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시잖습니까.”

그때 뒤에서 머리 세 개가 슬그머니 튀어나왔다. 바로 이수빈, 한진섭, 주예린이었다.

그들은 한참 뒤에 떨어진 복도 코너에서 민우와 원순철 학장을 엿보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박 교수가 하는 프로젝트, 휴머니티! 그거 홍보하려고 그런 거 아닌가!”

“아뇨. 잘못 짚으셨습니다.”

“뭐라고?”

“제가 대본 읽을 짬은 아니잖아요. 스웨덴 한림원에도 다녀온 사람인데요.”

민우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스웨덴 한림원이라는 표현에 원순철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노벨문학상을 언급하니 할 말이 없어진 것이다.

“낯부끄러워서 어디에다 이야기도 못 하겠습니다. 저 정도 되는 사람이 어디 가서 대본이나 읽고 있어야 할까요? 학내 커뮤니티에 올려서 생각을 한번 들어볼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

“압니다. 학장님도 총장님 오더 때문에 이러시는 거. 크게 본다면 학장님이나 저나 같은 처지겠지요.”

민우가 좀 더 가까이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원순철 학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는 의미에서 제가 하나 충고해드리겠습니다. 어차피 다음 학기가 되면 인문학 프로그램은 교양학부의 컨트롤에서 벗어날 겁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본부에서는 인문학 프로그램을 비즈니스 모델로 생각하고 있어요. 단순히 인문학만으로 돈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학제 간 융합이 시작되면서 주도권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넘어갈 겁니다.”

“…….”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저기 뒤에 계신 분께 한번 여쭤보시는 게 좋겠군요.”

그 말에 깜짝 놀란 원순철 학장이 돌아섰다.

김명현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우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원순철 학장을 뒤로한 채 그곳을 빠져나왔다.

코너에서 이 장면을 몰래 지켜보고 있던 동료들이 민우를 맞았다.

“제정신이야? 조교수 나부랭이가 학장한테 개겨?”

한진섭이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민우는 의연했다. 이수빈과 주예린도 오히려 속 시원하다는 표정이었다.

“조교수니까 학장한테 개기지. 잃을 게 없잖아?”

“그래. 그래야 박민우지. 러브콜의 사나이! 안 되면 소르본이든, 소아즈든, 동경대든 훌쩍 날라버려!”

“차분히 지켜봅시다. 오늘 일이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민우가 앞장섰다. 나머지 셋도 나란히 붙어 민우와 함께 걸었다.

한편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김명현은 조용히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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