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핑 포인트 (4)
서지훈 교수가 피식 웃었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진했다.
“총장 선거라…….”
그 반응을 지켜보던 민우는, 서지훈 교수가 같은 문제로 오래도록 고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복잡하게 변해갔으니까.
사실 학계를 개혁하고 후학들에게 좋은 환경을 조성해주려는 노력은 민우만 하는 게 아니었다.
명인대 내에서는 서지훈 교수는 물론, 비슷한 시기에 활약하고 있는 설예라 교수와 일부 열려 있는 교수들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 우두머리 격이 바로 서지훈 교수였고.
“좀 이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나 아직 정년 되려면 멀었는데 말이지.”
“총장 임기 끝나고 다시 강단으로 돌아오시면 되잖아요. 아니면 총장 연임을 하면서 정년을 채우시는 방법도 있고요.”
“마치 내가 나가면 무조건 당선된다는 듯이 이야기하는군.”
서지훈 교수가 점잖게 일침을 날렸지만, 민우는 의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힘을 보태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겁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도 있잖아요?”
“솔직히 네가 백지장은 아니지.”
그렇게 말을 끊은 서지훈 교수는 다리를 꼬고 비스듬히 앉았다. 금연하지 않았다면 새로운 담배를 입에 물어야 할 타이밍이었다.
고민이 길어졌다.
민우가 덧붙였다.
“예전에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권력을 잡지 않으면 네가 하려는 이상적인 교수법들이 무너질 수 있다는 말?”
민우는 깜짝 놀랐다.
조금의 고민도 없이 나온 서지훈 교수의 대답이, 자신이 하려는 말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히 일치했던 것이다.
예전에는 오로지 학문의 길을 걷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지훈 교수와는 추구하는 바가 약간 다르다고 판단했었다.
하지만 서지훈 교수는 명인대 국제어학원장으로 취임했고, 이어 국문과 학과장을 맡으며 크고 작은 개혁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민우가 공부에 몰두하는 사이, 그는 현실에 뛰어들어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 많은 것들을 바꾸어낸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니 민우의 가치관도 조금씩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너도 나를 관찰하며 깨달은 게 있겠지. 결국 직접 나서지 않는다면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거.”
“노벨상을 받고 나서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역시 잠깐이더라고요. 직접 발로 뛰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 것들이 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까 정치를 좀 하래도. 스펙도 훌륭한데 왜 자꾸 정치권에서 오는 콜을 무시하는 거야?”
“정치를 하더라도 대학이라는 바운더리 내에서 하고 싶어요. 누구를 위해 헌신해야 하는지가 분명한 곳이잖아요? 여의도와는 다르게.”
씨익 웃은 서지훈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민우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라 이후에 어떻게 변할지는 모른다. 그래도 더 좋은 학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장 선거…… 그 첫 단추가 명인대라는 건가. 수신(修身)과 제가(齊家)는 했으니 이제 치국(治國) 차례인가?”
“일종의 낙수 효과를 노리고 있습니다.”
“낙수 효과?”
“인지도가 높은 대학의 변화가 좀 더 파급력이 클 거라는 이야깁니다. 그래서 제가 있는 명인대를 선택했어요. 마침 선생님도 계시고. 청문대를 고민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제 소속이 아니기도 하고, 파급력이 그리 크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하, 탱커에는 소질이 없는데.”
“여기 든든한 힐러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쇼.”
“하하하하.”
시원하게 웃은 서지훈 교수가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렸다.
“언젠간 하려던 일이라서 저항은 크지 않아. 조금 빠르다는 느낌이 들지만,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겠지. 계획은 있나?”
“이사회에서 내정한 후보와는 싸움이 안 될 겁니다. 내부 표심은 그쪽으로 다들 몰려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새로운 표밭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도 서지훈 교수는 계산을 마쳐 놓은 상황이었다.
“학생들 표를 끌어다 쓰려는 거라면 쉽지 않을 거야. 학칙을 개정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이사회의 승인이 필요하니까. 뭐, 다 된다고 쳐. 학생들 사이에서도 의견 모으기가 쉽지 않을걸?”
상아대, 청문대를 거쳐 명인대에서 교수 생활을 하며 민우가 느낀 것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개인주의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의견을 수렴할 때도 정족수가 채워지지 않아 부결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즉, 학생들은 공약에 관심이 있기는커녕 아예 투표라는 행위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도 해볼 만합니다. 어쨌든 제도를 만들어 놓으면 학생들도 처음은 호응을 해줄 거니까요.”
“하긴, 초반 버프라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 학생 참여에 대한 문제는 미뤄둬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여러 일을 겪으면서 알게 된 게 있는데요. 명인대 이사회에서 제 눈치를 좀 보는 거 같더라고요.”
“그 앞뒤 꽉 막힌 양반들이 눈치를 본다고?”
“다른 학교로 도망가는 걸 걱정하는 거 같아요. 한마디로 상품성이 있는 교수라고 생각하는 거겠죠.”
그렇다면 휴머니티 건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리가 없다. 총장이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아서 견제했을 터.
하지만 백성웅 총장은 오히려 자신을 회유하려고 들었다.
그 말은 즉, 이사회의 압박이 있었다는 것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해석은 서지훈 교수도 마찬가지로 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지. 네 이름을 빌리는 것만으로도 신입생 유치 효과가 뛰어날 테니까. 학회 관리도 쉬울 거고.”
“그래서 그걸 역으로 좀 이용하려고 합니다.”
“네가 여론을 조성해서 학생들에게도 투표권을 주겠다? 너 언론 플레이 싫어하지 않았냐?”
민우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언론 플레이가 아닙니다. 교육이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잖습니까. 마찬가지로 대학의 주권은 학생들에게 있죠. 주권을 행사하는 기본은 바로 투표입니다. 지금은 그게 안 되고 있고요.”
그 한마디로, 서지훈 교수는 민우가 충동적으로 자신을 지지하려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좋아. 알았다! 출마 준비를 하지. 대신 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노후는 네가 책임져라?”
“그럴 일은 없겠지만, 뭐 그렇게 되면 제가 책임져야죠.”
“든든하구만.”
“그런데 선생님 도와주실 분들은 좀 계실까요? 물론 선생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절대 아닌데, 아무래도 스케일이 큰 일이다 보니 러닝메이트 같은 분들이 계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서지훈 교수가 피식 웃었다.
“의심하는 거 맞는 거 같은데?”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걱정하지 마라. 나름 명인대에도 깨어있는 지식인들이 많으니까. 우리 과에서는 설예라 선생이 도와줄 거다. 다른 과에도 선생 몇 분들이 계시고. 내부 모임이 있거든.”
“다행이네요.”
“마침 다음 주쯤 회합이 있으니 그때 협력을 부탁해 보도록 하지.”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려야 하는 건 내가 아닌가? 리무진과 레드 카펫은 네가 준비해 놓을 거고, 나는 그 위만 걸으면 되는 거니까.”
“이야…… 비유 한번 찰지네요.”
“비유 아냐. 진짜 해 보고 싶다. 나 총장 되면 한번 추진해 봐.”
“하하하하.”
두 사제가 의기투합했다. 이제 남은 것은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는 것뿐이었다.
***
며칠 후, 명인대 인문학 프로그램의 개강 환영회가 열렸다.
사실 메인 커리큘럼이 아닌 부속 강의에선 환영회를 열지 않는다. 오리엔테이션 정도를 하는 게 전부인데, 이번에는 성대한 행사를 준비했다.
모두 교육개발실 김명현 실장 작품이었다.
그는 이것을 단순히 교육이 아닌 하나의 사업 모델로 인식했다. 때문에 학생들의 입소문을 의식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명인대에서는 교양 강의에서도 환영회를 해준다.’
‘음식이 참 맛있었다. 시설이 깨끗했다.’
‘대접받는 느낌이었다.’
이런 입소문만 퍼져도 다음 강의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 것이다. 아주 기본적인 바이럴 마케팅이었다.
때문에 명인대 인문학 프로그램 환영 행사는 리셉션 홀에서 열렸다. 명인대 내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시설을 자랑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주요 학회는 물론, 기타 일반 행사들도 많이 열린다.
“안녕하시오. 박 교수.”
민우가 리셉션 홀에 나타나자 나이가 지긋한 교수가 말을 걸어왔다. 민우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바로 그가 교양학부장 원순철이었다.
명인대 철학과를 졸업해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인재였다. 소탈해 보이는 복장이었지만, 눈빛만큼은 매서웠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그러게. 참 오랜만인 듯하군. 박 교수 임용 면접 때 이후로 처음이지?”
“맞습니다.”
원순철은 민우가 명인대에 임용될 당시를 언급했다.
그는 1차 면접 때 면접관으로 참여했다. 그때를 상기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임용에 관여했다는 것을 넌지시 알리려던 것이다.
즉, 네가 여기에서 교수 노릇을 하고 있는 것에 조금이라도 내 덕이 있다, 이렇게 어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민우는 그런 걸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전에 내가 보낸 참고자료는 잘 받아봤는지 모르겠군. 피드백이 없어서 말이지.”
“보내주신 자료는 잘 받았습니다. 진즉에 좀 받았으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그 이상의 피드백은 없습니다.”
민우가 담백하게 지적하자, 원순철의 주름이 살짝 꿈틀거렸다.
애초에 그의 입장에서 민우는 별로 탐탁지 않은 인물이었다. 나이에 비해 너무 지나치다 싶은 커리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존경한다, 멋있다는 말을 할 수 있어도 마음속 깊이 탄복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학계라고 해서 고고한 학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인간의 욕망과 욕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대학원생들이 시달리는 것이고.
“아무튼 연설 잘 부탁합니다. 박 교수가 알아서 어련히 잘하겠지마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몇 마디 하고 내려오는 건데요.”
민우는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맨 앞쪽으로 가서 자리했다. 행사 관계자들은 자리에 이름이 적혀 있어서 편히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곧 사회자의 목소리와 함께 행사가 시작되었다.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행사에 참석해 주신 학생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지금부터 명인대학교 인문학 프로그램 제1기 개강 행사를 시작합니다!”
박수가 들려오고, 명인대 소개 영상이 스크린에 띄어졌다.
무투브에서 봤던 광고 영상과는 조금 다른 버전이었다. 교내 시설을 소개하고, 학생들이 이후 어떤 곳에서 공부하게 될지를 알려주는 가이드 같은 영상이었다.
한마디로 환영회 행사에서 으레 틀어주는 그런 오프닝 영상이었다.
짧은 영상이 끝나고 사회자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이 기념비적인 프로그램을 축하하기 위해 명사 한 분이 오셨습니다. 다들 이름을 들어보셨을 텐데요. 명인대 국문과에 재직 중이신 박민우 교수님을 모셨습니다. 다들 박수로 환영해 주십시오!”
큰 박수와 함께 민우가 연단에 올랐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긴장이 아니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자신의 축사를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하고 또 기대되기도 했다.
민우가 마이크를 받침대에서 분리했다. 그리고 손으로 쥔 채 연단 앞으로 나와, 객석과 최대한 가깝게 자리했다.
“안녕하십니까. 박민우입니다.”
민우가 꾸벅 인사했고, 축사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