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핑 포인트 (3)
아침 일찍 출근한 민우는 차민재가 만들어 놓은 커피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늘 하는 일 중 하나인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확인했다.
특별한 일은 없는 것 같아, 민우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차민재를 바라보았다.
하나뿐인 수제자는 이른 아침부터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문득 얼마 전 있었던 휴머니티 면접이 떠올랐다.
그때 많은 대학원생들을 만났고, 그 이상의 고충을 들었다. 그러다 보니 차민재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민재야. 바쁘냐?”
“아뇨. 괜찮습니다.”
민재가 일어났다.
민우는 소파 쪽으로 앉으라고 손을 뻗었다. 책상에 앉아 이야기하는 것과 이렇게 자리를 잡고 이야기하는 건 많이 다르다.
그래서 차민재는 긴장했다.
차민재도 거짓말을 잘 못 하는 성격이었다. 단번에 상태를 파악한 민우가 피식 웃었다.
“대단한 건 아니니까 긴장하진 말고. 너도 이제 나에 대해 좀 알 때가 되지 않았냐?”
“아직 여기에서 뵌 건 두 달밖에 안 됐잖아요.”
“하긴, 그것도 그러네.”
명인대 국문과는 국내 최고의 교수진을 자랑하는 만큼, 학생도 많고 교수도 많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차민재도 민우의 연구실을 사용하는 것 자체를 조심하고 있다.
특혜 의혹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며칠 전에 휴머니티 면접 본 건 알지?”
“예. 아는 사람도 거기 지원했는데 합격했다고 좋아하더라고요.”
“면접 때 문사철 대학원생들이 많이 왔어.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실제로 들으니 마음이 좀 안 좋더구나. 학문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 그래서 네 생각도 좀 들어보려고.”
“아…….”
그제야 차민재는 긴장을 풀었다.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 대해 묻는 거라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민우가 약점을 잡거나 그러는 사람은 아니니까.
잠시 생각하며 할 말을 정리한 차민재가 말했다.
“일단, 역시 강사법이 걱정되긴 하죠.”
“다들 그 이야기부터 하네. 뭐 석사 1학기생이 강사법 걱정할 수 있어. 그런데 문제는 강사법 자체가 아니라, 공부만 하더라도 시간이 모자랄 텐데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고 있다는 거잖아. 이제 막 대학원에 들어온 학생들이.”
“결국은 그렇죠.”
그렇게 대답했지만, 차민재가 조심스레 다른 의견을 냈다.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을까요? 학문을 한다는 어떤 숭고한 마음가짐이 있긴 하지만…… 다들 어른이고 책임을 질 나이니까요. 무조건 지원을 바라는 것도 문제가 될 겁니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당한 의견이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을 마련하더라도 경쟁사회인 이상 모든 사람에게 혜택이 주어지긴 힘들다. 그중 가능성 있는 사람을 뽑을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럼 큰 거 말고, 소소한 부분에서 어떤 부분이 문제라고 생각해?”
“제 주변에 강의 나가시는 분들 말씀 들어보면, 역시 연구실이 없는 게 제일 불편하죠.”
“연구실이라.”
현재 명인대는 비전임인 초빙교수까지만 연구실이 제공되고 있었다. 강사들은 공용 연구실을 쓰거나 카페에서 학생들과 상담한다.
“그리고 시간강사도 어떻게 보면 교육 노동자잖아요. 그런데 건강보험 같은 노동자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게 좀 아쉬운 것 같아요.”
“그렇긴 해. 현행법으로는 강사 한 명이 한 주에 6시간 이내로만 강의할 수 있게 되어 있으니까.”
건강보험공단에서는 시간강사가 단기간 근로자라며 건강보험 가입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따라서 시간강사는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거기에 퇴직금도 문제다. 1주일에 6시간을 초과하여 강의할 수 없기 때문에 법적으로도 퇴직금을 보장받을 수 없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전에 이야기 들으니, 어떤 선생님은 방학 때 강의료가 다 지급되지 않고 3주 정도 치만 받으셨다고 들었어요.”
“그것도 계약할 때 대학과 협의를 해야 하는 부분이니까. 자율권을 대학에 준 게 문제였지. 더 적게 받는 사람들도 많을 거야.”
“이것 말고도 많아요. 강의도 많이 사라졌죠. 예전에는 정말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과목이 많았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필수과목만 남은 느낌이고. 거기에 해가 바뀔수록 졸업 이수학점도 점점 낮아지는 거 같고…….”
한마디로 강의를 적게 열고, 적게 수업을 들어도 졸업할 수 있는 방향으로 대학이 꼼수를 부리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민재가 씁쓸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러다 제가 박사를 따게 될 때는 어떨까 걱정도 많이 돼요. 하지만 각오는 돼 있습니다. 조금 배고프게 살아도 공부는 손에서 놓지 않을 거예요.”
“그 각오가 배신당하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말이다.”
“그래도 선생님 같은 교수님들이 많으니까, 앞으로 점점 더 좋아지지 않을까요?”
차민재가 빙긋 웃었다.
속세에 찌들지 않은, 순수히 학문만을 바라보고 있는 저 미소를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만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때 먹고사는 걱정까지 하게 하고 싶진 않아. 네 말이 맞아. 교수인 우리들이 열심히 해야지. 걱정하지 마. 어떻게든 해낼 테니까.”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괜히 찍혀서 좋을 거 없잖아요?”
“괜찮아. 오라는 데 많으니까.”
“하하하하.”
반쯤 농담으로 던진 말에 차민재가 든든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민우는 늘 그랬다. 자신의 것을 지키려고 하기보다는, 남을 위해 움직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국내 최고 대학에 자리를 잡은 상황에서도.
차민재는 어쩌면 민우의 말이 곧 현실이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아무튼 고맙다. 다음에도 종종 물어볼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는데, 그때도 잘 부탁해.”
“얼마든지 여쭤보세요.”
면담이 끝나고, 민우는 연구실을 나와 바로 옆방의 문을 노크했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이수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수빈이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오늘은 날이 좋은 날이라 햇살도 강했다. 그래서인지 청초한 느낌이 가득했다.
“이 선생. 바빠?”
“바쁘죠. 우리 이쁜이들한테 물 주고 있는데.”
“나한테는 줄 생각 없어?”
“줄까요?”
씨익 웃은 이수빈이 물뿌리개를 들고 민우 쪽으로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머리 위로 뿌릴 기세였다.
“농담을 무슨 다큐로 받고 그래? 진정하고 앉아 봐.”
“무슨 일 있어요?”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명인대 교수로서는 네가 선배잖아.”
선배라는 표현에 이수빈이 잠시 멈칫했다.
이수빈은 얼마 전 카페에서 이야기했던 일을 떠올렸다. 한진섭이 무슨 계획을 꾸미냐고 민우에게 물었던 바로 그 순간이.
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민우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백성웅 총장 임기 얼마 안 남았지?”
“이번 학기가 마지막이죠 아마? 8월에 끝날 거예요.”
“그럼 바로 선거에 들어가나?”
“6월쯤 공고 뜰 거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7월에 선거하겠죠.”
그러다 문득 이수빈은 민우의 계획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설마 총장 선거에 나가려고? 아니, 이건 자격이 안 될 테니 아닐 거고. 그럼 선거에 개입하려고요?”
“일단은 그럴 생각이야.”
“무슨 수로? 대학 총장 선거는 일반 선거와는 달라요.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말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죠. 우리 대학은 사립대니까. 이사회를 거스를 순 없어요.”
명인대의 총장 선거는 투표로 진행된다. 하지만 학생들에겐 투표권이 없다. 명인대학교 행정직원과 정교수만 표를 행사할 수 있다.
따라서 이사회가 원하는 인물을 내정하는 느낌으로 늘 투표가 진행됐었다.
그래서 이번 백성웅 총장도 총장으로 당선된 것이었고.
“알고 있어. 하지만 재학생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대학도 있지. 점차 그렇게 되는 추세기도 하고.”
“그래도 실제 반영 비율은 턱없이 적잖아요.”
“한 번에 모든 걸 바꿀 수 없잖아. 직선제로 전환하는 것 자체가 충격이 될 거야.”
“진심으로 할 생각이에요?”
민우가 돌연 씨익 웃었다. 그 자신만만한 표정은 익히 이수빈도 잘 아는 것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사안의 무게가 달랐다.
“뭔가…… 믿고 있는 구석이 있구나?”
“구석이라기보다는 믿고 있는 분이 한 분 계시지.”
“믿고 있는 분이라면…… 아! 설마?”
“맞아. 그 사람.”
이수빈의 표정도 긍정적으로 변했다.
민우도 알고, 이수빈도 아는 사람 중 대학을 뿌리부터 깨끗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
“그런데 그분이 그걸 수락하실까요? 귀찮은 일이라면서 딱 잡아뗄 것 같은데.”
“명분은 충분해. 그분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이제는 학문후속세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돼. 이대로는 모두가 주저앉고 말 거야.”
“잘됐으면 좋겠네요.”
“명인대 국문과도 멋지게 바꾸신 분이야. 그 증거로 내가 여기에 와서 교수를 하고 있는 거고.”
“그건 그렇죠.”
명인대 국문과는 외국인이 아닌 이상 자대 학부 출신만 교수를 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하지만 그 룰은 사라졌다.
바로 민우가 명인대 국문과로 임용되면서 말이다.
“그러니 인문학부를, 나아가서는 우리 대학을 건강하게 해줄 수 있는 분으로서는 적격이라는 거지.”
“본인이 받아들이시냐 하는 문제가 남네요. 그분도 나름 명인대 입장에서는 악동이었잖아요? 이사회에서 별로 좋아할 것 같지는 않은데.”
“악동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황태자지.”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황제가 될 시간이고.”
“어디 가려고요?”
“쇠뿔도 단김에 빼라잖아. 뜨거운 거 식기 전에 설득해야지.”
“좋은 소식 기대할게요!”
이수빈이 예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이수빈의 연구실을 나선 민우는 바로 서지훈 교수 연구실을 노크했다. 다행히 서지훈 교수는 연구실 안에 있었다.
“응? 무슨 일이냐?”
“드릴 말씀이 좀 있어서요.”
민우가 진지하게 말하자, 서지훈 교수가 미심쩍은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젓는다.
“안 돼. 돌아가. 해줄 마음 없어.”
“그러지 말고 한번 들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선생님께도 좋은 일인데.”
“뭔가 네 표정만 봐도 머리가 아파질 거 같아서 그래.”
“그렇다면 정확히 보신 거고요.”
한숨을 내쉰 서지훈 교수가 소파에 앉았다. 이미 민우는 그의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어디 해봐라. 무슨 이야기인지 한번 들어나 보게.”
“요즘 연구하기 좀 힘들지 않으세요? 글자도 잘 안 보이실 거 같고.”
“교수가 연구를 안 하면 뭐 하게? 나이 먹었다고 타박하는 거냐?”
“좋은 자리가 하나 있습니다. 선생님께 아주 딱 어울리는 자리죠.”
서지훈 교수는 민우가 뭐 하나 싶었다. 갑자기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면서 좋은 자리가 있다고 하지 않나, 평소와는 좀 달랐다.
“여기보다 더 잘 어울리는 자리가 있다고?”
“그럼요. 교수직은 아니지만요.”
“그게 뭔데?”
“올해 8월에 백성웅 총장 임기가 만료됩니다. 알고 계시죠?”
그 말에 서지훈 교수의 눈매가 좁아졌다. 뜬금없이 총장 임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다.
“선생님. 총장 선거에 한번 나가보시는 건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