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핑 포인트 (2)
면접 전형이 시작된 지 7시간이 지나서야 면접관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끝난 것은 서강일의 팀이었다.
대기실로 나온 서강일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안 쉬고 한 큐에 끝내는 게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네. 후우.”
“으어어어…….”
저질 체력으로 유명한 주예린은 이미 책상 위로 엎어졌다.
원래 중간에 휴식 시간을 넣으려고 했는데, 면접 대기자들을 위해 쉬지 않기로 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강민희가 물었다.
“우리가 제일 먼저 끝났나 봐?”
“뭐, 어차피 민우네 팀은 제일 늦게 끝날 걸 예상하고 있었잖아? 궁금한 게 많은 녀석이니.”
“시간이 얼마나 걸리려나. 배고픈데.”
“가서 메로나라도 사 먹든가.”
“그건 디저트야.”
평소의 강민희였다면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저녁을 먹자고 했을 텐데,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도 휴머니티 프로젝트의 무게감을 잘 아는 거다.
그런 사소한 행동 하나가 팀의 단합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도.
서강일이 기지개를 켜 뭉친 근육을 풀었다. 그리고 말했다.
“연주 씨가 도시락 준비한다고 했으니 다들 끝나면 같이 먹는 걸로 하자. 같이 고생한 건데 우리만 먼저 먹으면 좀 그렇잖아. 어때? 주 선생.”
“전 어차피 지금 죽을 거 같아서 상관없을 거 같은데요…….”
“명복을 비마.”
서강일과 강민희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각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정연주 팀이 들어가 있던 면접장의 문이 열렸다.
정연주와 장철호, 그리고 이유리가 녹초가 된 채로 밖으로 나왔다.
서강일이 일어나 그들을 맞았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서강일 선생님도 고생하셨어요. 그쪽 면접은 어땠어요?”
정연주가 공손하게 물었고, 서강일이 말을 받았다.
“괜찮았습니다. 생각 없이 지원한 사람은 별로 없는 거 같던데요. 대부분 합격시켜도 될 거 같습니다. 그쪽은?”
“저희도 마찬가지였어요. 음, 솔직하게 시간 때우려고 왔다고 말씀하신 분도 계셨는데, 이것저것 배우다 보면 관심이 많아지겠죠.”
“긍정적으로 판단하기로 했으니 그래야겠지요.”
당초 휴머니티는 합격자 선발에 있어 신중을 기하려고 했다. 정말 배움이 필요한 사람들만 뽑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서강일이 반대 의사를 밝혔다.
배움의 기회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배움이 얼마나 필요한지 보는 건 불공정하다는 의견이었다
즉, 배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고 이후에 지켜봐야 하는 게 옳지 않냐는 거다.
서강일은 일단 최대한 많이 기회를 줘야 한다고 강조했고, 일종의 ‘모집단’을 만들어 다음 학기에 피드백으로 활용하자고 말했다.
몇몇 멤버가 회의감을 표했지만 결정적으로 민우와 창립멤버들이 지지하여 안건이 통과되었다.
그래서 큰 무리가 없다면 대부분 합격시키기로 했다.
“이제 진짜 시작된 것 같은 느낌이네요.”
“그러게요.”
뭔가 뭉클한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은 면접을 마치고 돌아가는 지원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보람찬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한참 후, 민우 팀 면접장의 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민우가 걸어 나왔다.
“배고파 죽는 줄 알았다! 요.”
“미안 미안. 어서 올라갑시다.”
민우가 주예린을 진정시키며 앞장섰다. 뒤따라 선 한진섭이 물었다.
“도시락 6층에 있나?”
“어.”
“그런데 왜 도시락이야? 열일했는데 나가서 고기라도 구워야 하는 거 아니야?”
한진섭이 불만을 토로했다. 그나마 탈진한 상태라 격하게 항의하지 못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민우가 타박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열 명이나 되는 자리를 어떻게 예약하냐. 그냥 대충 때우고 집에 가서 치킨이나 시켜 먹어.”
“오, 천잰데?”
한진섭이 입맛을 다시자 옆에서 주예린이 맥주도 같이 시키는 게 어떻겠냐고 대꾸했다.
역시 죽이 잘 맞는 커플이었다.
모두가 6층 교수연구실로 돌아왔다. 그곳엔 유진태 실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별도의 임무를 마친 하지은도 있었다.
유진태 실장이 도시락을 하나씩 꺼냈다.
“다들 애 많이 쓰셨습니다.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했습니다. 어서 드십시오.”
“감사 감사.”
“잘 먹겠습니다!”
크기와 때깔부터가 다른 도시락이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다들 허겁지겁 숟가락을 움직였다.
그러는 와중에 민우는 하지은이 그린 풍경화가 한쪽에 놓여 있는 걸 발견했다.
“우리 지은이 농땡이 피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이야, 다섯 장이나 그렸어?”
“애 취급 좀 그만해줄래? 스케치 정도야 뭐 금방 하니까.”
“잘 그렸네. 실감 난다.”
민우가 칭찬하자 다들 도시락을 든 채로 민우 쪽으로 몰려들었다.
면접 풍경을 그린 그림이 세 장이었고, 휴머니티 캠퍼스 전경을 담은 그림이 한 장, 그리고 오늘 회의 장면이 담겨 있는 그림이 한 장 있었다.
곁에 있던 한진섭이 감탄했다. 아까 서강일이 특별히 부탁할 때는 왜 그러나 싶었는데, 실물을 보니까 생각이 달라진 것이다.
“난 그림 잘 그리는 사람 볼 때마다 신기하단 말이지. 아니 어떻게 하면 이렇게 잘 그릴 수 있어? 난 그려도 졸라맨밖에 안 나와.”
“미대 출신이니까 당연히 잘 그려야지. 국문과 출신이 문장 못 쓰면 좀 이상하잖아?”
“국문과 출신이라고 다 잘 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뭐 그렇다 치고. 액자 주문해야겠네? 바로 걸어도 될 것 같은데?”
그때 유진태가 나섰다.
“이미 액자를 주문해 두었습니다. 아마 내일모레쯤이면 벽에 걸어둘 수 있을 겁니다.”
“역시 실장님이셔. 우리 집에 모셔오고 싶을 정도라니까.”
“얼마면 돼요?”
주예린의 농담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두런두런 모여 식사를 모두 마치고, 면접 피드백과 자리 뒷정리까지 끝낸 멤버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피곤한 만큼 참 길었던 하루였다. 많은 것을 듣고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첫 단추는 잘 끼웠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민우와 이수빈은 돌아가지 못했다.
한진섭이 커피나 한잔하자며 민우를 붙잡은 것이다. 자연스레 주예린도 자리에 합석하게 되었다.
민우가 지나가듯 물었다.
“무슨 일 있냐?”
“그냥 목말라서.”
“목마르면 집에서 물이나 퍼마실 것이지. 지금 커피 마시면 잠 못 잔다.”
“형이 사준다고 할 때 감사히 마셔라.”
“예. 형님.”
어쩌다 보니 모이게 된 원년 멤버들은 근처에 있는 프랜차이즈 커피점에 들러 각자 음료를 시키고 자리를 잡았다.
돌연 한진섭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 또 무슨 속셈이냐?”
“……뭐가?”
“아까 면접장에서 이상한 거 많이 물어봤잖아. 왜 휴머니티에 오게 됐는지는 그렇다 쳐도 대학원에서 느끼는 어려움을 묻는 건 좀 이상해서 말이지. 그건 우리 프로젝트와 크게 상관없잖아.”
“아,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수빈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시 말을 끊었던 한진섭이 조용히 말했다.
“너 또 뭐 꾸미고 있지? 꾸미고 있다에 5백 원 건다.”
“아니 무슨 교수가 쩨쩨하게 5백 원을 걸어? 수표를 걸어야지.”
주예린이 타박하자 한진섭은 억울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여보세요. 한 달 용돈 30만 원으로 어떻게 수표를 겁니까? 쫄쫄 굶으라고?”
“아, 그러네. 인정.”
“…….”
뭔가 슬픈 이야기들이 오간 것 같지만, 한진섭은 주예린을 잠시 밀쳐두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뭐냐니까?”
“자기소개서를 봤을 때 딱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왜, 있잖아. 첫 번째 면접자들. 다들 대학원생들이었지. 이게 우연인가 싶더라.”
민우가 커피잔에 담긴 빨대를 휘휘 저었다. 얼음이 딸깍거리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문사철 대학원생이 연구실이나 도서관이 아니라 왜 휴머니티에 오게 됐을까…… 무슨 이유 때문에…… 그런 생각이 불현듯 들었어. 뭔가 운명처럼.”
“하, 참. 언제부터 운명론자가 된 거야?”
“그냥 비유가 그렇다는 거지.”
민우는 빨대를 입에 물고 커피를 마셨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는 세 사람은 속이 타들어 갔다.
잠시 후, 민우가 빨대를 입에서 뗐다.
“우리는 교수지?”
화두를 던졌다. 한진섭이 받았다.
“직업을 말하는 거라면 맞아.”
“우리는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사람들이잖아. 그런데 오늘 처음 면접장에 들어온 그 다섯 명, 무슨 이야기 했는지 기억나?”
“기억나지.”
하지만 주예린은 아니었다. 다른 면접팀이었으니까. 그래서 민우는 설명을 덧붙였다.
“바늘구멍보다 좁은 일자리, 줄어가는 연구지원금, 생계유지의 어려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가 나왔지.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어. 대학에서 답을 찾지 못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거잖아. 그렇다면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학계에 뭔가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는 거지. 이제 석사과정인 친구들의 입에서 강사법 이야기가 나올 정도면 말 다 한 거 아닌가?”
“하지만 그건 이쪽 분야만의 일은 아니잖아요. 기초학문은 다들 어려우니까.”
이수빈이 지적했고,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대답은 조금 달랐다.
“다들 어렵다고 해서 우리까지 손 놓고 있으면 바뀌는 게 있겠냐.”
“하지만 우리가 나선다고 뭐 달라지는 것도 크게 없을걸.”
“너야말로 언제부터 염세주의자가 된 거야?”
민우가 톡 쏘듯 말하자 한진섭이 면피용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민우가 말했다.
“그래서 학문후속세대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해봐야 한다는 거야. 당장 뭘 할 수 없다는 건 나도 잘 알아. 하지만 이런 고민조차 하지 않는데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까?”
세 사람은 대꾸할 수 없었다.
민우는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누구보다도 가장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평소 그의 지론은 이거였다.
실패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문제다.
“왜 인문학이 대학이나 정부 정책에서 소외되는지는 다들 잘 알잖아. 바로 성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아서 그렇지. 이런 점에서는 기초과학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거야.”
“하나하나, 차근차근 뜯어고쳐야지. 대학은 대학대로, 학계는 학계대로, 정부는 정부대로.”
자리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스케일이 확 커지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건 몰라도 정부 정책을 어떻게 바꾼단 말인가.
한진섭이 진심을 담아 충고했다.
“박민우. 너 정계에라도 진출할 생각이냐?”
“필요하다면.”
“……뭐?”
진섭이 경악했다.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민우는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멀리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이제껏 계속 걸려온 청와대의 전화도 제대로 받지 않았다. 초청이 오더라도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피해오곤 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입에서 정계에 진출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포기해. 정치는 안 어울려.”
“음, 역시 그런가?”
한진섭이 피식 웃었고, 민우도 멋쩍게 웃었다.
“아무도 안 믿어! 넌 다음 생애에도 정치는 안 할 놈이거든. 그렇다면 뭔가 다른 방법을 쓰겠지. 아이디어는 있냐?”
“아직은 없지.”
민우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나 진섭은 안다. 그 솔직함에 숨겨진 그의 저력을. 아직은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해 내는 그런 마법 같은 힘을.
“그래도 절반쯤 왔다고 생각해.”
“뭔가 있구만?”
“근자감.”
“아이 씨!”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잖아. 이제 시작했으니 절반 온 거지.”
두 사람의 너스레에 긴장이 풀어졌다. 다들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어휴, 갈 길이 구만리여. 그래! 민우 말대로 바꿀 거 많지. 그런데 언제 바꿔서 언제 좋은 세상 만드냐?”
“반대로 생각하면 굉장히 즐겁더라고.”
“이 상황에서 즐겁다고? 변태세요?”
“해야 할 일이 그만큼 많다는 거잖아. 보람도 그만큼 많이 쌓이지 않을까.”
한진섭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아.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우리 귀여운 윤아가 아빠는 안 닮았으면 좋겠다…….”
“맞아요. 인정.”
“하하하하.”
민우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윤아가 살아갈 미래를, 지금보다 훨씬 좋게 만들 자신이 있었으니까.
시동은 걸렸다.
이제 달릴 일만 남았다.
민우는 달려나갈 첫 번째 목표를 ‘명인대학교’로 설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