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핑 포인트 (1)
케이크를 입에 넣은 정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휴머니티 프로젝트 면접일이다. 그래서 모든 멤버들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맞아. 내일. 시간 참 빠른 것 같아. 멤버들한테 기획서 돌린 게 엊그제 같은데.”
“200명 넘는 사람들을 모두 살펴보는 게 쉽지 않겠군요.”
물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진태는 만반의 준비를 끝내 놓았다. 그는 대한그룹 소속이다. 200명 정도의 면접자를 다루는 건 일도 아니다.
“힘들겠지. 그래도 기대돼. 우리가 뭔가 모여서 제대로 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잖아?”
“그룹 차원에서 지원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고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는 이번 일을 계기로 좀 아가씨께서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정연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떤 점이?”
“대담해지셨습니다. 예전에는 별일 아닌 것에도 신경을 많이 쓰셨는데, 이렇게 보란 듯이 그룹의 지원을 받아내셨잖습니까? 이제는 사업가가 다 되신 것 같네요.”
정연주는 포크로 케이크를 뜨며 미소를 지었다.
“그야, 할아버지께서 날 예뻐해 주시니까. 일을 잘해서라기보다는…….”
“일 잘하시는 거 맞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일 잘한다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았다. 설령 가까운 사람이 해준 말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럼요. 요즘 제가 일하기가 많이 편해졌거든요. 아가씨께서 잘 정리해 주신 덕분이죠.”
“고마워.”
“제가 더 감사합니다.”
케이크를 음미하던 정연주가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자기가 고맙다고 표현하는 건 당연한데, 왜 그는 자신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걸까.
생각해 보니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 같다. 늘 그는 자신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왜?
주는 것보다 받는 것에 익숙했던 연주로서는 쉽게 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두 사람이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참, 그런데 드라마 <프로페서> 말입니다. 거기에 아가씨도 나오는 거지요?”
“응? 아, 나온다고 들었어. 전에 작가들이 와서 미팅했었거든. 어느 정도까지 반영해도 되는지 묻더라고.”
“희한한 드라마네요. 보통은 그렇게 똑같이 하려고 하지 않을 텐데.”
턱을 괸 유진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일반적인 드라마 포맷은 아니다.
그것에 대해 정연주가 설명했다.
“감독님이 평범한 드라마보다는 의미 있는 내용을 담고 싶다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자서전을 베이스로 삼은 거래. 가능하면 현실에 있는 내용을 많이 가져가 쓰신다고 했어.”
“그렇군요. 그럼 혹시…… 저도 나옵니까?”
“유 실장이?”
검지를 입술에 대며 생각에 잠긴 정연주가 어색하게 웃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의미였다.
“미안. 잘 모르겠는데. 민우 오빠한테 한번 물어볼까?”
“예.”
핸드폰을 쥔 연주는 바로 민우에게 카톡을 보냈다. 별일 없냐고, 그리고 혹시 드라마에 유진태 실장 역도 출연하냐고.
민우는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 연주는 고맙다고 답장하고 유진태에게 말했다.
“출연한대. 생각보다 비중이 커서 반응이 좋을 거라고 기대하라고 하는데?”
“그렇군요. 확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진태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정연주는 그런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오늘 좀 많이 이상한데.”
“뭐가 말입니까?”
“안 하던 짓을 너무 많이 해서. 케이크도 그렇고, 평소였다면 내가 물어봐 줄까? 하고 물으면 아니 괜찮습니다. 라고 대답했을 텐데.”
“매번 같으면 재미없지 않습니까. 저는 아가씨 곁에서 오래 일하고 싶어서 말이죠. 열심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흠…….”
정연주는 미심쩍은 표정을 했지만,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때 유진태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케이크를 가리켰다.
“그런데 케이크가 좀 부족했나 봅니다. 다음엔 홀케이크로 사 와야겠군요.”
“앗,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얼굴을 붉힌 정연주가 재빨리 포크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릇 위 케이크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
다음 날.
휴머니티 캠퍼스에 사람들이 하나둘 몰리기 시작했다. 일부 장난스러운 자기소개서를 걸러내도 면접 대상자는 200명이 넘었다.
거기에 면접에 뜻이 없는 여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들기도 했다.
홍보대사인 허윤이 혹시 나타나지 않을까 기대심에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민우와 동료들은 학생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방해되지 않는 선이라면 건물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열어주었다.
어차피 그들이 원하는 허윤은 이곳에 없으니 말이다.
들어와서 책이라도 읽으면 더 좋고.
도서관은 이미 가오픈되어 원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었다.
한편, 휴머니티 캠퍼스 6층에서는 한창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캠퍼스가 정식으로 오픈한 뒤 맞이한 첫 회의였다.
내부 인테리어는 생각 이상으로 멋지게 완성되었다. 깔끔하게 탁 트인 느낌이 상상력을 자극했다.
무엇보다도 독특한 점은 파티션 하나 없는, 완벽히 열린 공간에서 모두 모여 일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캠퍼스 6층은 세미나실과 교수연구실이 위치한 층이다.
원래는 개별 연구실을 제공하려고 했으나, 민우가 아이디어를 냈다. 모두 벽을 터서 한 공간에서 모여 일하자고 말이다.
멤버들은 실제로 연구실을 보게 되니, 민우가 왜 그렇게 제안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럼 마지막으로 면접에 대해 좀 이야기를 해봅시다. 개인적으로 다들 준비를 해 왔을 건데, 내가 생각한 안을 한번 이야기해 볼게요.”
새롭게 휴머니티의 지휘봉을 잡게 된 서강일은 수첩과 볼펜을 쥐고 말을 계속했다.
정연주의 오피스텔에서 모일 때는 서로 반말을 했지만, 앞으로 회의에서만큼은 서로 존칭을 쓰기로 했다. 서강일의 제안이었다.
“총 세 팀으로 면접팀을 나눠서 다섯 명씩 지원자를 면접하자, 이런 이야기로 굳어졌었는데 이 안건으로 진행했으면 합니다. 굳이 교차 면접을 하지 않고 서로의 안목을 믿어봐도 좋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모두 찬성표를 던졌다.
현실적으로 한 명씩 불러다 놓고 면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기에 모든 면접관이 한 면접장에 들어가는 것도 효율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나온 안건이 팀으로 쪼개 따로 면접을 보자는 것이었다.
서강일이 계속 말했다.
“그럼 팀 인선을 발표합니다. 면접관 1팀은 박민우, 이수빈, 한진섭. 그리고 2팀은 서강일, 강민희, 주예린. 3팀은 정연주, 장철호, 이유리…… 이렇게 하면 하지은 씨는 스페어가 되는데, 제가 심심하시지 않게 특별히 임무를 드리죠.”
“뭔가 왕따가 된 기분이지만, 말씀하세요.”
“외부 행사 지원 겸 면접 풍경 스케치. 가능하겠습니까?”
“풍경 스케치를요?”
서강일이 두 팔을 벌리며 호기롭게 말했다.
“휴머니티의 공식적인 첫 행사인 만큼 기념으로 담아두고 싶네요. 그림 같은 건 벽에 걸어둘 수 있으니 인테리어 아이템으로 쓰기도 좋고. 사진으로 찍는 건 좀 식상하니까요.”
“음, 아쉽네. 압박 면접 좀 해보려고 했는데. 알았어요. 한번 해보죠!”
서강일은 메모로 뭔가를 기록했다. 그리고 팀원을 둘러보았다.
“혹시 조 편성이나 다른 부분에서 이의 있는 분 계십니까?”
“역시 팀장이 바뀌니까 조직이 새로워지는 느낌인데? 활기찬 느낌이네요. 아주 좋아.”
한진섭이 흡족한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직에 새로운 기운이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민우는 이수빈과 눈을 마주치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뭐랬어? 이런 느낌으로.
서강일이 회의 안건을 최종 정리하며 당부했다.
“그럼 조교님들. 면접 진행 잘 부탁드립니다. 사전에 지시한 대로만 하면 크게 문제없을 겁니다.”
“예.”
이번에 새롭게 채용한 행정조교 세 명이 믿음직스럽게 대답했다.
곧 하지은이 행정조교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서강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우리도 슬슬 움직입시다.”
“다들 고생해요.”
“이따 봐요!”
모두가 결연한 마음으로 면접장으로 들어갔다. 민우는 한 팀이 된 한진섭, 이수빈과 함께 움직였다.
“아, 뭔가 대학원 면접 때 생각 나네.”
자료를 정리하며 한진섭이 중얼거렸다. 민우와 이수빈이 따라 웃었다.
“기적적으로 합격한 바로 그 순간 말이냐?”
“아니 뭘 또 그걸 기적이라고 말해? 그냥, 공부를 더 하려고 면접 보는 게 흔한 경험은 아니잖아. 오늘 면접 보러 오는 사람들도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싶어서.”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다들 취업하려고 면접을 볼 텐데.”
“어떤 의미에서는 더 중요한 면접이 되지 않을까.”
민우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의미심장하게 들려서, 이번엔 한진섭과 이수빈의 시선이 민우를 향했다. 어느새 민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력서를 전부 봤는데, 생각보다 절박한 사람들이 많이 보이더라. 취업의 문제가 아니라 계속 공부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친구들이 많았어.”
특히 한진섭은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석사 시절에 포기할까 생각도 많이 했으니까.
“‘인구론’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잖아. 거기에 석박사라도 달아버리면 사회에서 잉여가 된 느낌이고. 앞으로 갈 길이 멀다.”
한진섭이 현실을 말했다. 민우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갈 길이 멀다는 말만 하고 손 놓고 있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우리는 정년 보장을 받았잖아. 그래서 조금 나태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두 사람에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어떻게 보면 민우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같은 것이기도 했다.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하루 이틀 생각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세 사람이 한창 자료를 살펴볼 무렵, 문이 열리며 행정조교가 안으로 들어왔다.
“밖은 준비 모두 끝났습니다. 면접 시작해도 괜찮을까요?”
“진행하세요.”
민우가 허락했고, 행정조교가 순서대로 정리된 자기소개서를 면접관들에게 배부했다.
맨 위에 놓인 다섯 부의 지원서를 차근차근 살펴보던 민우의 눈에 순간 이채가 돌았다.
‘우연인가? 아니면…….’
곧 면접장으로 다섯 명의 지원자들이 들어와 자리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들어온 지원자들이 착석하기 전에 정중히 인사했다. 민우와 동료들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정장을 입고 온 지원자도 있었고, 캐주얼하게 입고 온 사람도 있었다.
민우가 먼저 운을 뗐다.
“면접을 시작하기에 앞서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지원자들이 긴장하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민우는 포근하게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지금 여기에 앉아 계신 다섯 분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민우의 한마디에 지원자들이 좌우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공통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성별이 모두 같은 것도 아니었기에.
“바로 대학원생이라는 점입니다. 거기에 전공도 비슷해요. 모두 문사철이네요.”
“아…….”
지원자들이 살짝 놀랐다.
그건 한진섭과 이수빈도 마찬가지였다. 그 짧은 사이에 두툼한 이력서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내다니.
“그래서 이번 면접은 조금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왜 휴머니티에 오게 됐는지, 그리고 학문을 하는 것에 있어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진솔하게 말씀해 주시는 자리가 되었으면 하네요. 편하게요.”
민우는 면접을 시작하면서, 또 다른 계획을 동시에 구상하게 됐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어떤 문인의 말을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