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44화 (344/500)

선샤인 스튜디오 (2)

‘조희진과 나유미 역이라…….’

민우는 이미 머릿속에 모든 캐스팅 리스트가 정리되어 있었다.

‘조희진’은 실존 인물인 정연주를 모델로 한 캐릭터다. 재벌가의 일원이고 대한그룹이 드라마 제작에 관여되어 있어서 이름을 완전히 바꿨다.

단순히 이름만 바뀐 게 아니라 진취적인 커리어 우먼으로 재탄생했다.

과학고 출신의 천재적인 재능으로 수완을 보이면서, 다른 쪽으로 작중 주인공인 박진수를 도와준다는 설정이다.

여기에 로맨스 코드를 가미하겠다는 것.

반면 나유미는 가상의 캐릭터다.

민우와 비슷하게 타대학생 출신으로 설정되었고, 민우와 비슷한 포지션에서 공감하며 함께 성장하는 그런 캐릭터였다.

‘서사만 놓고 본다면 나유미가 유리한 면이 있긴 해.’

왜냐하면 명인대 출신과 비명인대 출신이라는 대립구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비슷한 입장에서 서로 교감할 수 있는 설정도 매력적이다.

민우는 문득 웃음이 나왔다.

한정현 감독이 그 웃음을 포착하곤 씨익 웃었다.

“역시 많이 곤란하신 것 같네요. 와이프분 눈치도 좀 봐야 하는 상황이니.”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내용을 보니 문득 제 주변에 여자들이 많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어요. 그래서 웃음이 나왔네요.”

“아, 맞아요. 상당히 많은 편이죠! 사전 인터뷰에서 와이프 분께서도 좀 서운한 부분이 있으셨던 모양이에요. 비슷한 말씀을 하셨었죠.”

“그래요?”

“네!”

한정현 감독은 이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 민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색하지 않은 이수빈의 배려심에 고맙기도 했다.

곧 민우가 결정했다.

“조희진으로 가겠습니다.”

한정현 감독과 소민정 작가가 서로 한 번 바라보더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유미를 택하실 줄 알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아아, 오해는 마십시오. 안 된다는 게 아니고, 그냥 의견 청취니까.”

“말씀을 들어보니 나유미로 내정된 것 같은데.”

“일단 의견은 그렇게 모았습니다. 초반 감정선을 이어나가기가 나유미 쪽이 좋으니까요.”

하지만 민우는 생각이 좀 달랐다. 그들이 볼 수 없는 비밀을 하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희진 쪽이 후속 스토리가 잘 나올 거예요. 후속이라기보다는 서브 스토리라고 해야 하려나.”

“으음. 그러니까 초반보다 중반 이후의 전개가 더 좋을 거라고 보시는 거군요?”

“맞습니다. 조희진 옆에는 늘 충실한 비서실장이 있지 않습니까? 둘 맺어주면 시청자들 반응 좋을 겁니다. 장르적으로 역비서물이 되긴 하지만, 어차피 서브 스토리니까 상관없겠죠.”

“괜찮네요. 소 작가는 어때?”

“어…….”

소민정 작가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명확한 장면이 떠오르자 눈을 빛내며 노트북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본 한정현 감독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사인이었다.

사실 이것도 지극히 현실반영이었다.

민우는 유진태 실장이 옛날부터 정연주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나마 간접적으로 도와주려고 한 것이다.

물론 주변 사람들이 묻는다면 우연의 일치라고 둘러댈 생각이었지만.

주요 출연 인물들에게는 어떻게든 포장해도 좋으니 자유롭게 연출을 해달라고 허가를 받은 상황이라, 민우는 마음 편히 결정할 수 있었다.

“될 거 같아요. 구도가 잡혀요. 좋은데요?”

소민정 작가가 간만에 미소를 짓자 한정현 감독이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가시죠. 수정엔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이틀만 주세요.”

“오케이. 한번 가보자고.”

회의가 끝났다.

소민정 작가는 먼저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작업실로 돌아가서 바로 작업을 한다고 한다.

남은 건 민우와 한정현 감독이었다.

“역시 박 교수님이 와 주셔서 다행입니다. 소 작가가 그렇게 확신에 차서 말하는 거 오랜만이네요.”

“좋은 선택이었을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박 교수님은 소설은 안 쓰십니까? 시나리오나. 다른 교수님들은 작품활동 하는 분들이 많은데, 박 교수님은 작품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요.”

“사연이 좀 있죠.”

민우의 말에 한정현 감독이 몸을 가까이하며 집중했다.

“제가 하고 있는 다른 일 때문인데요. 번역 작업 때문에 글을 쓰지 않아요.”

“번역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있죠. 번역은 제2의 창작이니까요. 그러다 보니 번역이 아니라 가끔은 내가 소설을 쓰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굳이 창작을 해야겠다, 이런 생각은 안 했던 것 같아요.”

“그렇군요. 그럼…….”

잠시 말을 줄인 한정현 감독이 눈을 빛내며 은근히 물었다.

“이 기회에 작품 하나 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제가요?”

“방금 보니까 그런 확신이 들었습니다. 스토리를 짚어내는 감각이 뛰어나시니까, 좋은 시나리오를 쓰실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글쎄요. 역시 좀 자신이 없네요. 제 주변에 워낙 유명한 작가가 하나 있다 보니.”

“주예린 작가 말이죠?”

“맞습니다.”

한정현 감독이 크, 하며 탄식을 내뱉었다.

“저도 주예린 작가님하고 한번 웹플릭스 공략해보고 싶은데 말이죠. 도통 기회가 오질 않아서.”

“판타지를 주로 쓰니까 제작비가 많이 나올 겁니다. 대부분 CG 처리를 해야 하니까요.”

“그게 문제죠. 투자처만 찾을 수 있다면 근사한 작품 하나 만들 텐데…….”

하지만 쉽지 않을 거다. 이미 주예린은 센트럴 북스와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녀의 원작은 대부분 센트럴 북스의 모기업에서 영화로 제작 중이다.

“아, 박 교수님. 이럴 게 아니라 잠깐 나가서 배우들하고 인사나 좀 하시죠? 앞으로 종종 볼 사이일 텐데요.”

“다들 촬영 중이라 좀 예민하실 텐데 괜찮을까 모르겠네요.”

“하하하. 걱정하지 마십쇼! 이 드라마의 진짜 주인공은 허윤 배우가 아니라 박 교수님이니까.”

의미심장한 한마디와 함께, 한정현 감독은 민우를 데리고 스튜디오로 향했다.

마침 배우들이 투입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배경은 연구실이다. 정확히는 인문관 301호를 그대로 본떠 온 것 같다. 박진수와 이수연, 그리고 한준섭이 모여 있었다.

감독이 나타나자 배우들이 웃으며 인사했다.

“자자, 잠시 촬영은 접고 인사들 하지. 이쪽은 박민우 교수님이야.”

“어머,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이수연과 한준섭 역을 맡은 배우들이 반갑게 인사했다. 허윤은 늘 보던 사이라 손을 흔들 뿐이다.

민우가 가까이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뵈니 뭔가 기분이 묘하네요. 드라마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더 잘 부탁드려야죠! 그나저나 실물로 뵈니 정말 훤칠하신데요?”

김보영이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칭찬을 이어갔다. 허윤이 대열에 합류하자, 또 다른 팀 307호 느낌이 났다.

‘캐스팅을 정말 잘했네. 왠지 성격이 다들 비슷한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민우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괜찮으시면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요? 와이프가 좋아할 거 같아서요.”

“좋죠!”

“조감독님! 사진 좀 찍어주세요!”

김보영의 호출에 단번에 달려온 명이랑 조감독이 민우의 핸드폰을 받았다.

민우가 가운데에 섰고, 우측엔 김보영이 가까이 붙었다. 좌측에는 허윤이 섰고, 한준섭 역을 맡은 오정서가 엉거주춤 서서 구도를 잡았다.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찰칵!

기념할 만한 사진이 핸드폰에 담겼다. 민우는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자자, 박 교수님. 주연 배우들한테 한 말씀 하셔야지?”

“아유, 제 깜냥에 무슨 말을 하나요. 다들 유명한 배우님들인데.”

그때 김보영이 나서서 민우의 팔을 친근하게 잡았다.

“그러지 말고 한 말씀 해주세요~ 이제 작품 막 시작했는데 교수님 응원이 더해지면 힘이 되지 않을까요?”

그러자 허윤도 민우의 반대편 팔을 붙잡았다.

“에헤이! 뺄 자리가 아니라니까요. 형님이 금과옥조 같은 한마디를 해주셔야지. 그러려고 교수하시는 거잖아요?”

“하하하하!”

스태프들의 웃음보가 터졌다. 어쩔 수 없이 민우가 주먹을 말아쥐고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지금 여러분과 제가 서 있는 이 공간은 제가 석사 시절을 보냈던 곳입니다. 그곳과 무척 닮아 있어요. 분위기도 그렇고. 옛날 생각이 많이 나네요.”

세트장 주변을 둘러보던 민우가 배우들을 응시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이 연기하는 캐릭터도 마찬가집니다. 다 제 소중한 인연들이죠. 소중한 추억을 공유하는 소중한 인연들이요.”

민우가 추억과 인연을 강조했다. 배우들이 잔잔히 웃으며 그 말을 되새겼다.

“그 추억을 또 다른 방식으로 기억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품 잘 부탁드려요. 멀리서나마 응원하겠습니다.”

허윤을 시작으로 배우와 스태프 모두가 손뼉을 쳤다. 민우는 멋쩍게 웃으며 다시 한번 인사한 뒤 무대를 내려왔다.

“형! 다음에 보영 누나랑 정서 형이랑 같이 술 한잔해요! 형님이랑 술 한잔하는 게 꿈이래요!”

허윤이 외쳤다.

술 한잔쯤이야. 민우는 손가락으로 동그라미 사인을 보냈다.

배우들과 친분을 쌓고 싶어서 수락한 건 아니다.

다만 주연들과 친해지면, <프로페서> 드라마의 주인공인 허윤의 입지가 좀 더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민우의 배려였다.

민우가 무대에서 내려오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게 프로의 세계구나.’

배우들은 다시금 동선과 대사를 점검했고, 카메라와 각종 장비가 스태프의 손에 이끌려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니터를 체크하던 한정현 감독이 다가왔다.

“교수님. 이제 바로 들어가십니까?”

“예. 연구실로 가야죠. 시험이 끝나긴 했는데 여전히 바쁘네요.”

“이거 아쉽네. 현장을 좀 더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오늘만 날은 아니잖습니까. 다음에 또 보러 오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쇼!”

민우는 한정현 감독과 가볍게 악수한 뒤 스튜디오를 나섰다.

‘먼저 돌아간 건가? 안 보이네.’

민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까만 해도 하이에나처럼 이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김명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민우는 신경을 끊고 스튜디오를 나섰다.

스튜디오 앞 대로변에서 레아가 차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었다.

***

원목으로 된 근사한 문을 열고 유진태 실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작은 박스가 들려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아가씨.”

“요즘 바쁘네?”

책상에서 업무를 보던 정연주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유진태가 가까이 다가왔다.

“본사에 좀 일이 있어서 말이죠.”

“역시 유 실장 공백이 좀 큰가 봐. 유능한 사람이니까 당연하다 싶어도, 할아버지가 왜 갑자기 이쪽으로 보냈는지 도통 모르겠다니까.”

“제가 본사로 가는 게 좋으십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정연주가 살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상자 안에 들어있던 조각 케이크가 유진태 실장의 손에 들려 있다.

뭔가 마술을 본 것 같은 느낌에 정연주가 웃었다.

“오다 주웠습니다.”

“하하하하. 뭐야, 그게.”

“당 떨어질 시간이잖습니까.”

“그렇긴 해.”

작게 한숨을 쉰 정연주가 서류를 옆으로 밀어냈다. 유진태 실장은 그 빈자리에 케이크와 플라스틱 포크를 놓았다.

비서가 아니라 집사 같은 느낌.

정연주가 포크를 쥐며 물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소리야? 본사로 가는 게 좋겠냐니.”

“보통은 아끼는 비서가 있다면 다른 곳으로 발령 나는 걸 막지 않습니까? 만화나 드라마를 보면 흔한 일인데요. 그런데 아가씨는 뭔가 본사 걱정을 하시는 거 같아서 말입니다.”

“아…… 그런 게 아니고.”

곰곰이 생각하던 정연주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말실수했나 봐. 미안해.”

“좀 예뻐해 주십시오.”

“오늘 왜 그래? 평소 유 실장답지 않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하네.”

아가씨가 웃는 모습이 좋으니까요.

그 말은 속으로만 말하고, 겉으로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다.

“그나저나 내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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