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43화 (343/500)

선샤인 스튜디오 (1)

“뭐가 있는 학회로 만든다라…… 하하하. 그 대책 없는 자신감은 여전하구나.”

최민식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민우의 패기에 졌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방금 한 말에 잘못된 표현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대책 없는 자신감이라는 표현은 좀 정정해야겠군. 이제 너도 학계의 스타니까. 네가 손을 좀 쓴다면 학회를 일으키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실제로 민우가 요청만 한다면 논문을 보내올 학자들은 줄을 설 것이다. 명인대 교수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요청을 거절할 만큼 안목이 없는 사람은 적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은 민우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단순히 도와드리고 싶어서 학회에 논문을 보내는 건 아닙니다.”

“그럼?”

“어차피 쑥쑥 자랄 학회라고 생각해요. 형님은 물론 믿음직한 선배님들이 계시니까. 그래서 논문을 드리고 싶었어요. 왠지 옛날 생각이 좀 나서요.”

“옛날 생각이라면, 대학원 때?”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석사 때 선배들하고 같이 학회에도 나가고, 이것저것 준비하던 시절이 좀 그립더라고요. 요즘은 어딜 가나 대우가 좋아서.”

민우의 말에 최민식이 팔짱을 끼며 피식 웃었다.

“야, 지금 내 앞에서 자랑하는 거냐?”

“하하하. 자랑이라뇨. 그냥 그렇다는 거죠.”

민우는 특급 게스트다. 문학과 사학, 철학은 물론 광범위한 인문학 관련 분야에서 그를 초청하려고 열의를 보이고 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옛날에 고생했던 시절이 떠오른 것이다.

“너도 나이를 먹긴 했나 보네. 옛날 타령을 하는 걸 보니.”

“그런가요?”

“좀 주의할 일이기도 해.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다는 의미이기도 하거든.”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우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다. 그는 스스로가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번 일은 쉼터를 만드는 것과 같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떨어져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뭐 어려운 일 있는 건 아니지?”

“아직은 괜찮아요.”

“아직은 괜찮다는 건 앞으로는 생길 수 있다는 말이네.”

민우는 바로 답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최민식의 말대로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은 무수히 많이 나타날 것이다.

김명현과의 대립, 얼마 후에 다가올 총장 선거. 또한 인지하지 못한 휴머니티의 문제 등. 앞길을 가로막을 장애물들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어려운 일이 생기더라도 지금처럼 헤쳐나가 보려고요. 제 신념에 근거해서요.”

“그래. 응원하마.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하고. 예전에는 단순히 대학 선배였지만, 이제는 가족이잖아?”

“하나 빼먹으셨습니다. 공저자이기도 하죠.”

“아아, 그러네.”

연구실 한쪽에는 최민식에게 명예를 안겨준 명저, <신화와 인간: 소설의 신화적 상상력>이 잘 전시되어 있었다. 바로 민우와 공저로 출간한 저서다.

석사 시절 민우는 최민식에게 극적인 순간을 여러 번 제공했다. 한 몸 불살라 누나와 인연을 만들어줬고, 또 박사논문의 핵심 이론을 찾아주기도 했다.

이런 끈끈한 관계가 모여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단순히 명인대 선후배 사이라는 말로는 정의할 수 없었다.

“아무튼 네가 도와준다니 든든하다! 재환이 형이 이 소식을 들으면 무척 좋아하겠어.”

“예진 선배도 좋아하지 않을까요?”

“글쎄. 그건 봐야 알겠지. 하늘 같은 정교수님께 어떻게 잡일을 시킬 수 있냐고 할 거 같은데?”

왠지 투덜거리는 강예진의 모습이 상상되는 바람에 민우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 소식은 바로 두 선생들께 전하마. 원고는 언제 줄 수 있어? 재촉하는 건 아니고, 편집 스케줄에 좀 참고하려고.”

“다음 주면 완성본 드릴 수 있어요.”

“그럼 특별 게재로 바로 승인하는 방향으로…….”

“아뇨. 다른 논문처럼 심사해 주세요. 과정은 공평해야죠.”

최민식은 또다시 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원하는 대로 해주마. 하지만 너희 둘 모두 필치가 특별하니, 아마 심사하는 사람들이 쉽게 건들진 못할 거야.”

“거기까진 제가 어쩔 수 없죠.”

그러다 민우는 문득 예전에 민영환 교수와 이야기를 나눴던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민영환 선생님 쪽 학회는 어떻게 됐어요? 그때 민 선생님이 세 분 이사진 후보로 생각하고 계시던데.”

“음, 정중히 거절했다. 우리도 그때 막 학회를 시작하던 차여서. 겸직을 하는 건 보기 좋지 않으니까.”

“그러셨군요. 민 선생님이 좀 서운해하셨을 거 같은데.”

“그래서 다음에 술자리 한번 마련하려고. 마침 말 잘했네. 너도 참석해라.”

“앗. 아아…….”

민우는 괜히 이야기를 꺼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 자리에서는 막내였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대학원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서.

***

선샤인 스튜디오에는 촬영이 한창인지 스태프들이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휴식을 취하고 있는 배우들의 모습이 보였다.

주연인 허윤은 물론, 파트너 역을 맡은 김보영의 모습도 보였다.

특히 김보영은 팬 가상 캐스팅에서 압도적인 표를 받을 만큼 이수빈의 이미지를 잘 소화하고 있는 배우이기도 했다.

나머지 배우들도 소개받지 않아도 누가 누구 역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번 캐스팅에는 실제 인물의 성격과 풍기는 분위기를 중점적으로 봤다고 하니, 비슷하게 보이는 건 무리가 아닐 거다.

‘쉬는데 인사하는 건 좀 실례겠지?’

민우는 일단 인사는 접어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와 있구나.’

카메라 뒤쪽으로 김명현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조감독 명이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손짓으로 무대를 가리키며 쉴 새 없이 말하는 걸 보니 소품에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민우가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두 사람이 대화를 끊고 민우를 맞았다.

“아, 교수님.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이군요. 박 교수님.”

역시나 김명현은 민우를 보며 씨익 웃었다. 전형적인 승자의 미소였다.

“휴머니티 론칭 축하드립니다. 지원자가 생각보다 많았다면서요?”

“숫자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진 않습니다. 지금은 어떤 분들과 함께하게 될지만 생각하고 있네요. 아무래도 실장님 프로그램과는 좀 궤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김명현이 알만 하다는 듯 불쾌한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민우는 진심으로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김명현이 말했다.

“명인대 프로그램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진화할 겁니다. 얼마 전에 학제 간 프로그램도 신설했고, 정원도 늘려나갈 계획이지요. 교육계는 곧 우리 명인대를 주목할 겁니다.”

“아, 네.”

민우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하자, 김명현이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환영식 축사 준비는 어떻게 잘되어 가십니까?”

“축사 정도야 늘 하는 일이니까 크게 준비할 게 있겠습니까. 어차피 저도 비슷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으니, 해줄 말들이야 많죠.”

“인문대학장님께서 따로 연락을 드린 걸로 알고 있는데요.”

역시 중간에서 개입한 게 바로 너구나. 하긴, 총장이 바로 지시하기엔 볼품이 없는 일이긴 했지.

민우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어 싱긋 웃으며 김명현을 바라보았다. 김명현은 엘리트고 사람을 많이 상대해봤지만, 지금 민우의 표정은 읽기가 힘들었다.

“맞아요. 연락까지는 아니고. 메일을 한 통 보내셨더라고요. 축사에 참고하라고 보내셨는데, 그냥 연설문을 통째로 보내셨지 뭡니까. 난감하네요.”

“학계에서의 명성은 모르겠지만 인문대학장님은 경험적인 면에서 훌륭한 분 아니겠습니까. 잘 참고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건 제가 결정할 문제죠.”

민우가 선선히 대응하자, 김명현의 눈꼬리가 한차례 떨었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명이랑 조감독은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갔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김명현이 다소 무례하게 말했다.

“저는 지금 명인대 교육개발실장의 자격으로 조언드리는 겁니다. 너무 쉽게 듣지 않으셨으면 하는데요.”

“저는 국민훈장을 수상하며 대통령 앞에도 서 봤고, 맨부커 인터내셔널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으며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 이상의 경험이 필요할까요?”

“……아무래도 그럴 만하죠. 박 교수님께서는 뭐랄까, 윤리적으로 좀 문제가 될 소지가 있지 않습니까?”

이번엔 민우의 눈썹이 떨렸다.

“윤리적으로요?”

“이런, 기분이 나쁘셨나 보군요. 좀 정정하지요. 도의적이라는 표현으로. 어쨌든 궤가 다르다고 하셨지만 경쟁 프로그램의 주도자 아니십니까. 그러니 딴소리가 나올까 걱정하시는 거겠지요.”

역시 김명현은 예상하고 있었다. 민우가 축사를 빙자해 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까 하는.

물론 민우도 그가 예상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웃을 수 있었다.

“아,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얼마 전까지는 제가 주도자였죠.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휴머니티의 팀장 자리에서 내려왔습니다. 다른 분께서 앞으로 휴머니티를 이끌어 가실 예정이지요.”

“뭐라고요?”

그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김명현이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게 누구입니까?”

“뭐 곧 공지가 나갈 테니 미리 말씀드려도 상관은 없겠네요. 한일대의 서강일 교수가 맡게 됐습니다.”

“서강일 교수……?”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김명현의 표정이 의아함으로 물들어갔다.

민우는 그 순간 느낄 수 있었다.

김명현이 휴머니티를 흔들기 위해 어떤 패를 쥐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품속에 숨기고 있던 그 패는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다고.

“너무 놀라시는 것 같은데. 무슨 계획이라도 세우고 계셨던 모양이네요.”

“하하하. 그럴 리가요. 마음속으로 휴머니티를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뭐랄까, 배다른 형제 느낌 아닙니까?”

“배다른 형제라…… 그렇군요.”

김명현의 표정이 바뀌었다.

의아함이 사라지고, 이제는 어느새 흥미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가 기대됩니다. 박 교수님께 행운이 함께하길.”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기고 김명현이 자리를 떠났다.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그의 품에는 이미 새로운 패가 들어가 있었다.

***

김명현과 이야기를 마친 민우는 바로 회의실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한정현 감독과 소민정 작가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박 교수님! 하하하. 잘 지내셨습니까?”

“오랜만입니다. 감독님. 그리고 작가님. 저는 잘 지냈는데 요즘 많이 바쁘시죠?”

“어휴, 말도 마세요. 하루하루가 지옥입니다.”

확실히 한정현 감독은 좀 피곤해 보였다. 지금 촬영이 한창이니, 스태프들은 대부분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배우들하고 인사는 좀 하셨습니까?”

“아뇨. 다들 좀 쉬시는 것 같아서 다음에 기회가 될 때 해보려고요.”

“역시 배려심의 아이콘! 이따 회의 끝나고 제가 챙겨드리겠습니다. 일단 앉으시죠! 논의 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민우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소민정 작가가 수정 이슈가 담긴 대본을 민우에게 내밀었다.

민우가 대본을 검토하는 사이 한정현 감독이 설명을 붙였다.

“아무래도 여주인공의 경쟁자가 없는 것 같아서, 극이 심심한 느낌인데요. 삼각 구도를 만들자는 의견이 있어서 말이죠.”

“소 작가님 의견입니까?”

“예.”

이번엔 소민정 작가가 대답했다. 로맨스 코드를 강화한다는 대전제가 성립된 상황이라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민우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저는 괜찮은데, 문제는 누구로 경쟁시킬까 하는 문제가 남네요.”

“그렇죠. 이게 아무래도 현실 기반의 드라마다 보니 감정을 연출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좀 후보군을 추려봤는데…….”

안 그래도 민우가 막 여주인공의 경쟁자로 설정된 배역을 읽고 있었다.

후보군은 두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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