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42화 (342/500)

누구에게나 가능성은 있다 (3)

깜짝 놀란 서강일이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는 여전히 자신이 지목당했다는 걸 믿지 못했다.

‘팀 307호’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그런 가벼움과는 거리가 먼 단체다.

소속 멤버들은 적어도 각 분야에서 명망이 높은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이끌어야 하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서강일은 납득하지 못했다.

“왜 하필 나야?”

“너라면 잘 해낼 것 같아서.”

민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모든 팀원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수빈을 제외하고는.

“하지만 민우 네가 만든 팀이잖아? 네가 팀장에서 내려오는 건 좀 상상하기 어려운데.”

“팀을 나가겠다는 게 아니라 관리자에서 물러나겠다는 거야.”

“그래도 상징적인 의미라는 게 있잖아. 너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우가 이어 나올 말을 끊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철호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표정은 확고해 보였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지금까지 나는 몇몇 단체를 만들었었어. 대표적으로 폴라리스가 있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더 이상 그곳의 회장이 아니야. 그냥 창립자로 남아 있어. 그렇다고 폴라리스가 망했나? 아니, 오히려 방향을 잘 선회해서 더욱 영향력 있는 조직이 되었지.”

폴라리스는 이제 국제번역기구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각 국가에 지부를 설립하고 비영리기관으로서의 모범을 보이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이것이 민우가 뿌린 씨앗이라고 했으나, 민우는 동의하지 않았다.

새로운 물결이 새로운 양상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단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폴라리스 회장직에서 물러난 것처럼 지금도 그렇게 하려는 거야. 아무래도 사람이 볼 수 있는 시야엔 한계가 있거든.”

“너한테 한계라는 게 있었냐?”

한진섭이 항의하듯 물었고, 민우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면 굳이 너희들과 함께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나는 평범한 사람이거든. 생각해 봐. 간단하잖아. 지은이는 휴머니티에서 미술 강의를 하게 됐어. 내가 더 잘할 수 있나? 없지. 그렇다고 인간과 과학이라는 테마로 강의하는 연주를 대신할 수 있나? 없어.”

민우의 표정은 확고했다. 팀원들은 이미 민우의 박력에 말려들고 있었다.

“굳이 열거하지 않아도 각자 잘하는 분야가 있는 거 알잖아. 팀 운영도 크게 다르지 않지. 그렇다면 오히려 돌아가면서 관리자가 되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수빈이 넌 어떻게 생각해?”

한진섭이 물었다.

민우와 한진섭, 그리고 이수빈 이 세 사람이 창립 멤버였다. 그래서 다른 멤버들이 묻는 것보다 더욱 무게가 실렸다.

요컨대 민우가 대표이사라면, 한진섭과 이수빈은 이사진인 것이다.

이수빈이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우리 오빠 마음먹으면 끝까지 달리는데 내가 어떻게 막겠어요?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야지. 난 찬성이요.”

“들었지?”

“쯧. 말 맞추고 왔구만.”

한진섭은 괜히 물었다며 입맛을 다셨다.

그런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서강일이 말했다.

“다들 괜찮다면 민우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은데. 돌려 말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줘. 찬성이냐 반대냐로.”

서강일답게 쿨하게 제안이 나왔다. 모두 잠깐 머뭇거렸지만, 한진섭이 먼저 손을 들었다.

“압도적 찬성.”

“저도 찬성이요.”

“찬성합니다.”

“찬성!”

강민희를 마지막으로 모두가 찬성표를 던졌다. 예상외의 반대는 없었지만, 서강일은 하고 싶은 말이 남은 것 같다.

“대신 조건이 있어. 임기를 2년으로 하고, 임기가 끝나면 추천이나 투표로 후임을 정했으면 하는데 어때?”

그것은 민우가 추구하는 바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관리자가 들어설 때마다 팀은 새로운 색깔을 띠게 될 거다. 마치 무지개처럼.

민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조건이라면 환영이지. 팀원이 열 명이니까, 20년이면 한 사이클이 돌겠구나.”

“20년 뒤에는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있겠죠?”

“그렇겠지.”

“아, 싫다. 그냥 전 팀장 안 할래요. 왠지 떡국 먹는 느낌일 거 같아.”

“하기 싫어서 빠져나가려는 거 다 보이거든? 예외는 없다.”

민우와 주예린이 한마디씩 주고받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그럼 새 팀장님. 소감 한 말씀 해주시죠.”

민우가 권하자 서강일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한가하게 소감이나 말할 때가 아니지. 면접 설계하러 모인 거잖아? 빨리 해치우고 밥이나 먹읍시다.”

“역시 새 팀장님! 전임 팀장이었으면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처럼 지루한 이야기나 늘어놓았을 텐데. 좋습니다. 가시죠!”

“쟤 부끄러워서 저러는 거야. 백 프로다.”

민우가 실실 웃으며 한마디 하자 한진섭이 정색했다.

“어허! 전임 팀장님 왜 이렇게 질척거리시지? 감투가 떨어지니 아쉬우십니까?”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회의에 집중해 주십시오. 평회원님.”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 모습이 또 다른 웃음을 선사했다.

새롭게 단장한 ‘휴머니티’가 출범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

회합이 끝나고 서강일과 강민희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강민희의 입에는 메로나가 물려 있었다. 그때, 그녀가 메로나를 잠시 입에서 뗐다.

“무슨 속셈일까?”

“뭐가?”

“명인대 아저씨.”

민우가 팀장 자리를 선뜻 넘긴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집에서 궁상떨지 말고 집중해서 일이나 하라는 말이겠지.”

“나 같으면 손에서 못 놓을 거 같아서 그래. 말이 팀이지 하나의 권력 집단이잖아? 영향력 있는 사람도 많고 말이야. 연주만 해도 그룹 하나 움직이니까 건물이니 집기니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지잖아.”

“그렇지.”

“그런데 그렇게 쉽게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해. 그 아저씨는 자기를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던데…… 전혀 평범한 것 같아 보이지 않아.”

“웬일로 네가 민우 칭찬을 다 하냐?”

“칭찬 아니야. 그냥 의문이지.”

서강일은 피식 웃었다. 말은 툴툴거리지만 강민희도 민우를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버스가 한 번 덜컹거렸다. 그것을 신호로 두 사람은 잠시 말문을 닫았다.

목적지까지 몇 정거장 남지 않았을 때 서강일이 다시 말을 꺼냈다.

“확실한 건, 단순한 배려가 아니라는 거야.”

“배려가 아니면 뭔데?”

“내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녀석이 뭔가 다른 미래를 본 게 아닐까?”

“다른 미래?”

“내가 뭔가를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겠지.”

창밖으로 향해 있던 강민희의 시선이 서강일이 앉아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전에는 연주가 청문대에 자리를 만들어 주겠다고도 했고. 민우는 오늘 팀을 넘겼어. 내가 아무런 능력도 없이 그냥 연줄만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그렇게 신임했을까?”

“그건 아니지. 오빠도 나름 한일대 황태자 소리를 들었었잖아. 과거형이긴 하지만.”

“그렇다면…… 나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서강일은 단순한 결론에 이르렀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게 자신을 위한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편, 강민희는 지금 서강일의 눈빛이 석사 시절의 그 도전적인 눈빛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민희의 눈에 오랜만에 미소가 맺혔다.

“다음에 아저씨랑 수빈이 불러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갑자기?”

“가끔은 기분 전환도 좋잖아?”

석사 시절의 그때로 돌아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건 강민희만이 아니었다.

서강일도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

씨익 웃은 그가 강민희의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다.

민우는 짬을 내어 백현대학교로 움직였다. 이곳 국문과에는 민우의 매형이자 명인대 선배인 최민식이 전임 교수로 있다.

쓰던 논문이 얼추 완성되어 가고 있어 관련해서 의논할 일이 생긴 것이다.

차가 주차장에 도착하고, 레아가 물었다.

“많이 늦으실까요?”

“아뇨. 한 시간 정도면 될 거 같아요.”

“그럼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볼일 끝나시면 연락 주세요.”

“고마워요.”

민우는 차에서 내려 최민식의 연구실로 향했다. 몇 번 와본 적이 있어 헤매진 않았다.

연구실에 도착한 민우가 조심스레 노크했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고, 민우는 반갑게 웃으며 문을 열었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귀한 곳에 누추한 손님이 오셨네!”

최민식이 두 팔을 벌려 환영했다.

그는 살이 좀 쪘다.

정교수가 된 이후로 긴장이 풀린 것도 있고, 나이가 드는 만큼 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인문계 연구자들의 숙명 같은 거다.

그래서 와이프인 박민아는 매번 뱃살 좀 넣으라고 잔소리를 하곤 한다.

“요즘 많이 노력하시나 봐요. 애들 유머도 시도하시고. 그거 쉽지 않은데.”

“인방 좀 챙겨보고 있다. 안 그러면 학생들 수업 시간에 졸아서. 게다가 요즘 강의 평가가 좀 살벌해야지?”

“그건 그래요.”

“뭔가 교수라는 직업도 서비스업이 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약간의 회의감이 섞인 한마디였다.

교수가 학생을 엄하게 평가하는 것처럼, 학생들도 교수를 엄하게 평가한다. 몇몇 학생들은 악플 수준으로 평가를 남기기도 한다.

대부분의 대학에서 일정 점수 이하의 평점이 나오면 사유서를 써서 내게 하는 등 관리를 강화하는 추세기 때문에 모두 예민하다.

“그런데 바쁜 사람이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전화로 하지 않고선.”

“촬영장 가는 길이었어요. 드릴 말씀도 좀 있어서 들렀죠.”

“아, <프로페서> 말이냐?”

“현장에서 호출이 왔거든요. 좀 의논할 부분이 있나 봐요.”

이곳 일정을 마치고 바로 스튜디오로 가야 한다. 가는 건 좋은데, 그곳에서 김명현을 만날 걸 생각하니 입맛이 썼다.

이번 인문학 프로그램 건으로 또 시비를 걸어올 게 분명하니까.

하지만 ‘휴머니티’도 나름 성공적으로 궤도에 진입했기 때문에 마음의 짐은 한결 가벼워진 상태다.

“하여튼 대단해. 대학원 꼬꼬마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자서전으로 드라마까지 나오고. 허, 참.”

“다 선배님께서 제대로 굴려주신 덕분 아니겠습니까?”

“너 말에 좀 가시가 있다?”

“가시만 있을까요?”

“하하하하!”

당연히 드라마 <프로페서>에도 최민식 역이 배정되었다. 굉장히 다혈질적인 캐릭터로 잡혔다고 하는데, 본방 날만 기다리고 있다.

물론 최민식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현실반영 부분에 대해서는 흔쾌히 허락했다.

“형이 재환 선배하고 예진 선배랑 같이하는 학회 있잖아요. 얼마 전에 수빈이랑 좀 이야기를 했었거든요. 그쪽에 논문을 좀 드리는 게 어떨까 싶어서 왔어요.”

“논문을?”

최민식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만큼 뜻밖의 일이었다. 교수급 연구자가 논문을 먼저 준다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대개 청탁이 들어가니까.

거기다가 본인이 몸담은 학회는 KCI 인증도 받지 못했다.

말 그대로 동호회 수준의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하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상황.

그런데 선뜻 논문을 주겠다는 것이다.

“원래 전에 누나랑 식사할 때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형이 그때 못 나오셔서 말씀 못 드리고 있었어요. 이런 건 전화로 하기가 좀 애매하니까.”

“음, 그렇지.”

“학회지는 정기적으로 나오죠?”

“분기마다 한 권씩 내려고 노력 중이다.”

잠시 자리에서 일어난 최민식이 책장에 꽂혀 있는 책 하나를 꺼내왔다. ‘현대서사학회’에서 최근에 발간한 학회지였다.

“이게 우리가 내는 논문집이야.”

“디자인이 괜찮네요. 편집은 직접 하시는 겁니까?”

“예진이가 고생해주고 있지.”

논문집 두께는 제법 얇았다. 단행본으로 200페이지를 간신히 넘겼다. 그만큼 수록된 논문이 적다는 의미다.

“저랑 수빈이 논문 하나씩 투고할게요. 가능하면 학회에서도 발표도 하고요.”

“으음, 그렇다고는 해도 좀 아깝지 않냐? 우리 학회가 뭐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럼 더 간단하죠. 뭐가 있는 학회로 만들면 되니까.”

민우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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