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40화 (340/500)

누구에게나 가능성은 있다 (1)

“그랬구나. 다행이네요. 잘 풀려서.”

오랜만에 인문관 밖으로 나온 민우와 이수빈은 대학원 시절 자주 앉았던 그 벤치에 가서 캔음료를 땄다.

마음은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맥주를 까고 싶었지만, 현실은 캔음료로 만족해야 했다.

어딜 가도 눈에 띄는 커플이라 쉽게 움직일 수 없는 게 있다.

“뭐, 운이 좋았지.”

“아! 정말 그 운 좋았다는 이야기는 이제 좀 그만하라니까! 질리지도 않아요?”

민우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만큼 이수빈의 목소리가 컸다.

“사실이잖아? 도서관에서 양지모 그 친구 만난 것도 그렇고, 놀이터에서 우연히 앉아 있는 소윤이 만난 것도 그렇고.”

“그러니까, 오빠가 그런 멋진 멘트를 치니까 마음이 돌아선 거잖아요.”

민우는 멋쩍게 웃고 말았다.

이소윤과 있었던 일은 모두 이수빈에게 공유되고 있다. 그녀가 신경 써주는 것도 있고, 괜히 오해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수빈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교수님이라고 불렀던 친구가 선생님이라고 호칭을 바꾸다니…… 아, 나는 언제 그런 믿음직스러운 제자 생기나?”

“문학 교양 수업에 인문대생보다 공대생 남자들이 더 많이 몰린 사람이 할 소리야?”

“한때는 그래도 명인대 여신이었잖아요? 그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닌가?”

“학생들이 듣겠다.”

“팩튼데 뭐 어때.”

민우가 말한 교양 수업은 바로 ‘문학개론’ 수업이었다. 이번 1학기 문학개론 담당 교수는 이수빈이다.

문학개론은 문학을 일상처럼 즐길 수 있는 과목으로, 누구나 쉽게 문학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타과 학생들이 많아 수강하는 편이다.

‘개론’ 시리즈의 원조이기도 하고 말이다.

보통은 남녀비율이 비슷하지만 이수빈이 교양과목을 맡았다는 소문에 남학생들이 몰린 상황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소소하게 티격태격할 때, 옆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교수님.”

민우와 이수빈의 시선이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 오는 쪽으로 돌아갔다.

양지모였다.

훤칠한 외모에 하얀 가운을 걸치니 주변을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이쪽을 힐끗거리기 시작했다.

“양 선생님. 웬일로 인문관엘 다 왔어요?”

민우가 물었고, 양지모는 백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으며 대답했다.

“당직 끝나서 잠깐 바람 쐬러 나왔습니다. 겸사겸사 교수님께 인사도 좀 드리고 싶어서요. 들어가려다가 이쪽에 계신 게 보이더군요.”

“인사는 얼마 전에 소윤이한테 전해 들었습니다. 같이 술 한잔하자고 했다면서요?”

“왠지 교수님과 마시는 술이 잘 들어가는 거 같아서 말이죠.”

“하하하하. 센스 있으시네. 술 안 좋아하신다고 들어서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어요.”

“술은 옵션이죠. 그날은 소윤이 얘기밖에 못 했던 게 좀 아쉽더군요.”

“아, 그렇긴 하네요.”

그러고 보니 그날 자리에서 이소윤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양지모 본인의 이야기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고작 세 번째 만남이었지만, 민우와 양지모는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분야는 전혀 다르지만 사람을 위한다는 마음은 하나였으니까.

그때 이수빈이 나섰다.

“안녕하세요? 이수빈입니다. 말씀은 전해 들었어요. 소윤이 남자 친구분이라고.”

“그건 아닌데요. 그냥 어렸을 때부터…….”

“에이! 원래 처음엔 다 그렇게 시작하는 법이죠. 아무튼 술 한잔할 거면 다음에 소윤이랑 같이 우리 집에 놀러와요. 맛있는 안주 준비해 줄 테니까.”

“좀 실례일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미남 손님은 언제나 환영이랍니다!”

이수빈이 생긋 웃으며 칭찬하자 양지모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민우가 나섰다.

“그렇게 해요. 다음에 날 잡아서 소윤이 데리고 집에 오시면 좋겠네요. 그때 봅시다.”

“예. 아무튼 이번 일은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교수님이 소윤이한테 해주신 말씀이요. 놀이터에서.”

“아, 그거요.”

“정말 멋진 말씀이라고 의대에서 소문이 났더군요. 몇몇 교수님들도 긍정적으로 평가하셨고요.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민우는 이소윤을 격려하며 이렇게 말했었다. 환자를 살리지 못한 것에 절망하는 그런 인간다운 의사 선생님에게 진료를 받고 싶다고.

별생각 없이 그냥 솔직한 마음을 전한 것뿐이었는데 그 말이 그렇게 반향을 일으켰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역시.”

“아, 제가 대단하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하하하. 관점의 차이죠. 의사 선생님들은 환자 입장에서 생각하기 어렵잖아요. 하지만 저는 의사가 아니니까, 그냥 환자 입장에서 편하게 생각해 본 거였습니다.”

“일종의 격려가 된 셈이네요. 환자에게 받는 격려.”

“바로 그거죠.”

양지모는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묵은 숨을 시원하게 내뱉으며 말했다.

“덕분에 인간다운 의사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됐네요. 언제 한번 의대에도 특강을 나와주셨으면 합니다.”

“그럴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저도 아는 의사 선생님들 좀 많이 만들어 두게.”

“하하하. 이미 두 명이나 포섭하신 것 같은데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만간 연락드리죠.”

“다음에 봐요.”

양지모와 헤어진 두 사람도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제 올라가서 함께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오늘은 수요일.

곧 휴머니티의 온라인 접수가 마감된다. 자료를 정리하는 건 민우와 수빈의 몫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오늘 사이좋게 야근하기로 했다.

이수빈이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 정말 빨리 가네. 시간 됐네요. 올라가 볼까요?”

“그럽시다.”

“야근은 어디에서?”

“어디긴. 321호지.”

두 사람이 기운을 차리고 다시 인문관 안으로 들어갔다.

***

다음 날, 휴머니티 지원자 서류 데이터를 챙긴 민우가 원년 멤버들을 소집했다. 이수빈, 한진섭, 주예린이 민우의 연구실에 모였다.

이미 결과에 대해서는 단톡방에 공유된 바 있어서 멤버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첫날 모집을 시작하자마자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번에 몰렸다.

그래서 팀원들은 목표를 초과 달성할 거라고 낙관했지만 뒷심이 부족했다.

지원 취소자도 생각보다 많이 나왔다.

“토탈 254건이라니. 초반 기세는 어디로 간 거야?”

한진섭이 탄식했다. 하지만 민우는 그저 웃기만 할 뿐, 대꾸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날카로운 눈으로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주예린이었다.

“이 시국에 웃어? 박 선생님께서는 뭐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 봐요? 요즘 명인대 의대 쪽에서도 주가가 팍팍 올라가고 있어서 그런가?”

“갑자기 의대 이야기는 왜 나와?”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죠. 명언 제조기라고 아주 소문이 자자하드만.”

“됐고, 이것 좀 봐.”

민우가 새로운 자료를 멤버들에게 돌렸다. 어제 공유된 자료는 단순 자료였고, 이번에는 민우가 직접 분석한 자료였다.

멤버들이 유심히 인쇄물을 살펴보았다.

활자를 보는 데 이골이 난 사람들이라 세 사람은 금방 자료의 특징을 유추할 수 있었다.

“254건에 대한 질적 분석…… 지원자 특성 통계를 냈네.”

신문방송학을 복수전공한 한진섭이 데이터의 특성을 가장 먼저 파악해냈다.

말 그대로였다.

어제 공유된 자료가 몇 명이나 지원했는지에 대한 단순 숫자라면, 민우가 돌린 자료는 연령대별 분포, 성별, 지역, 전공, 기타 관심사 등이 집계된 통계자료였다.

민우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나는 이번 모집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뭐, 맞는 말이야. 하지만 숫자는 다루기 나름이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결과가 극명히 달라질 수 있어.”

그렇게 대꾸한 민우는 프린트에 적지 않은 분석 내용을 구두로 전달했다.

“지원자 전공을 봐. 인문계 대학원생들이 압도적으로 많지. 20퍼센트가 넘어. 그중 연령 비율을 보면 20~30대가 가장 많고.”

“그러니까 인문계 대학원생들이 많이 지원했다는 건가요?”

“좀 더 이쪽 언어로 표현하면 학문후속세대들이 지원을 많이 했다는 거야.”

민우의 분석 결과에 멤버들의 표정이 다소 밝아졌다.

대한민국의 인문학 지원 정책은 여전히 제자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학문후속세대들이 적극적으로 배움을 청한다는 것은 분명 좋은 현상이었다.

민우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윤이 팬들이 장난식으로 지원하지 않았어. 그 수는 5퍼센트 이하. 즉, 254건 중 어림잡아 240건 정도가 모두 유효한 지원이라는 거지.”

“2배수는 달성하지 못했어도 정원 이상의 유효지원은 이끌어냈다?”

“빙고.”

손가락을 한 번 튕긴 민우는 다른 자료를 근거로 삼아 설명을 이어나갔다.

“거기에 50대 이상의 고령자들의 지원도 10퍼센트나 돼. 그중 학력이 낮은 사람의 비율이 65퍼센트나 되고. 이 말은, 우리 프로젝트가 교육 소외계층에게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는 소리야.”

“고무적이네.”

그제야 한진섭의 표정이 밝아졌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리했다.

“즉, 학문후속세대는 물론 교육 소외계층까지 아우른 균형 잡힌 모집이었다는 결론이 나오지.”

“진짜 그러네. 단순히 숫자로만 봐서는 알 수 없는 거였구나. 근데 어떻게 하루 만에 이렇게 분석을 했냐?”

“밤새웠지.”

그 말에 이수빈이 깜짝 놀랐다.

“그럼 잠 거의 못 잔 거예요?”

“오늘은 당신이 윤아 유치원 데려다주는 날이니까 좀 무리했어. 걱정하지 마. 오늘은 강의 없으니 잠시 눈 붙일 거니까.”

“무섭다. 정말.”

“박민우 당신은 도덕책…….”

한진섭, 주예린 커플이 한마디씩 던졌다. 약간은 장난기가 묻어 있었지만, 민우의 열정에 다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254명 모두 면접에 부르는 걸로 하자. 문제는 그 많은 사람들을 한 명씩 앉혀놓고 질문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건데.”

“면접 설계가 필요하겠네요.”

“그렇지. 그런 의미에서 이번 주말, 팀 307호 긴급 소집이야.”

세 명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민우는 그간 고민해왔던 것을 동료들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팀 이름을 좀 바꾸고 싶은데.”

“하긴, 명인대 출신이 아닌 사람들이 이제는 더 많아졌으니 좀 바꿔야 하지 않나 싶었는데. 생각해 둔 거 있냐?”

“휴머니티.”

“프로젝트 이름을 그대로 팀 이름으로 쓰게 되는 거구나.”

특별히 반대 의견이 나오지는 않았다. 어쨌든 팀 307호도 커뮤니티니까, 인문학 커뮤니티라는 의미의 휴머니티라는 뜻도 잘 어울렸다.

“그리고 팀 이름 바꾸는 김에 나는 팀장에서 물러날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선배 아니면 누가 해요?”

민우는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의자이 기댄 채 말했다.

“한번 밀어주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그 녀석이라면 어쩌면 나보다 더 좋은 팀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너보다 좋은 스펙을 가진 놈이 있긴 하냐?”

한진섭이 물었고,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펙이 사람의 능력을 결정할 순 있어도, 그 사람의 가능성까지 결정해주지는 않아.”

“가능성? 그게 무슨 소리냐?”

“오히려 나처럼 성공만 한 사람보다는, 현실에서 치열하게 사는 사람이 더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더 좋은 정책을 낸다는 거지.”

순간 세 사람의 뇌리에서 떠오르는 한 사람.

한진섭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자세한 건 주말에 다들 모였을 때 이야기합시다.”

여전히 민우가 물러난다는 이야기가 피부에 와닿지 않는 세 사람. 그들은 끝내 민우의 속내를 짐작하지 못했다.

하지만 민우의 표정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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