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이 고픈 교수들 (2)
곧 전화가 연결되었다. 민우가 활기차게 인사했다.
「박사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박민우입니다.」
「오, 미스터 박!」
랑느 박사의 열정적인 목소리는 여전했다. 프랑스는 이제 막 아침이 되었을 텐데, 그의 목소리는 마치 만찬에 참석한 사람처럼 들떠 있었다.
「평소에는 피드백이 빨랐는데 이번에는 메일을 좀 늦게 읽은 모양이군.」
「아, 죄송합니다. 요즘 한국은 시험 기간이라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거든요.」
「하긴, 미스터 박은 한국에서 인기가 많지? 물론 소르본에서도 명성이 자자하지만 말이야.」
「그냥 그렇습니다. 인기야 뭐 시간이 지나면 식는 거 아닐까요?」
「자네에게 유일한 흠결이 있다면 지나치게 겸손하다는 거야! 세계적인 석학이 되었다면 가끔은 맞습니다, 라고 긍정해도 되지 않나?」
랑느 박사와 오랜만에 통화하는 것이었다. 작년 말쯤 해가 지나기 전에 안부 전화를 한 게 마지막이었으니 근 넉 달 만이다.
「그런데요. 박사님. 메일을 읽긴 했는데…… 이게 정말입니까? 가끔 스팸 메일이 올 때가 있어서 말이죠.」
민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엔 기대가 서려 있었다.
「물론이지! 내가 자네에게 농담할 이유도 없지 않나? 게다가 그렇게 재미있는 일을 꾸미고 있다면 나에게도 언질을 줬어야지. 서운할 뻔했어.」
「미리 말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사실 처음에는 조금 작게 시작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볼륨이 좀 커졌네요.」
「자네가 하는 일은 늘 그랬지. 성경의 구절처럼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늘 창대했어.」
민우는 부끄럽게 웃었다.
이역만리 떨어진 프랑스인과 통화를 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겸손했다.
랑느 박사는 메일에서 ‘휴머니티 프로젝트’에 참가하겠다고 밝혔다. 정규 과정을 맡기는 어렵겠지만, 특강을 할 수 있다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 말했다.
그도 민우와 서지훈 교수처럼 강의를 통해 뭔가를 배우고 자극받기를 원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 오실 일이 있었던 겁니까? 좀 갑작스럽기도 해서요.」
「사과가 떨어지길 기다리기만 해선 뜻을 이룰 수 없다네.」
「제 기억으론 뉴턴 별로 안 좋아하셨던 거 같은데.」
「하하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아무튼, 이번엔 나 혼자 가는 게 아니네. 미셸과 셀린느도 동행할 생각이지. 어떻게 보면 여행이라기보단 현장학습 정도려나.」
「그거 반가운 소식이네요!」
미셸과 셀린느는 예전에 민우가 IAHS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을 때 만났던 학생들이었다. 지금은 각자 자리를 잡고 프랑스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들었다.
특히 셀린느는 학문적 무기력증을 극복하고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고 한다.
‘그 말수 적었던 사람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긴 하네.’
뉴욕에서 본 이후로 메일을 몇 번 주고받았을 뿐 실제로는 한 번도 보진 못했다. 문득 베데스다 분수 앞에서 그녀와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 이야기했던 풍경이 떠올랐다.
그 짧은 순간의 회상이 끝나고 민우가 다시 통화에 집중했다.
「그럼 박사님. 총 3세션을 준비하면 될까요? 이제 미셸과 셀린느도 박사니까 좋은 강의가 될 거 같은데요.」
「그거 반가운 소리군. 그래 주면 고맙지. 그런데 강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인프라가 있나? 동시통역 시스템이 있다면 좀 편할 것 같네만.」
「그건 문제없습니다. 기자재는 대한전자에서 후원받고 있어서 통역 시스템도 구축 가능해요.」
「그거 반가운 소리군. 그럼 부탁하네. 입국 날짜는 아마 5월 중순이 될 거야.」
「맡겨 주십시오. 정확한 날짜 나오면 다시 말씀 부탁드려요.」
「그러지.」
전화가 끊겼다. 만우는 한숨을 돌리며 이 기쁜 소식을 팀 307호 전체방에 공유했다.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주님: 박 선생 섭외력 무엇?
섭섭한애: 한 세션도 아니고 세 세션? 거기다가 박사급 강사가 두 명이나 더 온다고? 이거 실화냐?
대체 이 두 부부는 평소에 핸드폰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는 건가? 톡을 하면 바로 답장을 하는 편이다.
내무부장관: 정말 잘됐네요! 랑느 박사님 오랜만에 인사드리겠네~ 전 결혼식 이후로 처음 뵙는 거예요
정연주: 작년 말에 프랑스에 출장 차 다녀왔는데 그때 뵈었어요. 여전히 정정하세요^^
역시 정연주. 프랑스문학 전공자의 위엄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작년에 랑느 박사와 만났을 때 이번 ‘휴머니티 프로젝트’가 어느 정도 공유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만큼 정연주는 인문학 관련 교육사업에 열의를 보이고 있었으니까.
나: 그래서 동시통역 시스템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 협찬 가능할까?
정연주: 그건 이미 작업 중이에요. 아마 다음 주면 세팅 모두 끝날 거예요. 대한전자에서도 좋아하겠네요. 세계적인 학자분이 오셔서 처음으로 특강해 주시고.
나: 그런 보람이라도 있어야지. 우리한테 후원해 주는 게 적지 않은데. 그럼 다음 주 안에 인테리어는 모두 끝나는 거지?
정연주: 인테리어는 이미 모두 끝나서 바로 사용 가능하고요. 다음 주면 나머지 장비나 필요한 기자재 모두 들어올 거예요.
나: 오케이!
일이 술술 풀리고 있었다. 민우는 핸드폰을 책상 위로 내려놓았다.
‘이제 남은 건 지원 서류인가? 400개 채울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하지만 걱정보다는 설렘이 앞섰다.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학생들과 마주한다는 것은 교수라는 입장을 떠나 하나의 인간으로서 늘 설레는 일이었다.
여전히 인문학은 기초학문이라는 느낌보다는 보호학문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대중의 관심을 학계나 교육계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우는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그 문제가 조금이라도 해소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한번 제대로 해보자!’
다시 마음을 다진 민우는 성적 입력을 마저 끝내고, 휴머니티 홈페이지에 들어가 관리자 로그인을 시도했다.
이어 지금까지 접수된 서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덕분에 밤늦게까지 인문관 321호 교수연구실에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
중간고사가 끝나고 첫 강의 시간이 돌아왔다. 민우는 채점을 마친 답안지를 들고 강의실로 움직였다.
오늘은 강의보다는 중간고사 문제에 대한 피드백을 할 계획이었다.
대학 강의는 교수의 지식과 전달력도 중요하지만 과제나 시험에 대한 피드백도 상당히 중요하다.
중간고사는 매우 중요한 시험 중 하나이기에 민우는 시험을 본 이후의 첫 강의에서는 꼭 이렇게 학생들에게 피드백을 해주곤 한다.
강의실로 들어오자 학생들의 묘한 기류가 느껴졌다.
아마 지금쯤이면 성적을 모두 확인했을 거다.
명인대도 상대평가로 성적이 입력되기 때문에 모두가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없다.
물론 B0 이하 학점은 상대평가 룰이 적용되지 않아 1점이든 50점이든 B0를 줄 수 있지만, 민우는 A+부터 D0까지 골고루 배점했다.
그러니 학생들이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는 상황.
“분위기가 좀 침울해진 것 같은데. 성적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요?”
“잔인해요…….”
매번 맨 앞에 앉는 여학생이 우울한 표정을 했다. 민우는 그 학생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성적도 마찬가지. 아마 D+를 받았을 거다.
“하하하. 잔인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성적은 석차에 맞게 정확히 배점했으니까요.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들의 불만을 좀 해소해볼까 합니다.”
민우는 들고 온 시험지를 들어 보였다. 학생들의 눈에 약간의 희망이 감돌았다.
“물론 성적을 올려준다 뭐 그런 건 아니고요.”
학생들의 눈에 맺혀 있던 약간의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이 자리 잡았다. 밀당의 귀재야.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하하. 다들 너무 일희일비하네. 기말고사에서 최종 등급이 많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과제 잘하고 기말고사 잘 보면 학점이 많이 올라갈 수 있으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네…….”
목소리에 기운이 없다.
60명 정원에서 A학점을 받은 사람은 몇 안 된다. 국내 최고 학부의 학생들인 만큼, B학점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을 거다.
C나 D를 맞은 사람들은 충격이 컸겠지.
“자, 그럼 지금부터 조금 특별한 걸 해볼 텐데요. 성적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손을 들어 주세요. 그럼 답안지를 읽으며 어디가 부족했는지 해설을 해보겠습니다.”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민우가 다시 설명했다.
“저는 따로 성적 정정 요청을 받지 않을 겁니다. 이 강의실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정하게 처리할 생각입니다.”
보통 답안지 피드백은 학생 개인이 연구실에 찾아가 면담 형식으로 진행하곤 한다. 하지만 민우는 같이 읽는 방식을 택했다.
민우가 이 방식을 택한 이유는 몇 가지 장점 때문이다.
우선 학생들의 답안지를 같이 읽는 것 자체에 학습 효과가 있다.
그 과정에서 학점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은 자신이 쓴 답안지와 비교해보고 성적 정정 요청을 단념하게 된다.
답안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지식이 쌓임과 동시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이 어디가 부족했는지를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과정 자체가 투명하다.
대학은 생각보다 폐쇄적인 공간이다. 대학 전용 커뮤니티도 많이 발달한 시대라, 정보 공유나 확산이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그 과정에서 누가 연구실에 찾아갔는데 학점이 올랐다느니 이런 소문이 퍼지면 여러 사람 피해 보게 되는 거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학점에 대해 서로 논의할 수 있다면 투명성이 확보된다.
“자, 그럼 먼저 확인하실 분 계십니까? 손 들어보세요.”
학생들이 하나둘 손을 들기 시작했다.
민우는 순서대로 학생을 지목해 답안지를 찾아 강독했다. 부족한 부분을 밝히는 작업이지만, 민우는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김무열 학생의 답안지는 무척 깔끔했어요. 논지의 전개도 나쁘지 않았고. 하지만 교재 위주로 외워 썼다는 게 좀 아쉬웠습니다. 만약 자기 의견을 좀 더 넣었더라면 A0까지는 가능했을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기말고사 답안지를 기대하겠습니다.”
이렇게 대부분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실제로 성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학생들은 어느 정도 학점이 잘 나온 상황이었다. 아예 안 나온 경우는 항의하기도 좀 그러니까.
그렇게 열 건 정도의 성적 확인 작업이 마무리되니 마침 수업 시간이 거의 끝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음 시간에 만나요.”
“수고하셨습니다!”
민우는 바로 짐을 챙기지 않았다. 따로 점수를 확인해 줘야 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도 흰 가운을 걸친 이소윤이 앞으로 나왔다.
“선생님. 저도 점수 확인하고 싶어요. 저는 학사정보시스템에 입력이 안 되니까.”
“그럴 줄 알고 가져왔지.”
민우는 어제 채점을 마친 이소윤의 답안지를 그녀에게 건넸다. 상단에 적혀 있는 학점을 본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A+였다.
“전체적으로 아주 잘 썼어. 마음 같아서는 국문과로 전과하라고 권하고 싶을 정도야. 자세한 코멘트는 시험지에 적어뒀으니 돌아가서 읽어보도록 해. 궁금한 거 있으면 따로 물어보고.”
“감사해요. 선생님.”
민우는 이소윤과 함께 강의실을 나섰다. 복도를 걸으며 그가 물었다.
“조금 정리는 됐어?”
“아, 예.”
요즘 있었던 일련의 일을 묻는 것이었다.
민우는 이소윤에게 맞춤형 문제를 내주었다. 삶과 죽음에 대해 나름 정리할 수 있는 문제.
이소윤이 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만족스런 답은 구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조금 정리된 느낌은 들어요. 답답함이 좀 풀렸달까.”
“다행이네.”
“지모 오빠가 선생님께 감사하다고 전해달래요. 다음에 셋이 같이 한잔하자고.”
“그거 좋지!”
왠지 제자가 한 명 더 생긴 느낌이었다. 두 사람은 늦봄의 햇살을 맞으며 복도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