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38화 (338/500)

배움이 고픈 교수들 (1)

민우는 채점을 마친 <존재와 영혼의 형식> 강의 답안지를 캐비닛에서 꺼냈다. 오늘까지 성적 입력을 해야 했다.

자리에 앉은 민우는 답안지를 둘러보며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다들 공부를 열심히 했어. 수준이 높아.’

전공 강의와 교양 강의는 느낌이 좀 다르다.

전공은 이수학점 문제로 피할 수 없이 들어야만 하는 경우가 많아 답안 완성도의 편차가 심한 편이지만, 교양과목은 거의 비슷하다.

대개 관심이 있는 과목을 골라 듣기 때문에 채점하기가 상대적으로 까다롭다.

그래도 민우는 분명한 기준을 놓고 채점을 마쳤다.

자신의 강의를 모범적으로 이해한 학생에게 높은 점수를 주었지만,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은 학생 본인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풀어낸 답안이었다.

민우는 자신의 이론과 생각을 답습하는 학생보다, 그것을 넘어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는 학생을 더욱 좋아했다.

그건 과제도, 시험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그런 새로운 관점과 논리가 민우에게 긍정적인 자극을 주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는 현장에서 공부하는 교수였다.

그때 형식적인 노크가 들리더니 바로 문이 열렸다. 이런 무례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은 명인대에 몇 없다.

“박 선생. 휴머니티 지원자 현황은 좀 어때?”

이제 수업을 마치고 돌아왔는지 한진섭이 강의 교재를 팔에 끼고 고개를 내밀었다.

민우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답했다.

“박 선생님은 성적 입력하느라 바쁘십니다.”

“엥? 아니 무슨 지금 성적 입력을 해? 휴머니티 지원자 체크해도 모자랄 판에. 그런 건 좀 조교 시키면 안 되냐?”

“성적 입력을 왜 조교한테 시켜? 조교 선생들도 바쁜데.”

“어휴. 하여간 세상에서 착한 척은 다 해요. 너 같이 앞뒤가 꽉 막힌 교수들이 있으니 다른 교수들까지 욕을 먹는 거야.”

민우가 피식 웃었다.

“내가 욕먹냐? 니가 먹지.”

“허!”

옆에서 차민재가 킥킥거리며 웃다 한진섭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곤 표정을 바로 했다. 한숨을 내쉰 한진섭이 안으로 들어왔다.

“뭔데 이제 입력하냐?”

“채점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어. 다들 답안지를 잘 썼더라고. 거의 소논문 수준으로. 이거 성적 때문에 문의 많이 들어올 거 같아.”

“벌써부터 머리 아프겠군.”

“그래서 성적 입력하면서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해. 적어도 자기가 쓴 답안이 어떻다고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줘야 하잖아?”

“예이. 그러시든지요.”

그때 문이 열리며 이수빈이 안으로 들어왔다. 마음이 급했는지 노크도 없었다.

“마침 여기에 다들 계셨네.”

“어허, 이 선생. 안에 들어올 때는 노크를 해야 하는 건 기본 아닌가?”

“여기가 한 선생님 연구실은 아니잖아요?”

뻔뻔스러운 대답에 한진섭이 혀를 찼다. 부부는 한통속이라며. 싱글벙글 웃은 이수빈이 소파에 앉아 좋은 소식을 전했다.

“지금 접수 데이터 확인하고 오는 길인데 지원자 50명 넘었어요!”

“대박! 정말?”

한진섭이 반색했다.

지원 기간은 3일이다. 첫날 이른 시간에 50명이나 몰렸다는 것은 앞으로도 지원자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보통 지원자들은 막판까지 서류를 수정해 지원하는 경향이 많으니까.

“모집 정원이 200명이고 서류 전형에 2배수를 뽑을 거니까 이대로라면 우리 예상치보다 훨씬 많이 지원할 것 같아요.”

“진짜 그러겠네! 서류 전형에서도 탈락자가 생길 각인데. 이거 시작이 좋다?”

정원의 2배수를 뽑으려면 400건의 지원서가 있어야 한다.

멤버들은 이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지원할까 걱정했었다. 정원 정도만 가득 채웠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실현될 가능성이 커졌다.

답안지를 넘겨보던 민우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원자가 많은 건 별로 의미 없지 않아? 그 안엔 윤이 팬도 있을 거고, 특별히 목적 없이 오려는 사람도 있을 테니.”

“지원자가 많은 게 좀 부담이 될 수도 있긴 해요. 면접도 봐야 하니까.”

“내년에는 정원도 늘릴 텐데 벌써 그렇게 들떠 있으면 곤란하지. 거기서 떠들 시간에 면접 어떻게 볼지 계획이나 세워 놓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선생님들.”

민우의 일침에 한진섭은 물론 이수빈까지 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쓴 법. 틀린 말은 아니었다.

까톡!

그때 톡이 날아왔다.

민우의 핸드폰은 물론, 이수빈과 한진섭의 핸드폰도 동시에 울렸다. 단톡방에서 온 메시지인 것 같다.

내용을 확인한 한진섭의 표정이 불쾌해졌다.

“아이 씨. 하필 이 시기에.”

“뭔 일 있어요?”

이수빈이 톡을 확인하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민우는 확인하지 않고 답안지를 둘러보며 컴퓨터로 성적을 입력하기만 했다.

그런 민우를 위해 이수빈이 내용을 읽어주었다.

“교양학부 인문학 프로그램은 벌써 접수 마감됐다네요. 첫날인데…….”

그제야 민우의 시선이 답안지에서 떨어졌다.

“어디 소스야?”

“주 선생이요.”

“주 선생 소스면 농담은 아니겠네. 생각보다 굉장한데? 그쪽도 200명 정원일 텐데 벌써 마감이면…….”

교양학부 인문학 프로그램은 수강료를 내야 하기 때문에 서류 전형이나 면접 같은 것이 없다. 선착순으로 먼저 접수한 사람에게 수강 자격이 돌아간다.

그래서 일전에 김명현이 민우에게 ‘솎아내기’를 한다며 비아냥거렸던 것이다.

김명현이 진두지휘한 인문학 프로그램은 오픈한 지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접수가 마감됐다.

원년 멤버들은 김명현의 능력과 명인대의 네임밸류를 다시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턱을 괸 이수빈이 한마디 했다.

“김명현 그 사람도 한다면 하네요. 역시, 최근에 취업 커뮤니티에서 이슈가 된 게 컸어요. 다들 경쟁적으로 접수를 한 거 같아요.”

“그 친구 당장에라도 달려와서 염장 지를 거 같은데?”

한진섭이 끼어들자 민우가 피식 웃었다.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하라고 해. 나는 신경 안 쓰니까. 그보다 우리 쪽 지원서가 벌써 그렇게 왔으면 400건 다 살펴보는 거 각오하고 있어야겠네.”

“그렇지.”

“한 사람당 100건씩 하면 되겠다. 나중에 본심에는 다른 애들도 끼라고 하고.”

민우가 깔끔히 정리했고, 한진섭과 이수빈이 찬성했다.

그때 노크가 울리더니 문이 열렸다.

반가운 얼굴이 나타나자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일어나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다들 모여서 뭐 해? 뭐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나? 그럼 나 좀 껴주지.”

얼굴을 빼꼼 내민 사람은 서지훈 교수였다.

“그냥 역적모의 중이었습니다.”

“그럼 잡아가야겠군. 박 선생. 뭐 해? 성적 입력 중인가? 그거 나중에 하고 잠깐 나 좀 보자.”

“네!”

민우는 답안지를 내려놓고 서지훈 교수와 바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나가자 한진섭은 왠지 차별당한 것 같아 투덜거렸다.

“내가 나중에 하랄 땐 뭐라고 잔소리하더니 아주 그냥 서지훈 선생님 말씀이라면 껌뻑 죽네!”

“설마 오빠가 서지훈 선생님하고 같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같진 않지. 내가 더 젊고 유망주지 않아?”

한진섭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앞머리를 쓸어 넘기자 이수빈이 정색하며 말했다.

“음…… 예린이가 왜 요즘 결혼생활이 힘들다고 하는지 좀 알 거 같네요.”

“왜 갑자기 이야기가 그쪽으로 새는데?”

그러면서도 한진섭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뒤쪽에 들리지 않게 은밀히 물었다.

“뭐가 힘들다는 구체적인 얘기는 없었어?”

***

서지훈 교수 연구실로 들어온 민우는 늘 앉던 자리에 앉았다. 서지훈 교수도 마주 앉더니 웃으며 물었다.

“명인대에 전임으로 와서 첫 시험을 치른 건데, 어때? 답안지 상태는.”

“확실히 퀄리티가 좋았어요. 저도 생각해 볼 만한 논지도 많았고요.”

“하긴, 너는 가르치는 사람도 뭔가를 배울 수 있는 강의를 좋아했었지.”

“그건 선생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두 사제가 소리 내어 웃었다. 이렇게 일상을 공유하면서도 옛 추억을 불러올 수 있다는 건 축복받은 일이다.

“다른 건 아니고, 이번에 환영 축사하기로 했다며? 교양학부 인문학 프로그램.”

“예. 총장님이 직접 부탁하시더라고요.”

“거절하지 못해서 맡은 거냐?”

민우는 서지훈 교수가 왜 불렀는지 짐작되었다. 걱정이 되었던 거겠지.

“아뇨. 거절할 수 있었지만, 제가 하겠다고 했습니다.”

서지훈 교수는 민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민우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또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게로군.”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역적모의 중이라고.”

“플랜은?”

“축사할 기회가 생겼으니 휴머니티의 설립 목적과 운영 철학에 대해 설명하려고 해요. 물론 휴머니티를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는 없겠지만요.”

그제야 서지훈 교수도 미소를 지었다.

계산이 끝난 것이다.

“인문학 프로그램이라는 것에 막연한 환상을 가진 수강생들을 자극한다는 건가…… 하긴, 교양학부 프로그램은 수료증 장사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서지훈 교수가 냉철하게 평가했는데, 뜻밖의 말이 민우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글쎄요. 저는 수료증 장사로 폄하하고 싶진 않아요.”

“무슨 소리야?”

“그게 수료증 장사라고 해도…… 어쨌든 인문학이라는 기초학문에 대한 관심을 끌어모을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잖아요.”

“그렇긴 하지.”

“축사에서 그런 걸 좀 알려주고 싶어요. 학생으로서 마땅히 품어야 할 근본적인 질문 같은 것들. 학생들의 요구사항이 늘어난다면 교양학부 선생님들도 프로그램을 계속 개선해 나가지 않을까요?”

그제야 민우의 계획을 눈치챈 서지훈 교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편으로는 감탄하기도 했다. 적이 아닌 게 다행이라며.

“너무 세게 몰아붙이진 마. 교양학부 교수들도 벌어 먹고살기 힘들다고 난리 칠 거야.”

“이 기회에 그분들도 좀 더 공부를 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조금 새로운 방식의 공부가 될 테지만.”

“그럼, 교양학부장이 준다던 축사문은 폐기되겠구만?”

“제가 직접 준비하려고 합니다.”

평소였다면 서지훈 교수는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했을 거다. 하지만 이렇게 훌쩍 자란 제자의 모습을 보니, 기우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럼 마음대로 해 봐라.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이야기하고.”

“도움, 필요한데요.”

“뭔데?”

“휴머니티에서 특강 한번 해주시죠.”

잠시 멍해진 서지훈 교수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진심으로 방심하고 있었다.

“야, 인마. 너무 당당하게 요구하는 거 아니냐?”

“제가 선생님 밑에서 몇 년을 있었는데 그 정도는 요구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하하하! 그래, 뭐. 그렇게 말한다면 내가 할 말이 있나. 알았다. 그깟 특강 시원하게 한번 해주마!”

“부부는 원플러스 원인 거 아시죠?”

민우는 송승현 이사까지 섭외를 시도했다. 지음사도 후원금을 출자하기로 한 상황이었다.

“음, 그것도 도와주고 싶지만 직접 부탁하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을까? 어차피 너 곧 지음사 가야 하지 않아? 문학상 때문에.”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 말씀드리는 걸로 할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민우는 꾸벅 인사하고 다시 연구실로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한진섭과 이수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방해꾼들이 사라진 틈을 이용해 민우는 다시 답안지를 손에 쥐었다.

띠링!

그때 새로운 메일이 수신되었다는 알람이 떴다.

하지만 민우는 바로 확인하지 않았다. 성적 입력에 몰두하느라 메일을 오후 늦은 시간에 확인하고 말았다.

‘하, 내가 왜 이걸 이제야 봤을까…….’

민우는 시계를 확인했다.

시차를 고려했을 때 프랑스는 지금 아침일 것이다. 민우는 반가운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메일을 보낸 ‘피에르 랑느’ 박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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