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받고 싶은 의사 (2)
술자리를 파하고, 민우는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엔 TV가 켜져 있었다.
“왔어요?”
소파에 앉아 책을 읽던 이수빈이 리모콘으로 TV를 끄고 민우에게 다가왔다. 민우의 가방을 받아든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술 마셨어?”
“조금.”
“조금이 아닌데? 얼굴이 빨개질 정도면 얼마나 마신 거야.”
“소주 세 병 정도 마셨나. 오랜만에 술 잘 마시는 친구를 만났거든.”
“섭섭이 오빠랑 한잔했어요?”
“아니. 다른 사람. 일단 좀 씻고 나올게.”
민우는 안방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간단히 씻은 뒤 거실로 가니 이수빈이 빤히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혹시 의심하는 거야?”
“설마요. 오빠는 유명인이라 바람피우기도 좀 힘들지 않나?”
“그건 좀 안타까운데.”
이수빈이 앉으라 손짓했다. 민우는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그녀의 무릎을 베었다.
“뭔가 기분도 좀 처져 보여서 걱정되잖아요. 안 그래도 오늘 총장님 만나고 왔다면서?”
“그건 괜찮아. 딱히 압박이 들어오거나 그러진 않았어. 환영 축사를 하는 건 내가 선택한 일이야. 아까 톡 보지 않았어? 섭섭이도 그렇고 주님도 사이다라며 좋아하던데.”
“그렇다면 다행인데…… 오빠는 은근히 혼자 짐을 짊어지고 가려는 성향이 있어서. 힘든 일이 있으면 의논해 줘요. 이젠 진짜 남이 아니잖아.”
“알았습니다. 이 선생님.”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자리를 지켰다. 이수빈은 민우의 머리카락을 쓸어 만지며 그가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잠시 후 민우가 말했다.
“아까 소윤이 선배를 우연히 만나서 술 좀 마셨어. 명인대 부속병원에서 레지던트로 일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소윤이 선배랑? 뭔가 의외의 조합이네.”
“왜 전에 그 얘기 했었잖아. 소윤이 인문관 앞에서 어떤 선배한테 혼났었다고. 그때 혼냈던 그 사람이야.”
“아, 그 선배요? 근데 어떻게 하다가 만났는데?”
“사연이 좀 있지.”
민우는 오늘 중간고사에 이소윤이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과, 도서관에서 양지모를 우연히 만나게 된 일을 차분히 설명했다.
이수빈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소윤이 중간고사 걱정하는 건 나도 들었는데…… 아무런 연락도 없이 시험을 안 보러 왔다는 건 좀 걱정되긴 하겠네요.”
“양 선생한테 물어보니 그럴 만한 일이 있었더라.”
“어떤 일인데요?”
민우는 포장마차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이수빈에게 전해 주었다. 이수빈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곧 의사가 될 텐데. 속상하겠어요.”
“보통 사람들은 그런 일로 그러냐고 하는데, 이야기 들어보니 실제로 멘탈이 많이 흔들리는 모양이야. 그래서 주변에서 걱정이 많은 거고.”
“연락도 안 된다고 했죠?”
“전화 안 받더라고. 일단 양 선생한테 물어서 주소는 받아놓긴 했어. 근처에서 자취하고 있더라.”
“찾아가 보게요?”
“일단은 그래야지. 내일 한번 가볼 생각이야.”
그러자 이수빈이 일어서더니 부엌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빈 반찬통 몇 개를 챙겨 민우에게 보여주었다.
“자취한다니까 반찬도 좀 챙겨볼게요. 내일 나도 따라가고 싶은데,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같이 못 갈 거 같으니까.”
“그래도 괜찮겠어?”
“오빠 제자가 내 제자고, 내 제자가 오빠 제자라면서요. 그럼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는 이수빈. 민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이럴 때마다 그녀와 결혼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늦은 밤, 이수빈은 미리 해둔 반찬을 챙기기 시작했고, 민우도 주방으로 가 그녀를 도왔다.
***
다음 날, 민우는 양지모가 적어준 주소로 향했다. 명인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이쯤인 것 같은데.’
민우는 핸드폰을 터치했다.
요즘은 지도 앱만 있으면 어디든 찾아갈 수 있는 시대라, 굳이 주변에 물어볼 것 없이 이소윤의 집으로 찾아갈 수 있었다.
집에 거의 가까워질 무렵, 오른쪽에 있는 놀이터로 시선이 갔다. 한적한 놀이터에 어떤 여자가 홀로 그네에 앉아 있었다.
다름 아닌 이소윤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민우는 핸드폰을 꺼내 이소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소윤은 진동하는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주머니에 넣고 만다.
피식 웃은 민우는 전화를 끊고 천천히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전화를 안 받을 거면 핸드폰은 놓고 다녀도 되지 않아?”
“……교수님?”
이소윤은 정말 깜짝 놀랐다. 작게 벌린 입을 한동안 다물지 못했다. 하긴, 여기에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긴 했다.
눈을 큼지막하게 뜬 이소윤이 재차 물었다.
“교수님이 여기엔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이긴. 불쌍한 자취생에게 반찬 배달하려고 왔지.”
민우는 손에 든 반찬통을 흔들어 보였다.
이수빈은 은근히 손이 컸다.
결국 아침 무렵엔 묵직한 반찬통이 완성되었다. 뭐 이렇게 많이 챙겼냐고 한소리 했지만, 내심 이수빈이 고마웠다.
이수빈이 말했다. 우울할 땐 먹는 게 최고라고.
민우도 동의했다.
뭐라도 먹어야 힘이 나서 정신을 차릴 게 아닌가.
그런 마음으로 민우가 도시락을 내밀었다.
“뭐 해? 받지 않고.”
“아…… 감사해요. 이수빈 교수님께도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그걸 왜 내가 전하냐. 네가 전해야지.”
그렇게 말하곤 민우는 옆에 비어 있는 그네에 앉았다. 민우는 슬쩍 이소윤을 흘겨보았다. 그녀는 다시금 침울함에 잠겼다.
“주변 연락은 다 안 받고 있는 거야?”
“……지금은 좀 그래서요.”
“임상 실습 한창인데 적어도 학교에다가 얘기는 해야 할 거 아냐. 양 선생이 걱정하던데. 양 선생 말로는 다른 사람들도 걱정 많이 하고 있다고 하더라.”
“양 선생이요? 아…….”
양 선생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소윤은 민우가 양지모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어떻게 이름을 알고 있는지 궁금한 표정이네. 어제 양 선생하고 한잔했어. 너 찾으려고 도서관 갔는데 거기에서 만났거든.”
“…….”
“양 선생이 이야기해줬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어렸을 때부터 이웃사촌이었다면서?”
“예.”
“그럼 적어도 그 사람 연락은 받아야 할 거 아냐. 평소에도 친오빠처럼 잘 챙겨줬던 거 같은데.”
이소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우도 채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불어오는 봄바람을 맞으며 그네에 앉아 있기만 했다. 그 와중에 민우는 다리를 저어 앞뒤로 조금씩 움직였다.
한참 후, 이소윤이 조용히 말했다.
“제일 미안한 사람이니까요. 오빠가 보기에는 별일 아닐 텐데…… 그런 일로 풀이 죽었다고 실망했을 거 같고.”
민우는 잠시 생각하곤 답했다.
“양 선생이 그러더라고. 맡은 환자가 잘못되는 날엔 꼭 술을 마시게 된다고. 원래 술을 좋아하지 않는데 마시다 보니 주량이 늘었다고.”
“맞아요. 오빠는 술 잘 못 하죠.”
“양 선생이 레지던트니까 네 입장에서는 경험이 많아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결국엔 같은 사람이 아닐까? 괴로움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지, 괴로움의 총량은 같은 게 아닐까?”
잠시 말을 줄인 민우가 이소윤을 바라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결국은 이런 것도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례라고 생각해.”
민우는 자신이 수업에서 반복했던 이야기를 살짝 꾸며 그녀에게 전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이소윤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시야가 멀어지고, 푸른 하늘이 두 눈에 담겼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 상황에서 환자를 구하지 못했는데…… 내가 정말 사람을 돌보는 의사가 되어도 괜찮을까.”
“내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양 선생 이야기를 들어보니 넌 최선을 다했어. 아무 연고도 없이, 의사도 아닌데 의대생이라는 이유로 도와준 거잖아. 그 환자도 너한테 고마워하고 있겠지.”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그 환자분은 이제 이 세상에 안 계시는데.”
어떤 말로도 설득이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민우는 애초에 설득하려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맛있는 반찬과 함께 이소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온 것이다.
그네에서 일어난 민우가 이소윤 앞에 섰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그런 풍경 속에서 민우가 조용히 말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어. 유명한 의사 선생님보다 환자를 살리지 못한 것에 절망하는 그런 인간다운 의사 선생님에게 진료를 받고 싶다고.”
“…….”
“먼저 간다.”
민우는 이소윤의 어깨를 한 번 다독이고는 놀이터를 빠져나왔다.
***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다.
그 와중에 민우와 팀 307호 멤버들은 조금 더 뜻깊은 한 주를 시작했다. 바로 오늘, 휴머니티 수강생 모집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우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연구실로 출근했다.
불을 켜고 자리를 정리했다. 오늘은 차민재가 늦게 오려는 모양이다. 외투를 벗은 뒤 커피물을 올리고, 지난주에 새로 사 온 원두 백을 열었다.
한번 향기를 음미하곤 그라인더에 적당량을 넣었다.
위이이잉!
원두를 굵직하게 갈아낸 다음 드리퍼에 쏟았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붓고 천천히 커피를 내렸다.
커피 두 잔이 모두 채워질 무렵 차민재가 헐레벌떡 연구실로 들어왔다.
“아! 죄송합니다. 선생님. 오늘 늦잠 자서요…….”
“왜 죄송하다고 해? 네가 여기서 일하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요.”
씨익 웃은 민우가 커피잔을 차민재에게 건넸다.
“일찍 온 사람이 준비하면 되지 뭐. 편하게 같이 쓰는 공간이라고 생각해라. 마셔.”
“감사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노크가 들리더니,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아침부터 누굴까. 민우와 차민재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저…… 안녕하세요.”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소윤은 요즘 잘 못 먹었는지 평소보다 초췌해 보였지만, 스스로 여기까지 왔다는 게 민우로서는 기쁘고 고마운 일이었다.
“어서 와라. 지금 막 커피 내렸는데 한잔할래?”
민우는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소처럼 편하게 대했다. 이소윤이 어색하게 웃었다.
“감사히 마실게요.”
“앉아.”
이소윤이 얌전히 소파에 앉았다. 민우는 커피를 한 잔 더 따라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
“잘 쉬었어?”
“덕분에요. 아, 이수빈 선생님께도 방금 연락 드렸어요. 반찬 맛있게 잘 먹었다고…….”
“잘했어. 그래야 다음에 더 맛있는 게 나가지.”
민우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때 핸드폰이 한차례 진동했다. 팝업을 확인해보니 이수빈이 보낸 톡이었다. 이소윤에게 연락이 왔다고.
이제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소윤이 말했다.
“죄송했어요. 중간고사도 못 보고, 교수님 연락도 피해서요.”
“지나간 일이잖아. 그런데 양 선생한테는 이야기 잘했어?”
“지금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제대로 사과했어요.”
“그럼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인가.”
이소윤이 물음표를 띄웠고, 민우는 책상으로 가 시험지를 담는 커다란 봉투를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것을 이소윤에게 넘겼다.
“못 본 중간고사는 봐야지. 이번 주 내로 답안 써서 제출해.”
“아.”
이소윤은 봉투 안에 들어있는 시험지를 꺼내 보았다.
문제가 네 개 적혀 있었는데, 모두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이었다.
민우는 이번 기회에 이소윤이 그 질문에 대해 조금이라도 정리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 마음을 이해한 이소윤이 꾸벅 인사했다.
“감사해요. 선생님. 수업 청강하기 잘한 것 같아요.”
“갑자기 호칭이 바뀐 느낌이다?”
“그쪽이 좀 더 좋을 거 같아서…….”
민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향긋한 봄날의 커피 향이 연구실을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