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36화 (336/500)

진료받고 싶은 의사 (1)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용무를 마친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성웅 총장도 일어나며 민우를 배웅했다.

“어려운 부탁이었는데 들어줘서 고맙습니다. 박 교수. 다음엔 저녁 식사도 한번 합시다. 안 그래도 박 교수한테 소개해 줄 사람도 있고.”

그게 누구인지는 알 것 같았다. 수족처럼 부리는 사람, 바로 명인대 교육개발실장인 김명현이겠지.

김명현과 따로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총장은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어차피 예의상 하는 말이라 민우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예. 그러시죠. 쉬십시오.”

민우는 총장실을 나섰다.

연구실로 돌아오는 길에 바로 핸드폰을 꺼내 이 소식을 원년 멤버 톡방에 공유했다.

나: 총장님이 인문학 프로그램 개강 축사해달라고 하시네

섭섭한애: 그건 또 무슨 신선한 개소리야?

나: 아무래도 윗선에서 압박 들어온 듯.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

주님: 또 무슨 흉계를 꾸미길래?

나: 나도 모르지

섭섭한애: 그래서 하겠다고 했어? 당연히 거절했지?

나: 아니. 하겠다고 했어

섭섭한애: ????

주님: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저 세작을 잡아 당장 목을 쳐라!

나: 좋게 생각하자고. 바꿔 말하면 휴머니티를 알릴 좋은 기회잖아?

거기까지 타이핑한 민우는 씨익 웃었다.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민우는 연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해진 대본을 읽지는 않을 거다. 본인이 생각하는 인문학 프로그램의 가치와 운영 철학을 이야기할 거다.

물론, 그 표본은 명인대 인문학 프로그램이 아니다. 바로 휴머니티 프로젝트다.

민우는 연단에 서서 휴머니티의 이름만 살짝 가린 채 휴머니티 프로젝트의 모든 것을 홍보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섭섭한애: 역시 우리 박 교수님 클라스에 오지고 지리고 렛잇고!

주님: 핵사이다긴 하겠는데 그러다 진짜 윗선에 찍히면 어쩌려고 그럼?

나: 그 정도로 날 내치기는 어려울 거야. 물론 그걸 이용하는 건 좀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들의 장단에 놀아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민우는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밝혔고 동료들도 동의해 주었다. 이수빈은 바쁜지 톡을 보지 않고 있지만, 아마 같은 의견을 표했을 거다.

그때 핸드폰이 한 차례 진동했다.

문자가 하나 와 있다. 바로 백성웅 총장이 보낸 문자였다.

― 교양학부장이 연설문 구상에 참고하면 좋을 만한 내용을 정리해서 보내준다고 하는군요. 이번 기회에 서로 협력해서 잘 해보도록 하세요.

좋게 말해 참고지, 한마디로 교양학부에서 연설문에 들어갈 만한 내용을 골라서 보내겠다는 의미였다.

물론 자료를 보내준다면 민우도 참고할 만한 내용이 있을 거다. 지금까지 교양학부에서 공식적으로 정보를 공유한 적이 없으니까.

민우는 그냥 확인 버튼만 누르고 답장 없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좋아. 이제 연설 준비만 하면 되겠어. 개강날이 살짝 기대되는데?’

민우의 발걸음이 조금 더 경쾌해졌다.

잠시 후 연구실로 돌아와 보니 차민재가 답안지 정리를 모두 끝내 놓았다. 책상이 아주 깨끗해졌다.

“고생 많았다. 민재 너 오늘 저녁은 어떻게 하냐?”

“오늘은 약속 있어서 나가서 먹으려고요.”

“그래? 오늘 고생한 김에 맛있는 거 사주려고 했는데.”

“다음에 사주세요.”

“괜찮다는 말은 안 하네.”

민우와 차민재가 웃음을 터트렸다. 차민재가 책상 쪽으로 가까이 다가와 말을 이었다.

“실은 오늘 대학원 동기들하고 모임 있거든요. 얼마 전에 소모임 하나 만들었어요.”

“무슨 소모임?”

“스터디그룹인데, 소설 읽는 모임이에요. 나중에는 평론이나 논문 같은 것도 같이 써보려고요.”

“잘했네.”

얼마 전 민우가 그에게 조언을 해준 적이 있었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동료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마음 터놓고 같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라고.

민우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르는 차민재이기 때문에, 그 길로 바로 소모임을 만들고 같이 스터디를 하는 것 같다.

민우는 큰맘 먹고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 차민재에게 전했다.

“오늘 모임 끝나고 술이나 한잔해라.”

차민재는 손을 내저으며 카드를 받지 않았다.

“아, 괜찮습니다. 저희 회비 걷기로 해서요.”

“걷은 회비는 다음에 쓰면 되는 거잖아. 이런 기회 흔치 않은 거 몰라? 옆방 선생님이 아시면 큰일 날 일이니 조심하고.”

“하하하. 감사합니다.”

차민재가 두 손으로 신용카드를 받았다. 민우는 액수 생각하지 말고 마음껏 먹으라고 당부했다.

돌아서려던 차민재가 뭔가를 떠올린 듯, 다시 민우를 바라보았다.

“아, 그런데 선생님. 아까 답안지 정리하다 봤는데, 소윤이 답안지가 없는 거 같더라고요. 청강이라 시험 안 봤어요?”

“아니. 시험 본다고 했는데 시험장에 안 왔더라. 연락도 없고.”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이소윤도 가끔 연구실에 놀러 오기 때문에 차민재도 통성명을 한 상황. 그래서 그녀의 답안지를 한번 보려고 했는데 이름이 없어서 물어본 것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민우가 핸드폰을 꺼냈다.

“한번 연락해봐야겠다. 그럼 이만 가 봐. 수고했다.”

“네. 선생님. 내일 봬요.”

꾸벅 인사한 차민재가 짐을 챙기고 연구실을 나섰다. 민우는 톡 어플을 실행시켜 이소윤의 대화창을 열었다.

‘톡보단 전화가 나으려나.’

잠시 고민하던 민우는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루루루.

통화연결음이 계속되었지만, 결국 이소윤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도서관에 있을 텐데. 어차피 빌려야 하는 책도 있으니 한번 가볼까?’

일과를 마친 이소윤은 중앙도서관의 정해진 자리에 앉아 늘 책을 읽곤 했다. 그 장면이 떠오른 것이다.

마음을 정한 민우는 빌려야 할 책 목록을 챙긴 뒤 연구실을 나섰다.

***

중앙도서관으로 들어간 민우는 우선 문학 관련 도서들, 그중 한국문학을 다룬 도서가 보관된 서가로 향했다.

‘일단 내가 필요한 책부터 확보해 놓고.’

민우는 자료 검색대에서 위치를 확인한 다음 책을 단번에 찾아냈다. 그제서야 이소윤이 자주 앉곤 했던 열람실로 들어갔다.

오늘로 중간고사가 대부분 끝났기 때문에 내부는 평소보다 한산했다.

하지만 여기는 명인대학교다. 수많은 엘리트가 미래를 준비하는 곳.

평소보다 한산할 뿐이지, 오늘도 많은 학생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덕분에 민우는 열람실을 기웃거리며 혹시나 이소윤이 없는지를 살펴야 했다.

‘아무래도 없는 거 같은데? 허탕인가.’

이소윤이 자주 앉던 자리는 물론, 서가에도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단념한 민우가 돌아서려던 그때, 그의 시야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잠깐. 저 학생은…….’

키가 크고 잘생긴 남학생 하나가 서가를 거닐고 있었다.

일전에 인문관 앞에서 이소윤에게 충고를 하던 바로 그 선배였다. 이런 우연이 있을까. 민우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어?”

남학생이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했다.

“박민우 교수님이시네요. 저번에 한 번 뵈었었죠?”

“기억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성함도 묻지 않았었네요. 성함이?”

“양지모입니다. 명인대 흉부외과에서 레지던트로 있습니다.”

“그러셨군요.”

통성명이 끝났다. 그제야 양지모가 민우에게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다른 건 아니고요. 혹시 이소윤 학생한테 무슨 일 있습니까? 오늘 시험에도 안 왔고, 연락이 안 되는 거 같아서 말이죠.”

순간 남학생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어 한숨이 흘러나왔다.

“소윤이 얘기를 듣지 못하신 것 같네요. 일이 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 며칠째 실습에도 나오지 않고 있어요.”

“실습까지…… 혹시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여기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닌데, 나가실까요? 괜찮은 포장마차를 알고 있거든요.”

“그러시죠. 대신 술은 제가 사겠습니다.”

두 사람이 자리를 옮겼다.

일전에 민우도 몇 번 와 봤던 그 포장마차였다. 일단 양지모는 소주 한 병과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안주를 시켰다.

“아, 그러고 보니 교수님 술 잘하시는지도 안 여쭤봤네요.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저 술 잘합니다. 국문과 출신들은 대부분 술하고 친하죠.”

“다행이네요.”

“양 선생님은?”

“저는 술 별로 안 좋아했어요. 그냥 이런 일 하다 보면 술을 마시게 됩니다. 맡던 환자가 안 좋게 되거나, 위에서 혼나거나, 뭐 이런저런 일들이 많으니까요.”

술과 안주가 나왔고, 민우가 소주병을 따서 잔을 채웠다. 왠지 이 자리가 어색하지 않았던 민우가 먼저 건배를 제안했다.

잔이 부딪치고, 두 사람이 시원하게 잔을 비워냈다.

“소윤 학생하고는 어떤 관계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냥 좀 오래 알고 지낸 사이죠. 의대 선배이기도 하고.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특별한 관계는 아닙니다.”

“소윤 학생 일에 감정이입을 하는 거 같아서요.”

양지모가 피식 웃었다. 이번엔 그가 빈 잔에 소주를 채웠다.

“그냥, 그런 일이 있고 나니까 걱정되기도 하고. 사실 그래서 도서관 갔어요. 혹시나 소윤이가 거기에 있을까 싶어서.”

“도서관에서 만난 게 우연이 아니었군요.”

“의대생이 중앙도서관에 기웃거릴 일은 별로 없죠. 의대 안에도 도서관이 따로 있으니까.”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민우가 진지하게 물었고, 양지모는 이번에도 술을 단번에 들이켠 뒤 말을 이었다.

“교수님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럼요. 죽음이야말로 인문학에서 가장 근사한 테마 중 하나니까요.”

“녀석은 그 고민에 빠진 겁니다. 죽음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선뜻 피부에 와닿지 않는 설명이었다. 설명이 더 필요했다. 민우는 이어질 양지모의 말을 기다렸다.

“며칠 전에…… 소윤이가 응급상황에 휘말린 적이 있었습니다. 길을 가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쓰러진 거죠. 50대 남성이었는데, 호흡과 맥박이 잡히지 않았더라고 하더군요.”

이야기가 시작됐다. 민우는 술잔을 쥔 채 양지모의 말에 집중했다.

“소윤이는 아직 학생이긴 하지만 실력이 좋습니다. 의사로서 갖춰야 할 순간적인 판단력도 무척 뛰어나고요. 사명감도 그렇고. 그저 면허만 없을 뿐이었죠. 그래서 녀석은 재빨리 응급처치를 전개했습니다. 여기까진 완벽했죠.”

갑자기 말을 끊은 양지모가 민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교수님은 심폐소생술을 해보신 적이 없겠죠?”

“없습니다.”

“심폐소생술을 할 땐 갈비뼈가 부러질 정도로 세게 압박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심도가 낮아 압박이 닿지 않거든요. 소윤이는 구급차가 올 동안, 그 20분간 쉬지 않고 환자의 가슴을 압박했어요. 그 가녀린 팔로 1초도 쉬지 않고 말이죠. 구급차가 온 뒤로도 합승해서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그런데…….”

양지모가 다시금 소주를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결국 다시 눈을 뜨지 못했어요. 그 환자.”

“하지만 그건 소윤이의 잘못은 아닐 텐데요. 양 선생님도 마찬가지고.”

“압니다.”

자조 섞인 웃음을 지은 양지모가 잔을 탁,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소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알아요. 최선을 다했다는 거 압니다. 그 길 근처에 AED라도 있었다면 상황이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소윤이 그 녀석이 울면서 이렇게 묻더군요. 사람을 살리지도 못하는 내가 의사가 되어도 좋은 걸까…… 하고요.”

민우의 입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 질문에 대답해주지 못한 제 자신이 싫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술이 술술 들어가네요.”

“그러고 보면 소윤이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학생이었죠. 그래서 제 수업을 청강하기도 했고.”

“이게 다 소윤이 때문이라는 말씀입니까?”

약간 따지는 듯한 어조였다.

민우는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는 모른다. 다만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적어도 그 어떤 의사보다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빨리 찾을 수 있을 겁니다.”

“…….”

“이소윤 학생 집 주소를 좀 알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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