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5)
‘오늘은 또 무슨 일로 호출이야?’
민우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수화기를 들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착신음과 함께 총장실 비서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박민우입니다. 전화하신 것 같아서요. 예. 그러셨군요. 잠깐은 괜찮습니다. ……지금이요? 곧 시험 감독 들어가야 해서 지금은 곤란합니다. 예. 시험 끝나고 바로 가겠습니다.”
민우는 전화를 끊었다.
총장실 비서는 용건을 간단히 전했다. 백성웅 총장이 면담을 원한다고. 왠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민우는 시험 감독이 끝나고 찾아가기로 했다.
‘또 무슨 이야기를 하실지.’
민우는 금방 걱정을 떨쳐내고 시험지를 챙겼다. 마지막으로 시험 문제를 결정한 다음, 커다란 봉투를 품에 안고 연구실을 나섰다.
강의실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민우가 강의실로 들어서자 학생들이 인사를 건넸다. 다들 긴장하거나 피곤한 기색이다. 시험 기간만 되면 대개 이렇다.
강단에 선 민우가 마이크를 잡았다.
“다들 준비 많이 하셨습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시험은 이게 끝이 아닙니다. 과제도 있고, 기말고사도 남아 있죠. 정 안 되면 재수강이라는 옵션도 있고.”
민우의 농담에 학생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 너무 크게 의미 두지 말고 편하게 생각을 정리해 주세요. 다시 한번 당부하지만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써 주시기 바랍니다.”
민우는 봉투에서 시험 문제가 적힌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칠판에 근사한 필체로 문제를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총 네 문제였는데, 그중 두 문제를 선택해서 서술하는 방식으로 시험이 시작되었다.
답안지를 한 장씩 받아든 학생들이 열심히 볼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서걱거리는 볼펜 소리가 요란하다.
‘어?’
시험 감독을 하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민우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평소에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던 이소윤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험에 대해 질문했었는데…… 왜 안 온 거지?’
혹시 못 봤나 싶어 민우는 학생들의 면면을 다시 살펴보았다.
모자를 깊게 쓴 사람들이 몇 명 있었지만, 그들은 이소윤이 아니었다.
‘이상하네.’
이소윤은 몇 번이나 시험을 치르겠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아무런 연락도 없이 시험에 불참했다는 게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바쁜 것 같지는 않은데. 바빠서 못 오는 거라면 톡을 했을 거고.’
민우는 좀 더 기다려 보기로 하고, 꼼꼼히 주변을 둘러보며 시험 감독의 역할을 다했다.
시험을 모두 마친 학생들이 답안지를 제출하고 하나둘 강의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끝내 이소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학생이 답안지를 제출하고 나자, 민우는 짐을 챙겨 다시 연구실로 돌아왔다. 차민재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선생님. 좀 도와드릴까요?”
“일단 학번 순대로 좀 분류 좀 해줘.”
“네.”
“혹시 소윤이한테 연락 온 거 없나? 찾아왔다거나.”
“아뇨. 그런 건 없었어요.”
민우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다 문득 내선 전화가 눈에 들어와, 총장과 면담 약속을 잡았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민우는 정장 재킷을 걸쳤다.
“나 잠시 나갔다 오마. 답안지 정리 끝나면 캐비닛에 넣어 둬.”
“다녀오세요.”
민우는 연구실을 나서 바로 총장실로 올라갔다.
***
“시험 기간이라 정신없으시지요?”
백성웅 총장의 첫 질문이었다.
이 기간에 만나는 교수들이 으레 받는 단골 질문 중 하나다.
“괜찮습니다. 늘 있는 일이라서요. 며칠 고생하면 됩니다.”
민우가 웃으며 답했고, 총장실 비서가 잘 우린 녹차를 고급스러운 다기에 내왔다.
백성웅 총장이 손을 내밀며 차를 권했다.
민우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찻잔을 쥐었다. 입에 가까이 대보니 향이 상당히 좋았다.
“휴머니티 프로젝트는 어떻게 잘되고 있습니까?”
“예.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풀리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민우는 찻잔을 내려놓고 조용히 총장을 바라보았다. 다행이라며 그냥 물러날 총장이 아닐 텐데?
하지만 총장은 적대심은커녕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하하하. 그렇게 보실 필요까지 있습니까. 으음, 예전에는 제가 좀 오해를 했더군요. 정연주 이사장 건 말입니다.”
“아, 그거요.”
“저도 나름 확인해 봤는데 박 교수 말씀대로 청문대 쪽과는 전혀 관련이 없더군요. 오해해서 미안합니다.”
사과까지 하니 당황스러웠다.
보통 나이가 많고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은 사과를 하기가 힘든 법이다. 바꿔 말하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편이지.
“아닙니다. 저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 대학도 대한그룹에서 연구비를 유치한 게 있으니 앞으로도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합니다.”
민우가 조심스레 제안했다.
그도 일전에 김명현이 총장에게 조언했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학본부에서 깊게 태클을 걸지 못할 것이라 짐작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총장이 순순히 물러날 줄은 몰랐다.
‘아니면…… 역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가?’
보통 상급자가 이런 유화책을 쓰는 경우는 몇 가지 없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거나, 아니면 다른 필요가 생겼거나.
‘아무래도 후자 쪽이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민우는 총장의 다음 멘트를 기다렸다.
“내가 좀 알아보니 공교롭게도 우리 교양학부의 프로그램과 휴머니티 프로그램 모집 기간이 겹치더군요.”
“예. 하지만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커리큘럼이나 강사진이 다르니 꼭 필요한 사람만 고민해서 신청하겠지요. 그리고 이런 프로그램이 늘어난다는 건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대중이 배울 권리가 충족되는 셈이니까요.”
“음, 그렇겠지요.”
녹차를 한 모금 들이켠 백성웅 총장이 몸을 살짝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은근한 어조로 민우에게 말했다.
“박 교수는 우리 명인대의 상징입니다. 특히 인문학 분야에서 무수히 많은 업적을 남겼지요. 이사장님은 물론 다른 이사님들도 매번 칭찬하시기도 하고.”
“과찬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프로그램에 강사로 나설 수 없다는 건 나름 유감이었습니다.”
그렇게 말을 마치며 총장이 탄식을 내뱉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발언이었다. 이번 교양학부의 결정은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민우는 그냥 흘려들었다.
대학의 모든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유감이라는 말을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도 세계적인 석학인 박 교수가 이번 프로그램에서 뭐라도 하나 해주셔야 우리 대학도 그렇고 동료 교수들의 체면도 좀 살지 않을까요?”
“송구스럽지만 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
“얼마든지요.”
“방금 하신 말씀, 진심입니까?”
민우는 진짜 궁금해서 물었고, 백성웅 총장은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물론이고 말고요. 나는 명인대의 총장입니다. 대학과 구성원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을 처리해야 할 의무가 있지요.”
민우는 백성웅 총장이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는지 감이 섰다.
‘아마 윗선에서 뭔가 지시가 내려온 거겠지.’
어떻게 보면 총장도 이사회의 꼭두각시와 다를 바 없다. 이런 대형 사립 대학에서는.
연일 매스컴이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때려대니 이사회에서 손을 썼을 확률이 크다.
“여론이 걱정되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명인대엔 저 말고도 훌륭한 교수님들이 많으시니까요. 그분들에게도 기회가 돌아갔으면 좋겠네요.”
“에이, 그러지 말고. 큰 건 안 바랍니다. 이번 인문학 프로그램의 오픈 행사에서 축사를 좀 맡아주십시오.”
민우는 미소를 지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 태연한 표정이 백성웅 총장을 더욱 다급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 민우의 허락을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민우의 예상대로 이사진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번 교양학부 인문학 프로그램에서 더 이상 잡음이 나오지 않게 하라는 이사장의 지시가 있었다.
그 지시를 어길 만큼, 백성웅 총장은 진취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묘한 말씀이네요.”
“묘한 말씀이라니요?”
백성웅 총장이 조심스레 물었고, 민우가 답했다.
“저는 교양학부에서 주관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외부 매체를 통해 입수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냐면, 대학 내부에서는 아무도 저에게 배려를 해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야 대학이라는 게 작은 조직도 아니고…… 알력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더욱 그렇다는 겁니다. 제가 알기로 교양학부 교수님들이 그렇게 단번에 스탠스를 바꿀 만한 분들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죠.”
민우를 존경하는 사람의 수만큼 민우를 질투하는 사람도 많았다. 특히 인문학을 다루는 교양학부에서는 민우의 반대파가 은근히 있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관여해 달라고 하니 저로서는 좀 당황스러울 수밖에요. 게다가 건너 듣기론 총장님께서는 휴머니티 프로젝트에 굉장한 반감을 가지고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민우가 대학 윤리위원회에 회부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도는 것도 들은 바 있었다.
백성웅 총장이 손을 내밀며 적극 부인했다.
“그건 오해입니다. 누구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저는 소문을 잘 믿지 않습니다. 당사자께서 아니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믿을 근거는 없겠죠.”
하지만 민우는 총장의 속내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단순히 윗선의 지시만으로 움직일 만한 사람은 아니다. 겸사겸사 다른 의도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정규 강의도 아니고 한 번 하고 마는 기념 축사에 이렇게까지 고민하게 만드시다니. 역시 총장님이십니다.”
“고민할 게 뭐 있습니까? 그냥 유명인사로서 연단에 올라 잠깐이라도 좋은 말씀을 학생들에게 전하는 건데요. 늘 하시던 일 아닙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라…… 총장님의 제안을 거절해도, 받아들여도 저에게 문제가 되니까요.”
민우의 일침에 백성웅 총장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의 순간이었고,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유지했다.
“문제가 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이건 강요가 아니라 박민우 교수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거니까요.”
민우는 나름 백성웅 총장이 머리를 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절하면 그 자체로 문제 삼을 게 분명하다. 개인적인 일 때문에 소속 집단을 우선시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가능하니까.
하지만 수락하게 되면 그것도 문제다.
휴머니티 프로젝트는 공익사업에 가깝지만, 어쨌든 대외적으로는 인문학 프로그램으로 경쟁 구도가 세워져 있는 상황.
만약 그렇게 되면 민우의 포지션이 난감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
민우는 웃었다.
어차피 기념 축사라면 그 내용은 본인이 정하는 거다. 혹여라도 대본을 전해 준다고 하면 거절하면 그만인 거고.
기왕 무대가 마련되었으니 뜻깊은 한마디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우가 힘주어 말했다.
“좋습니다! 총장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