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4)
삐이―
내선 호출이 오자 백성웅 총장이 읽던 서류에서 눈을 떼고 책상 한쪽에 위치한 버튼을 눌렀다.
― 실례합니다. 총장님. 지금 이사장님께서 오셨다는 보고입니다.
“뭐라고? 왜?”
― 그건 저도 잘…….
대학의 왕이 총장이라면, 이사장은 대학을 비롯한 여러 관계기관의 황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대학에 찾아온 것이다.
‘대체 왜?’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떠올리면서도, 백성웅 총장은 손님 맞을 준비를 서둘렀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이사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백발이 무성한 작은 체구의 사내였는데, 그는 명인대를 비롯한 여러 교육기관을 거느리고 있는 명인재단 이사장 이태하였다.
세계적인 대학으로 우뚝 선 명인대를 설립한 이명인의 아들이기도 했다.
“이사장님. 오셨습니까. 미리 연락을 주시지 않고선…….”
“내가 못 올 곳에라도 왔나?”
“하하하. 설마요. 자, 어서 앉으시죠. 윤 비서. 가서 이사장님 평소에 드시던 차 빨리 준비해 와.”
비서가 고개를 숙인 뒤 밖으로 나갔고, 소파에 편히 앉은 이태하 이사장은 답답한 듯 넥타이를 살짝 풀었다.
눈치를 보던 백성웅 총장은 테이블에 있는 내선 전화를 들더니 비서에게 시원한 음료를 준비하라고 다시 주문했다.
총장이라는 직위에 어울리지 않게 바쁘게 움직이는 백성웅 총장.
이태하 이사장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불만이 있군. 좋은 일 때문에 온 건 아냐.’
백성웅 총장은 30여 년 이상을 대학에서 보냈다. 교수로, 그리고 행정가로. 그 오랜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듯 이태하 이사장의 심기를 읽으려 노력했다.
결국 이태하 이사장의 입이 떨어졌다.
“요즘 여기가 좀 시끄럽다는 보고가 있더군.”
“아아, 별일 아닙니다. 교양학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하나 있는데, 기자들이 요즘 건수를 못 찾았는지 생각보다 오래 물어뜯고 있죠. 곧 잠잠해질 겁니다.”
백성웅 총장은 열심히 설명했다. 하지만 이태하 이사장의 노기를 잠재우진 못했다.
“박민우 교수의 이름이 오르내리며 문제 되고 있는데 별일 아니라고?”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이태하 이사장은 누구의 편도 아니지만, 자신이 소유한 교육기관에서 불협화음이 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낮고 조용하지만 분명한 경고가 서린 목소리로 이태하 이사장이 재차 물었다.
“백 총장은 지금 이게 정말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겐가? 리스크 관리가 전혀 되지 않고 있는데. 그러다 박 교수가 다른 학교로 옮기기라도 한다면 그 책임을 질 수 있겠나?”
이태하는 물론 다른 이사진들도 민우를 보물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집착에 가까운 애착을 보이고 있다.
한국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교수로 모셔오려는 경쟁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괜한 알력 싸움 때문에 민우가 명인대를 버리는 그림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래선 안 되겠군.’
백성웅 총장의 머리가 반짝 돌아갔다. 프레임을 바꿔야 할 때가 온 거라 직감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지금은 무조건 빌어야 할 때가 아니라고.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어디 한번 해보시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박 교수는 사리사욕을 채우려 우리 대학에 협조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리사욕’이라는 표현에 이태하 이사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협조하지 않다니?”
“얼마 전의 일입니다. 박 교수가 하려는 프로젝트를 우리 대학에서 주도해서 같이 하자고 제안했었는데,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말았지요.”
“그 휴머니티 프로젝트인가 뭔가 하는 거 말인가?”
“맞습니다.”
이태하 이사장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긍정적인 미소는 아니었다. 액면 그대로 웃긴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어떻게 사리사욕이라 할 수 있나? 이미 좋은 공익사업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인데. 대한그룹에서 거액의 후원금을 유치한 멋진 사업이야. 거기에 대한전자에서 수억 대에 이르는 전자기기도 후원하지 않았던가?”
“저는 사업의 질적인 면에 대해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럼?”
“어쨌든 그는 명인대 소속입니다. 그런데 청문대 이사장이 포함된 팀에서 그 사업을 추진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죠. 넓은 의미에서의 배임입니다.”
“배임이라.”
백성웅 총장의 강변에 이태하 이사장이 시선을 창가로 돌렸다. 오후에 시작되었던 비가 그치지 않고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자, 백성웅 총장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물론, 상황을 이렇게까지 키운 제 잘못이 큽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이사장님.”
그가 완벽하게 꼬리를 내렸다.
하지만 그것은 의도된 연출이었다. 지금 이태하 이사장이 원하는 것은 절대적인 충성심이었으니까.
창밖을 향하던 이태하 이사장의 시선이 다시 백성웅 총장 쪽으로 돌아왔다.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져 있었다.
“됐네. 자네한테 뭐라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건 아니니 오해는 말고.”
“갑작스레 오셔서 좀 당황하던 차였습니다.”
“근처에 지나갈 일이 있다가 생각나서 온 게야. 해줄 말도 있고 해서.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도 적지 않잖나?”
백성웅 총장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이야기든 달게 받겠다는 그런 의미였다.
“자네, 대학엔 몇 년이나 있었지?”
“30년 조금 넘게 있었지요.”
“그럼 잘 알 거야. 사업을 하다 보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가 더러 있다는 걸. 하지만 그렇다고 눈 뜨고 당하면 곤란해. 자네가 데려온 그 유능한 친구가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닌다며? 교육은 비즈니스라고.”
백성웅 총장은 입을 다물며 고개를 숙였다. 방금 언급은 이태하 이사장이 김명현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태하 이사장이 조용히 명했다.
“비즈니스는 깔끔할수록 좋은 게야. 박민우 교수 건만큼은 빨리 봉합해서 뒷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교양학부 인문학 프로그램에 박민우 교수도 관여할 수 있게 좀 해 봐.”
“예?”
뜻밖의 명령에 백성웅 총장이 깜짝 놀랐다. 이태하 이사장은 그 반응을 즐겁게 감상하려는 표정이었다.
“상식적으로 납득되는 방향으로 일을 해결하라는 말일세. 우리 대학에 박민우 교수가 있는데 그가 인문학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그렇게 말을 매듭지은 이태하 이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대로 반문하지도 못한 채 백성웅 총장도 따라 나가 그를 배웅해야 했다.
문을 나서며 이태하 이사장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음 주 정례 회의 때 좋은 소식 들을 수 있으면 좋겠어. 자네의 역량을 기대하지.”
“맡겨 주십시오.”
총장이 꾸벅 인사했다.
하지만 그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민우는 구워삶기에 너무 질긴 사람이었으니까.
배웅을 마치고 돌아온 백성웅 총장이 소파에 걸터앉았다.
‘아무래도 수를 써야겠어.’
그렇게 결정한 그는 내선 전화를 들었다.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고, 잠시 후 착신음 소리가 들렸다.
“날세. 지금 바로 총장실로 올라오도록.”
백성웅 총장이 나지막이 명령했다.
***
“봄비치고는 꽤 길게 오네요.”
이수빈이 창밖을 응시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소파에 앉아 있던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 그녀의 곁에 섰다.
“왠지 장마 느낌이란 말이지.”
“아직 여름도 아닌데?”
“뭔가 느낌이 그래. 그냥 기분 탓이겠지만.”
“장마도 나름 운치 있고 좋지 않아요?”
“평론가들은 다 그런가?”
민우가 피식 웃자 왠지 놀림을 받은 것 같아 이수빈이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다.
아무튼 일기 예보에 의하면 간헐적으로 비가 더 오다 월요일부터 화창하다고 하니, 민우는 천천히 월요일을 기다리기로 했다.
“참, 내일 어떻게 됐어? 누나네랑 밥 먹기로 했다며.”
“내일 저녁으로 결정했어요. 윤아 데리고 가면 돼요.”
“오랜만이네. 같이 저녁 먹는 것도.”
민우의 누나 박민아는 출산 후 일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 중이다. 최민식도 최근 정년을 보장받았기 때문에 특별히 문제는 없었다.
그래서 박민아는 시간이 날 때마다 가끔 조카를 데리고 집에 오곤 했다. 이렇게 최민식까지 다 같이 모여서 밥을 먹는 건 오랜만이었다.
이수빈이 물었다.
“아주버님은 요즘 어떠시대요?”
“바쁘시지 뭐. 재환 선배, 그리고 예진 선배 이렇게 셋이 학회 하나 하시는 것 같던데, 안 그래도 그쪽에 논문 하나 보내 달라고 해서 난감하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물이 너무 많이 들어오면 홍수야.”
적당한 농담에 두 사람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러다 이수빈이 말했다.
“아니면 제 논문이라도 좀 보낼까요? 발표 안 한 거 하나 있는데.”
“매형이 하는 학회 KCI급 아닌 거 같던데 괜찮아?”
“KCI급이면 좋긴 하지만, 요즘 인증받는 것도 쉽지 않잖아요. 투자한다고 생각해야지 뭐. 그리고 존경하는 선배님들인데 도움을 좀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도 병아리 때 도움 많이 받았는데, 지금 바쁘다고 입 싹 닦으면 좀 그렇잖아.”
“그렇긴 하지.”
민우가 이수빈의 말에 적극 동의했다.
문득 예전에 이재환, 최민식, 강예진 이 세 사람에게 논문 합평을 받았던 그때가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정말 도움을 많이 받았었다.
물론 그들이 도움이 필요할 때 후배로서 도움을 준 적도 있지만, 후배가 그냥 도와준 것과 선배가 끌어준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민우도 결심했다.
“좋아. 그럼 나도 하나 보내야겠다. 아니면 아예 오프라인에서 같이 발표할까?”
“그것도 좋고요.”
“그럼 내일 만나서 한번 말씀드려보자. 분명 좋아하실 거야.”
“그 정도면 내일 저녁은 공짜로 얻어먹을 수 있는 거겠죠?”
“하하하하.”
민우가 아직 도전하지 못한 영역이 하나 있었다.
바로 학계 개혁.
말이 개혁이지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해 ‘그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나 대중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는 취지의 개혁인 것이다.
문학 관련 학회는 특히 어렵다. 전문용어도 많고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고도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우는 예전부터 대중 참여형 학회를 만들고 싶었다.
학부생은 물론, 중고등학생까지 누구나 편히 참여해 문학에 대해 토론하고 배울 수 있는 무대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정확히는 민우가 석사 시절 떠올린 아이디어였다. 바로 소르본의 밤과 IAHS 총회를 거치고 나서 말이다.
그때 받았던 신선한 충격은 아직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언젠가는 우리가 학계의 주역이 될 거야. 그때는 좀 더 재미있는 학회를 만들어보자고.”
“오빠가 예전부터 입버릇처럼 말했던 그 학회?”
“그래.”
“기대되네요. 오빠가 만들 젊은 학회는 어떤 풍경일지.”
시간을 확인한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시험 감독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오늘은 목요일. 민우의 교양 강의인 <존재와 영혼의 형식>의 중간고사 시험이 치러진다.
다른 과목은 모두 시험을 치르고 채점까지 끝내 놓았지만, 이 강의는 인원이 많아 마지막으로 일정을 잡았다.
“벌써 가게요?”
이수빈이 다소 아쉽다는 듯 물었다.
서로 일이 바쁘고, 집에서는 육아에 치이다 보니 데이트다운 데이트는 꿈도 못 꾼다. 가끔 이렇게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전부다.
민우가 손을 들었다.
“오늘 시험 있거든. 이따 저녁에 윤아 재우고 와인이나 한잔하자.”
“웬일로?”
“그냥.”
“알았어요. 잘 다녀와요.”
민우가 다시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오자 차민재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아까 전화가 몇 번 오던데 한번 확인해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그래?”
민우는 자리로 돌아와 내선 전화의 디스플레이를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가 3건이나 찍혀 있었다.
전화번호는 모두 같았는데, 모두 총장실에서 걸려온 전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