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3)
아무리 민우라고 해도 지금 상황에서 웃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실제로 민우를 둘러싼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백성웅 총장은 민우의 부적절한 처신을 문제 삼아 교내 윤리위원회를 소집해야 한다고 연일 으름장을 놓고 있었고 김명현을 비롯한 몇몇 인사들이 찾아와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민우는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마치 지금 자신을 둘러싼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덕분에 김명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마자 다시 잔을 내려놓아야 했다.
“좀 놀랍군요. 여유입니까? 아니면 다른 계획이 있으신 건지.”
“다른 건 아니고…… 뭔가 실장님께서 근본적으로 잘못 짚고 계신 것 같아서 말이죠.”
“근본적으로 말입니까?”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민우가 다리를 꼬곤 편안한 어조로 설명을 시작했다.
“먼저 실장님의 지론인 ‘교육은 비즈니스다’에 대한 견해를 묻고 다니는 건 실장님을 공격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단지 궁금했던 겁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지 않습니까? 비즈니스가 교육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하는 또 다른 길일 수도 있겠죠. 그래서 물어보고 다닌 겁니다. 제 편협한 시야로는 잘 판단이 서지 않아서 말이죠. 얼마 전엔 센트럴 북스의 제임스 사장님께도 같은 질문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럴듯한 대답을 들었죠.”
김명현은 입을 꾹 다문 채 민우를 응시하기만 했다. 이런 식의 대답을 들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오히려 화를 내며 두 번 다시는 연구실 근처에 얼씬거리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도 불쾌했다.
민우는 지금 자신에게 가르침을, 보다 정확히는 가치관을 관철시키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저는 당신과 경쟁하고 있지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피하려는 겁니까? 결과가 두려운 나머지…….”
김명현이 애써 반문했지만 민우의 환한 미소에 또다시 묻혀 버렸다.
“어떤 일이든 결과는 두렵습니다. 하물며 강의실에서 학생을 만나는 것도,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것도 마찬가지죠. 내 행동에 누군가가 영향을 받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김명현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민우는 설명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저는 그게 두려운 겁니다. 내가 말하는 것들, 그리고 내 행동들이 그 사람에게 과연 긍정적인 영향만 줄까……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걱정하고 고민하고 있지요.”
“포장에 능숙하시군요.”
“포장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렇게 받아들이셔도 됩니다. 저는 김 실장님을 위해 명인대에서 강의하고 있는 건 아니니 말이죠.”
민우의 어조는 여전히 차분했다.
순간 김명현은 머릿속으로 ‘금강석’을 떠올렸다. 매우 단단하고 아름다우며 쉽게 변하지 않는 어떤 근본적인 광물을.
어쩌면, 민우에게 성질이 있었기에 이런 반발심이 드는 걸지도 모른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김명현은 ‘질투’라는 단어를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려야 했다.
“무엇보다도…….”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는지, 민우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김명현이 지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 경쟁하려고 프로젝트를 하는 게 아닙니다. 돈을 벌려고 하는 건 더더욱 아니죠.”
이어 민우는 왼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려는 것뿐입니다. 제가 하는 일은 서재에서 읽고 싶은 책을 꺼내, 흔들의자에 몸을 맡기고 편안한 자세에서 독서를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민우는 노벨문학상 수상이 결정되었을 때 서지훈 교수가 자신에게 한 말을 끊임없이 되새기고 있었다.
그때 서지훈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 노력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기 싫은 일을 계속 반복하는 것.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즐기는 것. 노력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세상이야. 애초에 노력을 권유하기도 쉽지가 않지. 그래서 네 역할이 중요해. 학문이든 뭐든 괜찮아. 좋아하는 일을 즐긴다는 게 뭔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도록 해라.
민우는 단순히 노력만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노력하면서도 그 순간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뜻을 함께하는 동료들과 의기투합해 더욱 즐겁게 일을 벌이곤 했다.
이번 ‘휴머니티 프로젝트’도 그랬다.
때문에 온갖 이권과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던 김명현은 억지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저는 제가 배제된 것에 대해 교양학부에 항의하지도 않았고, 이렇게 불쑥 찾아와 불편한 말씀을 하시는 김 실장님을 내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문득 궁금증이 드는군요. 대체 왜 김 실장님은 이렇게 승부에 집착하시는지. 혹시 저에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으십니까?”
뜻하지 않은 타이밍에 민우의 찌르기가 들어갔다.
서지훈 교수에게 들은 뒷이야기가 많다. 지금까지 내색하지 않고 있었지만, 이제는 말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
역시나 정곡을 찔린 김명현 실장은 불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이렇게 솔직한 표정을 보여주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동물이라고 하지요. 그건 나도, 박 교수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동감합니다.”
“박 교수님은 경쟁이다 뭐다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지만,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십시오. 과연 그들이 세간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울까요?”
민우는 생각에 잠겼다.
몇몇 동료의 모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때 대학에서 불이익을 당했던 한진섭은 물론, 한일대에서 내쳐진 서강일의 모습까지.
대학원생 시절이었다면, 민우는 그 말에 크게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오히려 미소를 지은 건 김명현이 아닌 민우 쪽이었다.
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간의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중요한 건, 그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때까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발전시켜야 한다는 거겠죠.”
“그렇게 거창하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본인은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시나 보군요. 하긴, 이미 학자로서 정점을 찍으시지 않으셨습니까? 학문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완성된 인간으로…….”
“천만에요.”
김명현은 불쾌했다.
민우가 말을 끊어서가 아니었다. 그의 두 눈에 담겨 있는 진심이 느껴진 탓이었다.
“학기 끝날 때마다 강의 평가를 보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부정적인 코멘트들이 저 자신을 자극하는 자양분이 되기도 하지요.”
“과연, 그렇군요.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다음 기회에 또 인사드리지요.”
피식 웃은 김명현이 가볍게 묵례하고 연구실을 나섰다.
‘감정의 골이 생각보다 깊은 것 같네.’
오해를 풀고 싶었지만, 그게 쉽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부딪쳐야 하는 걸까.
다소 무거운 발걸음으로 자리로 돌아온 민우는 의자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소나기라도 내리려는지, 맑았던 하늘 위로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민우는 다시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했다.
툭투툭!
쏴아아아―
역시나 굵직한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민우는 창가로 다가갔다.
왠지 이 싸움이 소나기가 아니라 장마가 될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어서.
탁!
민우가 창문을 닫았다.
***
“박 선생! 소식 들었어?”
문을 거의 박차다시피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한진섭이었다. 그는 우산을 들고 있었는데도 비를 잔뜩 맞았다.
오후 일찍 내리기 시작한 비는 저녁이 되어서도 그치지 않고 있었다.
한진섭은 비로 젖은 머리를 손으로 툭툭 털며 다가왔다. 그리고 핸드폰을 다짜고짜 민우의 얼굴로 들이밀었다.
일단 민우는 손으로 핸드폰을 막았다.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지금 일하는 거 안 보이나?”
“지금 일할 때가 아니라니까?”
“어휴, 채점할 게 수두룩 빽빽이다. 너희 국제어학원은 객관식이라 아주 살판났지?”
말 그대로 민우의 옆자리엔 채점해야 하는 답안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의 강의 특성상 객관식 시험이 전혀 없어, 학생들이 길게 써낸 답안지가 많았다.
그 답안지를 공정하게 채점하려면 빠짐없이 모두 다 읽어야 한다. 제한 시간 내에.
“됐고, 일단 이거나 좀 봐! 그 김명현인가 하는 놈이 또 한 건 한 거 같아.”
그제야 민우가 핸드폰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우고 한진섭이 가리킨 부분을 읽었다.
교양학부 홈페이지에 올라온 팝업 공지였다.
민우의 눈매가 좁혀졌다.
“신청 기간이 다음 주 월요일로 연기……?”
말 그대로였다.
본래는 교양학부 인문학 프로그램 수강 신청일이 내일이었는데, 다음 주 월요일로 갑자기 바뀐 것이다.
사유는 내부 전산망 점검.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로 회수한 한진섭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부 전산망 점검이라는 공지가 그럴듯한 핑계로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이냐?”
“글쎄. 오비이락일 수도 있지 않나.”
“명인대 전산망이 무슨 학부 알바생이 만든 것도 아니고. 기존 접수 시스템 쓰는 건데 점검이 왜 필요해? 게다가 명인대가 무슨 구멍가게도 아니고 전산망 점검이 필요한 걸 사전에 캐치를 못 했을까? 말도 안 되는 일이지.”
“흐음.”
민우는 반박하지 못했다. 한진섭의 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정리하자면, 명인대 교양학부가 휴머니티 프로젝트를 방해하기 위해 일부러 수강 신청일을 연기했을지도 모른다는 것.
휴머니티의 수강 신청일이 다음 주 월요일이라는 이야기는 아까 연구실로 찾아온 김명현에게 말했다.
지금은 휴머니티 홈페이지에 수강 신청 날짜가 공지되지 않은 상황이니, 팀 307호 멤버를 제외하고 아는 사람은 김명현이 전부다.
결국 김명현이 그 정보를 토대로, 자신의 권한을 이용해 교양학부 인문학 프로그램의 모집일을 순연했을 가능성도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민우는 그저 웃어넘겼다.
“우리가 대학본부에 찍힌 거 어제오늘 일이냐. 나는 무슨 임용된 첫해에 이렇게 버라이어티한 교직 생활을 보내고 있는지 모르겠네.”
“넌 이 상황에서 참 웃음이 잘 나오네. 가끔 보면 신기하단 말이지. 인생 2회차냐?”
“뭐가 그렇게 걱정되는 건데? 지원자가 적을 거 같아서? 아니면 우리 프로젝트가 실패할 것 같아서?”
“굳이 꼽으라면 둘 다.”
자리에서 일어난 민우가 웃으며 한진섭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진섭의 마음도 십분 이해한다.
가뜩이나 인문학은 수요가 다른 분야에 비해 적은 편이다. 관심은 많아도 막상 시간을 내서 배우기가 애매한 분야. 수강생을 서울에서 백 명 이상 모으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누구라도 경쟁적으로 수강생을 모으는 상황은 피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도 민우는 이 과정 자체도 오롯이 경험으로 흡수하고 싶었다.
“진섭아. 지원자가 적으면 다음 학기에 더 열심히 홍보하면 되고, 우리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경험을 얻을 테니 다음 프로젝트가 실패하지 않도록 노력하면 되는 거야. 뭐 그렇게 급하냐?”
“그걸 몰라서 그래? 기왕 하는 거 한 큐에 잘되게 하려고 그러는 거지.”
“한진섭 선생님. 우리 천천히 갑시다. 시간은 충분하니까. 참, 이제 홈페이지에 수강 신청 공고 올려야 하지?”
“그렇지.”
한진섭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까 회의 때 잠정 결정된 것이 바로 다음 주 월요일 오전이었다. 오늘 밤 중으로 날짜를 확정해 팝업 공지할 계획이었다.
한진섭이 조심스레 제안했다.
“아무래도 날짜를 좀 미루는 건 어때? 교양학부 인문학 프로그램 수강 신청 날짜는 좀 피하고 싶은데.”
평소라면 팀원들의 의견을 구하자고 말했을 터였다.
하지만 한진섭의 예상은 빗나갔다.
“아니. 그냥 다음 주 월요일로 가자.”
“진심?”
민우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단짝 한진섭은 그 미소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는 반론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휴머니티 홈페이지에 안내 공지가 올라갔다.
민우가 말한 대로 월요일에 수강 신청을 받는다는 확정 공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