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32화 (332/500)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2)

‘독서의 밤’ 본방송이 나가고 다음 날, 민우와 허윤이 출연한 클립 영상이 무투브에 올라갔다.

제작진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간접 홍보가 시작된 것이다.

민우는 홈페이지 트래픽 정보 페이지를 띄워 놓고, 팀 307호 멤버들과 톡으로 실시간으로 소통했다.

나: 슬슬 입질 온다. 페이지뷰 엄청나게 늘고 있어

섭섭한애: 네이비 실검 쪽은 어떰?

내무부장관: 아직 20위권 밖에 있는 거 같아요

나: 순위 올라가는 건 시간 문제야. 한번 잘 따라가 보자고

일단 채팅을 마무리한 민우는, 실시간으로 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는 방문자 집계를 살펴보았다. 1분 단위로 갱신되는 통계는 계속 신기록을 경신 중이다.

그때 순수 방문자수를 집계하는 패널에 숫자가 1,000이 넘었다.

나: 방금 방문자 천 명 넘었다. 무투브 쪽은 어때?

섭섭한애: 클립 영상 하나 200만 지금 막 넘었음. 윤이 팬카페 쪽도 보고 있는데 휴머니티 관련 글 점점 많아지고 있어

나: 오케이. 문의사항 쪽은?

내무부장관: 아직 제대로 들어온 건 없어요. 스무 개 정도 들어왔는데, 다들 윤이 응원하는 메시지예요

나: 그런 것들도 답장해 주는 게 좋을 거 같아. 어차피 지금은 손 놓고 있어야 하니까, 문의가 많이 들어오기 전에 미리 처리하자고

내무부장관: 넵

주님: ㅇㅋㅇㅋ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나고, 본격적으로 문의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민우와 수빈은 준비한 대로 움직였다. 각각 게시판과 이메일을 맡아서 답변했고, 한진섭과 주예린은 커뮤니티 반응을 살폈다.

잠시 후, 민우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은데?’

간만 살짝 보는 사람들이 대다수겠지만, 답변 처리 속도보다 질문이 들어오는 속도가 더 빠른 것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답변이 하나 나갈 때마다, 메일과 게시물이 한두 개씩은 더 쌓이기 시작했다.

섭섭한애: 자유게시판 응원글로 난리다. 이거 잘하면 테러 들어올 수도 있겠는데?

나: 무슨 테러?

섭섭한애: 커뮤니티에 매크로 돌려서 도배하는 분탕종자들 가끔 있거든

나: 그런 건 알아서 처리해 줘

섭섭한애: ㅇㅇ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민우와 수빈은 밤을 새우다시피 해서 통계자료를 만들었다. 그리고 민우의 연구실에 도란도란 모여 자료를 공유했다.

휴머니티의 운영은 팀 307호 원년 멤버들이 맡았기에 모인 사람도 민우를 포함한 네 명이었다.

자료를 읽던 주예린이 미간을 좁혔다.

“게시판과 이메일에 등록된 문의가 1400건 정도 되고, 그중 프로그램에 관련된 문의가 100건…… 애걔? 이거밖에 안 돼요?”

“나머지는 윤이 팬들이 보낸 응원 메시지나 스팸 글이었어.”

민우가 대답하자 팀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민우는 긍정적으로 판단했다.

“전체적인 비율을 따질 수는 없고, 그래도 100명이나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져줬다는 사실에 주목해야겠지.”

“하긴, 어차피 수강생들만 이용하는 공간은 아닐 테니까요. 대관이나 협찬 문의는 없었나요?”

“그건 아직 없었어. 커리큘럼 쪽은 어때?”

이 질문은 커리큘럼을 총괄하고 있는 한진섭이 받았다.

“이쪽도 준비 거의 끝났어. 예전에 청문대에서 했던 거 있잖아, 한국문화교육원 커리큘럼. 그거 살짝 참고해서 디벨롭하고 있다.”

‘휴머니티’라는 이름답게 인문학 관련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민우는 인문학 개론, 이수빈은 문학 및 문화평론, 주예린은 문예창작, 한진섭은 어학 관련 강의를 맡아서 진행할 계획이다.

과학고 출신이자 물리학과를 복수 전공한 정연주는 ‘인간과 과학’이라는 테마로 매주 한 번씩 특강을 맡게 되었다. 최근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어, 고도로 발달한 기술 시대에서 인간의 위상이 어떻게 변할지를 고찰한다고 한다.

거기에 출판계에서 일하고 있는 이유리와 장철호도 ‘책 읽어주는 사람’ 컨셉으로 좋은 책을 소개하는 독서 강의를 연다. 위에서 언급한 커리큘럼이 주로 공부하는 것이라면, 이 두 사람의 시간은 쉬면서 편히 들을 수 있는 강좌로 기획됐다.

여기에 한일대 멤버인 서강일과 강민희가 특강 형식으로 달마다 한두 번 정도 강의하게 됐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이 ‘휴머니티 프로그램’의 기본 커리큘럼이다.

한진섭은 사무국장 포지션에서 강의 내용과 일정 등을 세부 조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은이가 자기도 강의하고 싶다던데? 아까 연락 왔어.”

“무슨 강의?”

“그림.”

다들 의외라는 표정이었지만 민우만 씨익 웃었다.

사실 인문학에서 미술을 빼놓을 순 없다. 활자만큼이나 그림도 유서가 깊기 때문이다. 그림을 직접 그리지 않더라도, 보는 것만으로도 배울 게 많다.

안 그래도 그녀에게 강의를 부탁해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저절로 복덩이가 들어올 줄이야.

“들어올 기자재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해. 멀티미디어 강의는 처음이라 좀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내년을 생각하면서 잘 다듬어 보자고.”

“그럼 오케이 사인 줘도 되는 거지?”

“그래. 대신 정원은 50명 더 늘리자.”

“콜.”

한진섭이 바쁘게 적기 시작했고, 원년 멤버들은 맡은 부분에서 공유할 만한 사항들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 시간 정도 지나고, 의논을 마친 멤버들이 각자의 연구실로 흩어졌다.

한숨을 내쉰 민우가 책상으로 돌아와 앉았다.

“준비 잘되고 있나 보네요.”

차민재가 민우의 컵에 커피를 리필했다. 민우는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각자 성격이나 관심사가 다르지만 하나만큼은 공통점이 있거든.”

“그게 뭔데요?”

“하고 싶은 일엔 득달같이 달려들어 몰두하는 거. 조금 막연한가? 음…… 그래. 사고 싶은 거 인터넷으로 주문했는데, 매일 배송조회 하면서 어디쯤 왔나 확인하는 바로 그 기분이라고 할까?”

“무슨 느낌인지 확 와닿네요. 배송조회를 공부로 치환하면 되니까. 아무튼 정말 대단한 거 같아요. 선생님들이라서가 아니라 곁에서 보고 있으면 진심이 느껴지거든요.”

“칭찬한다고 학점 안 오른다.”

“하하하. 그런 거 아니고요.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해요. 이렇게 의기투합해서 같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게.”

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차민재가 채워준 커피잔을 들며 말을 받았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동료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나는 운이 좀 좋아서 멋진 친구들을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지만, 너도 마음 터놓고 같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 두는 게 좋아.”

“명심하겠습니다.”

“요즘은 소규모 연구 공동체도 많으니, 너무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지 말고 좀 밖으로 나가라고. 곧 꽃놀이 시즌인데 연애도 좀 하고.”

차민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잘 나가시다 마지막에 염장을 지르시네요. 휴우, 돈 없고 공부만 해야 하는 남자 대학원생을 만나줄 사람이 있을까요?”

“오히려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걸? 적어도 네 외면만 보는 게 아니라는 말이니까. 내 와이프가 그랬던 것처럼.”

“이수빈 선생님은…… 좀 논외이지 않을까요?”

“그런가?”

민우와 이수빈의 연애 이야기는 여러 매체에서 회자될 정도로 유명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지방대 출신 인문학도에게 찾아온 사랑 이야기는 누구나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으니까.

이수빈은 ‘독서의 밤’에 출연해 민우와의 연애 이야기를 풀었고, 무투브 등 다양한 매체에 클립 영상이 퍼져나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뭐, 어떻게 보면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내 일과 관심사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좋게 생각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말씀이시죠?”

“하하하, 그렇게 들렸나? 아무튼 연애할 때가 제일 좋을 때야. 결혼은 좀 힘드니까 천천히 생각하고, 그러니 청춘을 즐겨라.”

“알겠습니다. 결혼은 좀 힘든 거다, 제 머릿속에 기억해 둘게요.”

“옆방 선생님껜 비밀로 해.”

두 사제는 오랜만에 소리 높여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는 오래 가지 못했다. 뜻밖의 손님이 찾아와 그 좋은 시간을 방해했기 때문에.

“실례합니다.”

그 뜻밖의 손님은 바로 김명현이었다.

***

민우는 평소처럼 손님을 맞이했다. 자리를 중앙에 있는 소파로 옮긴 두 사람은 커피와 과자를 테이블에 두고 마주 보았다.

“연락도 없이 찾아와 죄송합니다. 마침 지나가던 차에 교수님 생각이 나서 말이죠.”

“괜찮습니다. 앞으로 종종 봐야 하는 사이 아닙니까?”

“지금쯤 촬영이 한창이겠군요.”

<프로페서> 드라마는 벌써 촬영에 돌입했다. 올여름 편성을 목표로 모든 스탭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두 사람은 그 드라마의 고문 역으로 묶여 있어 앞으로도 종종 스튜디오나 촬영장에 나가 의견을 교환해야 했다.

“그나저나 대단하더군요.”

“무엇이요?”

“휴머니티 프로젝트 말입니다. 인터넷에서 아주 반응이 뜨겁더군요. 홈페이지도 잠깐 들여다봤는데 사람들도 많이 오가는 것 같고.”

“그래 봐야 실장님만큼은 못하지요. 공중파 광고를 쏠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습니다.”

“하하하. 그거야 돈이 있으면 다 해결되는 거 아닙니까? 실력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지만, 대화의 분위기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오죽하면 한쪽에서 공부하던 차민재가 짐을 챙겨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기기까지 했을까.

“그래서, 그냥 소감을 전하려고 오신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좀 궁금해서 말이죠. 휴머니티는 언제 수강 신청을 받습니까?”

“다음 주 월요일에 신청 페이지가 열립니다.”

“어떻게 선발하실 생각이죠?”

“자기소개서와 면접입니다. 무상으로 제공되는 교육인 만큼, 열정이 있는 분들을 우선해서 받으려고 합니다.”

곰곰이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김명현이 돌연 불안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건 좀 잔인한 일 아닙니까? 선별한다는 행위가 말이죠.”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

“인문학의 기본은 그런 거 아닙니까. 인간에게 우열은 없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이런 비슷한 뉘앙스가 기저에 깔린 것이 인문학인데, 선별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적인 것 같이 느껴져서 말이죠.”

민우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대꾸가 없자 김명현이 손에 쥔 커피잔을 내려놓고 다시 말을 이었다.

“교육의 자본화를 그토록 경계하는 분께서 솎아내기를 한다니, 좀 의아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고깝게 듣지는 말아주셨으면 하네요.”

“어떤 말씀인지는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지요.”

민우의 여유로운 반론이 시작됐다. 그는 격을 지키면서도,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지나친 이상론…… 그러니까 방금 실장님이 말씀하신 것 같은 인문학의 본질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현실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것이 바로 우리가 선택한 방법이지요.”

“하하하. 그러시군요. 요즘 주변에 많이 물어보고 다니시는 것 같아서. 제 입버릇 말입니다. ‘교육은 비즈니스다’라는 말.”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리지요.”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다만 굳이 물어보고 다닐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민우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빤히 바라보자, 김명현이 즐겁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마치 놀이기구를 탄 아이 같은.

“이제 곧 결판이 나지 않을까요? 교육이 비즈니스인지 아닌지, 어느 쪽에 사람이 더 몰리면 되는지만 보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거기까지 말한 김명현이 건배하듯 커피잔을 들었다 입에 가져갔다.

아무리 민우라고 해도 코너에 몰린 생쥐 꼴을 피할 수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하지만 예상외의 결과가 나왔다.

민우가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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