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1)
며칠 뒤, 민우는 기다리고 있던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서강일이었다.
― 홈페이지 베타버전 완성했다.
“오, 나이스 타이밍! 내일 ‘독서의 밤’ 본방송이라 쫄리고 있었는데. 역시 믿고 쓰는 서강일이야.”
― 뭐, 노예처럼 부림을 당하는 거야 이제는 익숙하니까.
“하하하.”
내일 당장 방송이 시작되지만, 민우는 서강일을 채근하지 않았다. 서강일이라면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서강일은 그 믿음에 멋지게 화답했다.
― 사실 완성은 이틀 전에 했는데 주요 기능 테스트하느라 시간이 좀 필요했어. 게다가 중간고사 기간이잖아. 너도 정신없지 않냐?
“뭐, 시험은 학생들이 보는 거지 내가 보는 건 아니니까 괜찮아.”
― 쯧. 이런 교수 밑에서 배우는 학생들이 불쌍하지.
실없는 웃음소리가 핸드폰 너머에서 들렸다. 민우도 피식 웃고 말았다.
― 아직 버그가 좀 있을 것 같은데, 중요한 기능은 테스트 끝냈으니 아마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일단 사용해 보면서 찾아보자고.
“트래픽은 어느 정도까지 감당할 수 있어?”
― 우리 허윤 배우님 이름값 정도는 계산에 잘 넣었으니 걱정할 건 없다. 갑자기 서버 다운되는 일은 없을 거야.
어차피 초기 트래픽만 감당할 수 있으면 된다. 뜨거운 반응이 계속 이어지지는 않을 테니까.
방송이 나간 이후로 하루, 혹은 이틀 정도만 버틸 정도의 수준이면 충분하다.
민우는 그 초반 세팅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막상 호기심에 홈페이지에 들어왔는데, ‘페이지를 찾을 수 없습니다’가 떠버린다면 그 호기심이 금방 죽어버릴 테니까.
― 그러고 보니 전에 수빈이한테 얼핏 들었는데, 이번 방송 분량 잘 뽑혔다며?
“생각 외로 할 얘기들이 많았어. 제작진도 많이 도와주셨고. 무투브에 올라갈 클립 영상 기대해도 좋을 거 같다.”
― 몇만 뷰나 나올 거 같냐?
“일주일 기준 5백만 뷰.”
― 꽤 높게 잡고 있네.
국내의 일반 인기 동영상이 보통 3백만 뷰를 기록하는 것을 비추어본다면, 확실히 5백만 뷰는 기준치를 넘어서는 수치였다.
그래도 민우가 나름 합리적으로 계산한 수치였다.
350만 정도는 허윤의 이름값, 그리고 나머지 150만 정도는 자신의 이름값이 채워줄 거라 계산했다.
― 아무튼 어드민 아이디랑 비번 보내줄 테니까 한번 들어가 봐.
“고생했다. 이제 우리한테 맡겨.”
― 수고. 아, 그리고 피드백 있으면 오늘 내로 부탁한다. 나 내일부터는 시험 답안 채점해야 해서 정신없을 예정이라.
“알았어. 한번 둘러보고 연락 줄게.”
곧 카톡으로 홈페이지 주소와 관리자 아이디, 그리고 비밀번호가 날아왔다. 민우는 컴퓨터 앞에 앉아 바로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순간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역시 제대로 만들었구나.’
폴라리스 홈페이지를 만들었을 때도 감탄했지만, 서강일의 웹디자인 능력은 수준급이었다.
필요한 기능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은 물론, 군더더기 없는 블랙 앤 화이트의 심플한 디자인이 안정감을 주었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민우는 건네받은 어드민 아이디로 로그인했다. 숨겨진 메뉴가 보였다.
관리자 메뉴였는데, 이곳에서 회원과 전체 게시물 현황을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접속자 트래킹 기능도 있어 분석자료로도 쓸 수 있었다.
접속자 트래킹은 중요하다.
어떻게 홈페이지로 유입되었는지, 그리고 방문자 통계가 어떻게 변화하는가는 중요한 자료가 될 테니까.
서강일도 민우가 어려운 싸움을 앞두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상당히 먼 미래까지 보고 홈페이지를 디자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빈아.”
민우는 서재에 있었다. 거실 쪽으로 목소리를 높이자, 이수빈이 손에 책을 든 채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커피 필요해요?”
“아니, 휴머니티 홈페이지 나왔어. 한번 보라고.”
“오 진짜?”
이수빈이 반색하며 민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민우는 그녀가 잘 볼 수 있도록 모니터를 살짝 돌려주었다. 홈페이지를 둘러본 이수빈이 감탄했다.
“진짜 잘 만들었네! 강일 오빠는 가만 보면 강의할 게 아니라 웹디자이너 해야 한다니까.”
“추가로 더 필요한 기능 없나? 강일이가 가능하면 오늘 내로 피드백 달라고 했거든.”
“음, 일단 섭섭 오빠랑 예린이한테도 보라고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한 시간 정도 둘러보고 피드백 하는 걸로.”
“오케이.”
민우는 홈페이지 주소 링크와 관리자 계정을 한진섭과 주예린에게 보냈다.
그렇게 팀 307호 원로 멤버들은 홈페이지에 글을 남기고, 댓글도 써 보고, 공지도 올리고 서로 접속 차단도 하면서 기능을 테스트해 보았다.
그리고 한 시간 뒤 결과가 나왔다.
“완벽하네. 고칠 데가 없다.”
“그러게요. 역시 강일 오빠 꼼꼼하다니까?”
노트북을 하나 챙겨와 옆에서 함께 테스트하던 이수빈도 동의했다.
게시물 쓰기와 읽기는 물론, 게시물 통계도 제대로 작동했다. 하긴, 서강일의 성격상 어설픈 물건을 그대로 넘기는 짓은 하지 않았겠지.
민우가 기지개를 켰다.
“읏차! 좋아. 이걸로 오픈하자고. 이제 내일 본방 나가고, 윤이가 SNS에 글만 써주면 되겠어.”
민우는 마우스를 조작해 홈페이지를 본격 가동시켰다. 이제 회원가입은 물론, 가입한 누구나 글을 남길 수 있게 됐다.
초기 세팅은 서강일이 했지만, 이후 관리는 민우와 수빈, 그리고 진섭과 주예린이 맡기로 했다.
하루에 수백 건씩 문의 글이 쇄도할 것이다. 거기에 일일이 답변해 주려면, 사실 네 명으로도 벅차지만 일단 해보기로 했다.
“KBC 채널 관리자한테는 연락해봤어요? 무투브에 동영상 올릴 때 휴머니티 홈페이지 주소도 같이 올려달라고 하면 좋을 거 같은데.”
“그렇게 될 거야. 도메인 주소는 미리 제작진에 전달했거든.”
그게 민우의 섭외 조건 중 하나였다.
이번 ‘독서의 밤’ 300회 특집은 출연료를 한 푼도 받지 않았다. 대신 ‘독서의 밤’을 활용한 콘텐츠에 홈페이지 광고가 들어가게 된다.
KBC ‘독서의 밤’은 블로그를 비롯해 각종 SNS 채널도 운영하고 있었다. 때문에 홈페이지 링크가 들어간다면 파급력이 상당할 거다.
어차피 출연료는 지금 상황에서 민우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강연료와 저작료 등으로 돈을 충분히 벌고 있었으니까. 평생 먹고사는 것에 지장은 없다.
또한 민우는 재물욕이 크지 않았다.
매년 일정 금액을 기부하고 있고, 씀씀이도 크지 않아 재산이 계속 쌓여가고 있었다. 물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주예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만.
그때 핸드폰이 진동하더니 톡 하나가 도착했다.
주님: 전에 뭐 이야기할 거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언제 할 거예요? 오늘 시간 괜춘함
민우는 잠시 고민하다 톡을 보냈다.
나: 지금 콜?
주님: 에이 씨 나 화장 다 지웠는데
나: 우리 사이에 화장이 무슨 소용이야
주님: ㅇㅋ 그럼 선배네 집 근처에 있는 그 카페에서 만나요
나: 늘 앉던 자리에 앉아 있어라. 화장 안 했으면 못 알아볼 테니까.
주님: ㅗㅗ
주님: 어머나 오타^^
주님: 지금 나갑니다 슝
피식 웃은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옷걸이에 걸린 외투를 걸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빈이 물었다.
“이 시간에 어디 가게요?”
“잠시 주님 좀 만나러.”
“무슨 일로?”
“우리 모임에서 제일 큰손인데 접대 좀 하고 와야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이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민우가 웃으며 답했다.
“외부에서만 후원금 받으면 좀 그렇잖아. 우리도 가능하면 돈을 좀 모아야지. 근처 카페에서 보기로 했으니까 금방 다녀올게.”
“그런 거라면 빨리 다녀와야지. 잘하고 와요!”
민우는 집을 나서 근처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동네 카페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다. 두어 명 정도가 음료를 마시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민우는 커피를 주문하곤 늘 앉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 와중에 민우는 서강일에게 톡을 보내 홈페이지 관련 수정 이슈는 없다고 답했다.
언젠가 날 잡아서 맛있는 거라도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 문이 딸랑거리더니 후드를 깊게 눌러쓴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민얼굴에 체구가 작아 누가 보면 고등학생인 줄 알 것은 사람.
하지만 그녀와 함께한 세월이 적지 않아서, 민우는 손을 흔들어 주예린을 맞았다.
“아이고 작가님. 오셨습니까.”
“잘 알아보시면서.”
“하하하. 삐졌냐?”
“됐거든요.”
곧 주문한 커피 두 잔이 나왔다. 민우와 주예린은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른 건 아니고, 지금 우리가 휴머니티 후원금 받고 있잖아.”
“그렇죠.”
“우리도 십시일반으로 해서 좀 모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남의 도움만 계속 바랄 수는 없잖아?”
“얼마면 돼요?”
주예린이 거만하게 웃었다.
다리를 꼬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들이켜는 모습은 꼭 여고생 같은데, 표정만큼은 세상에서 닳디닳은 그런 사람처럼 보였다.
“얼마나 낼지는 너랑 섭섭이가 결정해야지. 내가 달라고 한다고 줄 것도 아니면서 그러냐?”
“음, 그럼 올해는 가볍게 10억 정도 어때요? 그 정도면 우리 서방님도 별말씀 안 하실 거 같은데.”
“10억……?”
민우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역시 세계적인 작가는 클라스가 다르구나. 간신히 정신을 차린 민우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빨대를 휘휘 저었다.
“어차피 쥐고 있어 봐야 세금만 뚜드려 맞으니까요. 좋은 일에 기부하면 윈윈이지 뭐. 이후에는 매년 5억 정도 출자하면 되겠네요.”
“오케이. 그럼 10억으로 결정. 나중에 딴말 없기다?”
주예린이 얼마 전 센트럴 북스의 제임스 사장과 미팅해서 뜯어낸 금액이 30만 불. 거기에 본인 출자금이 10억이라면, 한화로 13억이 넘는 엄청난 운영 자금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 정도라면 향후 1년 정도는 아무런 걱정 없이 사업을 돌릴 수 있을 듯했다.
그때, 주예린이 한마디 꺼냈다.
“그런데 선배는 얼마나 하실 건데요?”
“응?”
“휴머니티의 초대 회장께서는 얼마나 출자하실 거냐 이거지. 선배도 개런티 많이 받잖아요. 인세도 어마어마할 테고. 물론 나보단 아니겠지만? 후후후.”
이쯤 되니 자기 자랑인지 남을 놀리는 건지 분간이 잘 안 간다.
“뭐, 나는 한 5억 생각하고 있었지.”
“수빈이한테는 허락받았고?”
“아직 얘기는 안 꺼냈는데 오케이 할 거야. 나도 그렇지만 수빈이도 재물욕은 별로 없잖냐.”
“그래도 모르죠. 우리와는 다르게 선배네는 아이가 있으니까 돈이 많이 필요할지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지만, 민우는 수빈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언젠가 공익 재단을 설립하는 게 자신의 꿈이고, 또 그 꿈을 응원해주겠다고 했었으니까. 휴머니티는 그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계단이었다.
이야기가 얼추 정리되었다.
“그럼 법인 설립 후에 자금 집행하는 걸로 합시다.”
“그러시죠.”
“근데 섭섭이는 뭐해? 나는 같이 나올 줄 알았는데.”
“대청소 중이요.”
왠지 남 일 같지가 않아 민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잘도 혼자 나왔구만.”
“매년 몇십억씩 집에 갖다 주는데 청소 좀 하는 게 뭐가 대수라고.”
“그렇긴 하지…….”
민우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져 깜짝 놀랐다. 이게 자본주의의 힘인가,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한진섭이 행복하다니까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길 빌어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