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밤 특집 (2)
허윤이라는 톱스타가 팀 307호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왔는데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낭비다.
그래서 민우를 비롯한 팀 307호 멤버들은 허윤을 어떻게 홍보대사로 활용할 것인지에 대해 머리를 맞댔다.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특히 멤버들이 집중했던 것은 허윤을 활용한 팬덤 마케팅이었다. 그가 SNS나 카페에 글 하나만 남겨준다면 그 파급효과는 상당할 테니까.
그렇게 계획을 세우는 와중에 ‘독서의 밤’에서 섭외 요청이 들어왔다.
민우는 촬영 전에 허윤과 만나 상의했다.
단연 화두가 되었던 것은 ‘독서의 밤’에서 휴머니티 프로젝트를 어떻게 공개하느냐였다.
허윤은 이미 소속사의 허락도 받았고, 해가 되지 않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민우의 제안을 모두 받아들였다.
거기에 몇 가지 조언을 해주기도 했고, 사전에 제작진과 교섭하여 미리 질문을 부탁하는 등 수고를 해줬다.
그래서 두 사람은 <프로페서> 드라마와 ‘휴머니티 프로젝트’라는 두 가지 큰 틀을 들고 이곳에 출연한 것이다.
“휴머니티 프로젝트요. 뭔가 이름에서 거창한 느낌이 드는데, 어떤 프로젝트인지 설명해 주시죠.”
이성주 아나운서가 자연스레 질문을 던졌고, 허윤과 한 번 눈빛을 맞춘 민우가 나섰다.
“대중을 위한 교양 강좌 프로젝트입니다. 어떠한 대가도 없이 인문학 관련 강의를 무료로 제공하는 사업이라고 할 수 있죠.”
“이야, 역시 박민우 교수님이시네요. 예전에도 그런 비슷한 사업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릅니다. 그때보다 규모도 작고, 그때 했던 오픈코스웨어가 온라인 강의였다면 이번에는 오프라인 강의가 주축이 될 테니까요.”
“오프라인 강의라면 학생들이 가서 직접 면대면으로 수업을 듣는 거지요?”
“맞습니다.”
민우는 이성주 아나운서를 향해 씨익 웃었다.
그는 생각대로 움직여주고 있었다. 사전에 섭외될 때 질문을 많이 해 달라는 부탁을 했었는데 잘 반영된 모양이다.
이성주 아나운서가 정리하듯 대본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박민우 교수님의 인문학 사랑은 여전하네요. 역시 우리 ‘독서의 밤’이 배출한 세계적인 스타답습니다.”
“하하하하하!”
“자, 그럼 허윤 씨에게도 좀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같이 프로젝트를 하신다고 했는데, 허윤 씨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저는 얼굴 담당이죠.”
“얼굴 담당이요. 쉽게 와닿지는 않네요.”
이성주의 너스레가 이어지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방청석에서 계속해서 웃음이 쏟아졌다.
“제가 다른 선생님들에 비해 가방끈도 길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서 이번 휴머니티 프로젝트의 홍보대사를 맡게 됐습니다.”
“오, 홍보대사. 어떻게 비용은 좀 많이 받으시는지?”
“하하하. 아닙니다. 제가 최근에 박 교수님께 크게 신세 진 일이 있어서. 그걸로 퉁 쳤지요.”
“그렇군요.”
그렇게 민우와 허윤은 잠시 짬이 난 틈을 타서 휴머니티의 설립 배경과 취지, 그리고 앞으로의 운영 방안에 대해서 차분히 설명해 나갔다.
요즘 시대에 TV로 본방송을 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민우가 노리는 것은 클립 영상이 올라갈 무투브다.
허윤이 나오는 클립 영상의 조회수는 다른 것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이용한 마케팅인 것.
클립 영상을 본 허윤의 팬들이 휴머니티 관련 소식을 다른 곳에도 전파할 거고, 그렇다면 팀 307호 멤버들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절로 홍보가 되는 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운 좋으면 네이비 실검에도 올라갈 수 있고 말이다.
‘때마침 강일이가 홈페이지를 거의 완성해 가니까, 오늘 녹화분 나가기 전에 오픈하면 딱이겠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민우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렸다.
***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 민우 씨. 수고했어요!”
‘독서의 밤’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총괄하고 있는 장영한 PD가 반갑게 손을 들었다. 민우는 꾸벅 인사했다.
“공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던데. 어때요? 고정으로 다시 나와볼 생각은 없습니까?”
“하하하. 농담이라도 그런 무서운 말씀은 하지 마세요. 계속 긴장해서 그런지 녹초가 됐네요.”
민우가 엄살을 부렸다. 사람 좋게 웃은 장영한 PD가 은근히 제안했다.
“오늘 안 바쁘면 뒤풀이 어떻습니까? 민우 씨도 그렇고 윤이도 오랜만에 출연해서 다들 반가워하니까. 간단히 반주나 하고 가시지?”
“아이랑 같이 있어서 좀 힘들겠는데요. 아무래도 술자리에 가기가 좀.”
“아, 그렇군요.”
장영한 PD가 아쉬워할 그때, 손을 잡고 있던 윤아가 민우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아빠. 나 여기서 놀고 있으면 되니까 가서 일하고 와!”
“안 돼. 같이 돌아가야지.”
“그래두. 나 여기 더 있고 싶은데.”
처음 촬영할 때만 해도 부끄러워하던 윤아는, 지금 완전 촬영에 재미를 들렸다. 카메라에 더 이상 불이 들어오지 않자 시무룩했다.
그때 옆에 있던 작가가 끼어들었다.
“저, 피디님. 괜찮으시면 제가 윤아 방송국 견학시켜줄까요? 그때 회식 잠깐 하시면 될 거 같은데요.”
“오, 그거 좋은 생각인데? 어떻습니까? 민우 씨.”
“으음.”
민우는 고민했다.
하지만 방송국 견학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어쩌면 윤아에게도 좋은 경험이 되리라 생각했다.
“좋습니다. 그럼 딱 한 시간 정도만 앉아 있다 갈게요.”
“자자, 그럼 가시죠! 윤이도 간다고 했으니 곧 따라올 겁니다. 민지 씨! 우리 초특급 게스트 잘 부탁해! 혼자서 돌아다니지 말고 막내도 데려가!”
“넵. 맡겨 주세요!”
스탭들이 다시금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윤아는 작가 언니 두 명의 손을 하나씩 잡고 신나게 방송국 저쪽으로 사라져갔다.
‘윤아도 많이 컸구나.’
세월의 무상함이 무르익을 무렵, 게스트와 인사를 모두 마친 허윤이 이쪽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형님! 저 잘했죠?”
부메랑을 물어온 강아지의 눈빛이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용돈이라도 쥐여주고 싶은 심정이다. 잘했어.”
“주셔도 되는데.”
“나보다 잘 버는 녀석이 무슨 소리야?”
두 사람이 한차례 웃었다. 그때 조연출이 달려와 뒤풀이 장소를 안내했다. 예전에 자주 가던 고깃집이라 천천히 이동했다.
“그런데 윤아 녀석은 어디 갔어요?”
“방송국 견학.”
“아아. 그러네. 회식엔 술이 빠질 수 없으니 윤아는 못 가겠군요.”
“그래서 한 시간 정도 견학 부탁했어. 왠지 방송에도 관심이 있는 거 같아서.”
“윤아 정도면 아역배우 해도 손색이 없죠.”
민우는 그저 웃을 뿐이다. 하지만 흘려듣지는 않았다. 허윤이 누군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아역배우 출신 아니던가.
“윤아가 이렇게 뭔가에 관심을 둘 때마다 절로 미래가 그려지더라. 10년 뒤면 윤아는 어떤 길을 택할까. 그리고 20년 뒤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빠가 된다는 건 참 심오한 것 같습니다.”
“너도 빨리 장가나 가. 나한테 그만 치근거리고.”
“서운하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앞으로도 평생 형님 쫓아다닐 겁니다!”
민우는 내심 고마웠다. 허윤은 다소 허풍스러운 기질도 있긴 하지만, 한번 내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의리파로도 유명하다.
남동생이 없는 민우에게는 친남동생 그 이상의 존재가 바로 그였다.
“그나저나 정말 기대되네요. 이번 방송 나가고 나면 사람들이 휴머니티에 엄청 문의하겠죠?”
“그랬으면 좋겠는데, 현실적으로 좀 난감한 것들도 있어. 이미 명인대 쪽 프로그램은 TV 광고까지 하고 있거든.”
“아! 저도 봤어요. 명문대가 TV 광고하는 거 신선하다는 글 본 적 있거든요.”
“그렇지 뭐.”
모집 시기도 비슷해 경쟁 구도가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민우와 친구들은 긍정하기로 했다. 걱정한다고 일이 잘 풀릴 거였으면, 세상에 안 풀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아무튼 고맙다! 네 덕에 힘이 나는구나.”
“형님이 이렇게 약한 소리를 하시는 거 보니 이번 프로젝트가 굉장히 중요하긴 한가 봐요. 보통은 맡겨 주라면서 알아서 척척 하시는데요.”
“그런가?”
“그럼요. 의형제인 제 눈이 틀리면 누구 눈이 맞겠습니까?”
허윤은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민우는 허윤과 담소를 나누며 방송국을 나와 뒤풀이 장소로 이동했다.
“박민우 교수님 오셨습니다!”
“허윤 씨도!”
“와아아아! 싸인해 주세요!”
오늘은 게스트는 물론, 제작진까지 모두 참가한 회식이다. 300회 기념 촬영인 데다 민우와 허윤까지 와서 그런지 분위기는 금방 달아올랐다.
술이 몇 순배 오가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질 무렵 민우는 시계를 살폈다.
‘슬슬 한 시간이 다 돼가네. 일어나 볼까?’
그런 생각을 할 무렵, 식당 한쪽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민우의 시선이 절로 그쪽으로 돌아갔다.
“수빈 씨!”
“아니, 여긴 어쩐 일이야?”
민우는 깜짝 놀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수빈이 스탭들과 인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딸애가 방송국 구경하고 있다길래 와봤어요. 이 근처에서 볼일 보고 있었거든요.”
방송국 견학을 마쳤는지 윤아는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왔어?”
“아, 오빠. 오늘 촬영 어땠어요? 윤아한테 물어보니 아빠 최고! 하던데.”
그렇게 말한 이수빈은 예쁜 미소를 지었다. 주변에서 오오, 하는 부러움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민우는 왠지 머쓱해졌다. 사람들이 많으면, 이수빈은 으레 이렇게 자신의 체면을 세워주곤 한다.
처음에는 놀리는 재미로 했는데 이제는 습관이 됐다나 뭐라나.
“다들 편하게 잘 챙겨주셔서 괜찮았어. 나중에 방송 보면 놀랄 거야 아마. 윤아 아주 똑 부러지게 잘하더라고.”
“그래요? 궁금하네. 꼭 본방 봐야겠네요.”
“나 다음에 또 올 거야!”
윤아의 외침에 스탭은 물론 게스트까지 배를 잡고 웃었다. 어느새 윤아는 모두의 귀염둥이가 되어 있었다.
“그럼 저희는 먼저 일어나 볼게요. 다음에 인사드리겠습니다.”
“어머, 벌써 가세요? 아쉽다!”
“교수님! 2차 가셔야지 어딜 가세요!”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며 민우를 잡았다. 그만큼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다음엔 좀 더 오래 있을게요. 오늘은 윤아도 같이 있으니까, 오랜만에 가족들하고 같이 시간 보내려고요.”
“역시 가정적인 남자. 멋있다…….”
“이수빈 선생님! 정말 부럽네요. 주변에 괜찮은 사람 있으면 소개 좀 해주세요!”
스탭들의 부러움과 선망을 한몸에 받으며, 민우 가족은 고깃집을 나섰다. 허윤이 택시를 타는 곳까지 배웅해 주었다.
“그럼 형님, 누님. 다음에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번처럼 소윤이랑 집에서 밥 먹어요.”
“소윤이가 정말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뭐만 하면 소윤이 타령이네.”
“하하하. 예쁘잖아요. 멋있기도 하고.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외과의. 캬! 작품 나옵니다!”
민우는 허세를 떠는 허윤을 뒤로하며 택시를 잡았다. 목적지를 말하고, 민우는 윤아에게 넌지시 물었다.
“윤아는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우웅…….”
윤아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돌잡이 이후로 이렇게 긴장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빠같이 멋진 선생님!”
앞자리에서 그 말을 들은 이수빈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윤아 너 아빠처럼 되려면 공부 더 열심히 해야 된다?”
“열심히 할 거야!”
이미 민우의 얼굴엔 하늘에 뜬 보름달처럼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자식을 키우는 즐거움이란 이런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