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29화 (329/500)

독서의 밤 특집 (1)

이곳은 KBC 스튜디오. 정확히는 ‘독서의 밤’ 촬영 현장이다.

‘독서의 밤’은 민우와 이수빈, 그리고 허윤이 오랫동안 고정 출연자로 몸담았던 장수 프로그램.

대중의 독서량을 늘린다는 그런 일차원적인 목적보다 좋은 글을 소개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이 프로그램도 벌써 5년 이상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 이유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바로 첫 번째는 인문학에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어주는 사람’이라는 콘셉트의 프로그램이 다양한 매체에서 호응을 얻는 상황이라, KBC 측도 과감히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두 번째는 바로 민우의 존재였다.

고정 출연자였던 그의 화려한 언변이 수많은 고정 팬을 만들었고, 거기에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그리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덕에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독서 채널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한때는 유머 코드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독서의 밤’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유행하기도 했다.

아무리 방송가에 개편 바람이 불어닥친다고 해도, ‘독서의 밤’만큼은 향후 10년간은 전혀 끄떡없을 거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때 메인 카메라에 불이 들어왔다.

제작진 쪽에서 큐 사인이 떨어지자 프로그램 진행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아나운서와 방송인으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이성주였다.

그가 상기된 표정으로 소개를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자! 오늘은 ‘독서의 밤’ 300회 특집입니다. 기념으로 특별 게스트를 모셔보겠는데요. 참 어렵게 모셨습니다. 다들 짐작은 하셨을 텐데, 한때 우리 식구이기도 했죠! 박민우 교수님! 모시겠습니다!”

“휘익!”

“와아아아!”

방청석에서 우레와 같은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들렸다.

스튜디오 게이트가 좌우로 열리고, 화려한 조명과 함께 민우가 손을 흔들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민우의 오른쪽엔 딸인 윤아가 함께였다.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두 부녀는 손을 꼭 잡고 무대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안녕하세요. 박민우입니다.”

“안녕하세요!”

민우가 먼저 인사했고, 윤아도 따라 인사했다. 사람들이 많아서 다소 부끄러운지 몸을 배배 꼬았다.

“윤아야. 이름 이야기해야지?”

“박윤아입니다아!”

윤아가 다시 꾸벅 인사했다. 귀엽다, 예쁘다는 식의 칭찬이 방청석에서 쏟아져 나왔다.

윤아는 수빈의 외모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아역배우로 나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귀엽고 깜찍했다.

실제로 수많은 업체들이 CF 제안을 보내왔으나, 민우와 이수빈은 모두 거절했다. 윤아가 자의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광고 출연을 보류한 것이다.

다만 이렇게 단발성 토크쇼나 유익한 프로그램엔 얼굴을 종종 비추고 있었다.

이성주 아나운서가 손을 들어 반갑게 맞았다.

게스트도 하나둘 무대로 나와 민우와 가볍게 포옹했다. 윤아도 마찬가지. 어린아이는 방송국 어디에서나 귀여움을 받기 마련이다.

여성 게스트 한 명이 윤아와 눈높이를 맞추고 호들갑을 떨기 시작한다.

“너무 귀엽다! 어쩜 이렇게 아빠를 안 닮았을 수가 있죠? 다행이네요!”

“하하하. 그러게요. 엄마를 똑 닮아서 다행입니다.”

“사실 아버지한테는 머리만 이어받아도 충분하죠.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닙니까?”

민우는 멋쩍게 웃었다.

노벨상을 받은 지도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노벨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이 언급될 때마다 부끄러움이 앞선다.

그래서 조금도 자만심이나 허영심에 빠지지 않게 되었다.

천성이 선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때 이성주 아나운서가 의미심장하게 한마디 꺼냈다.

“하지만 여기에서 끝난다면 우리 프로그램이 아니죠. 초특급 게스트를 한 분 더 모셨습니다. 나와주세요~!”

우렁찬 외침과 함께, 스튜디오 게이트가 한 번 더 열렸다.

이번에 등장한 것은 바로 허윤이었다.

‘독서의 밤’ 초창기 멤버이기도 한 그는, 이제 고정 출연에서 빠지고 간간이 특별 초대로 자리하곤 했었다.

“안녕하십니까. 허윤입니다. 아, 좋네요. 공기가 참 좋습니다. 분위기에 취할 거 같은데요?”

“고향에 온 기분입니까?”

“그럼요. 여기가 제 고향이죠. 설날에 고향에 내려갈 때면 내비로 KBC 스튜디오를 습관처럼 찍습니다. 하하하.”

허윤이 예의 바르게 방청객, 그리고 게스트와 인사했다. 마지막으로 민우와 가볍게 포옹했고, 윤아와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세 사람이 자리에 앉자 본격적으로 녹화가 시작되었다.

이성주 아나운서가 운을 뗐다.

“박민우 교수님. 오랜만에 나오셨는데 소감이 어떠십니까?”

“오랜만에 나오는 거긴 해도 프로그램은 매주 본방 사수하고 있습니다.”

“오, 정말입니까?”

순간 여러 대의 카메라가 일제히 돌아가며 게스트의 반응을 렌즈에 담았다.

“당연하죠. 저도 책으로 밥 벌어먹고 사는 입장인데 이런 프로그램을 놓쳐서는 안 되죠. 특히 저도 잘 모르는 책을 소개해 주실 때가 많아서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인정한 최고의 북토크쇼. ‘독서의 밤’입니다.”

이성주 아나운서의 한마디에 웃음소리가 가득해졌다. 자막을 넣을 만한 좋은 씬이 나왔다. 제작진이 엄지를 추켜들었다.

“그리고 또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우리 박윤아 양입니다. 윤아 양. 오늘 나온 소감이 어때요?”

“부끄러워요오.”

윤아가 몸을 배배 꼬면서 웃었다. 주변에서 연신 귀엽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윤아 양도 책을 무척 좋아할 거 같은데, 집에선 어떤 책을 주로 보나요?”

“만화책!”

“어우, 너무 솔직한데요? 자, 카메라 감독님들. 박민우 교수님 표정을 잘 담아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국문과 교수인데 만화책을 본다는 대답이 조금 의미심장하게 들렸던 모양이다. 이성주 아나운서가 조심스레 물었다.

“교수님. 윤아가 집에서 만화책 봐도 괜찮은 겁니까?”

“물론이죠. 집에는 만화책도 많고, 그냥 책 자체가 많습니다. 윤아가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보게 하는 게 저희 집 룰이죠.”

“윤아가 책을 참 많이 본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책을 많이 보면 생각이 깊어진다고 하잖습니까. 독서 수준은 어느 정도 됩니까?”

“수준을 논하기에는 조금 조심스럽지만…… 최근엔 중학생 필독도서도 무리 없이 읽는 것 같더라고요.”

“우와~”

방청석에서 감탄이 쏟아졌다. 하지만 민우는 괜한 오해를 살까 한마디 덧붙였다.

“조기교육이나 그런 건 시키고 있지 않아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희는 윤아가 읽고 싶어 하는 걸 읽게 하는 편이라서요.”

“아버지는 세계적인 학자, 어머니는 유명한 문학평론가. 한마디로 문학계의 명문 집안인데, 외동딸인 우리 윤아 양이 나중에 어떻게 성장할지 벌써 기대됩니다. 자! 그리고 우리 또 다른 게스트. 허윤 씨?”

그제야 사회자의 관심이 허윤에게 넘어갔다.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첫 샷은 무조건 허윤에게 갔어야 했는데, 그만큼 민우가 이 프로그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난 것이다.

“요즘 바쁘다면서요? 제작진 전화도 잘 안 받았다고 하던데.”

“하하하. 설마요? 그건 오해입니다. 요즘 드라마 준비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좀 바쁘긴 했죠.”

“듣자 하니 그 드라마가 또 재미있다는 얘기가 많아요.”

“맞습니다. 여기 계신 박민우 교수님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제작되고 있는 드라마죠. 다들 아시는 <프로페서>입니다!”

오늘 민우와 허윤이 동반 출연하게 된 첫 번째 이유이기도 했다.

<프로페서> 드라마화는 이미 언론과 팬들에 의해 널리 알려진 상황이다. 그래서 새로울 것은 없지만, 원작의 주인공과 드라마에서의 주인공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게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성주 아나운서가 은근히 웃으며 말했다.

“이거 시청률 좀 나오겠는데요. 참 기대되네요. 박 교수님 자서전도 해외에서 큰 반응이 있지 않았습니까? 드라마도 해외로 수출될 수 있겠는데요? 어떻습니까.”

민우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렇다면 드라마에서 박민우 교수님 역을 허윤 씨가 맡는다는 거지요?”

이번엔 허윤이 답했다.

“예. 맞습니다. 그래서 더 기대되는 것도 있어요.”

“하긴, 허윤 씨는 공개적으로도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박민우 교수님으로 꼽으시곤 했지요. 소감이 어떻습니까?”

“존경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닮고 싶은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그 간격이 좁혀지지 않았는데, 이번 계기로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되네요.”

“이야. 우리 허윤 씨 솔직하시네~”

이성주 아나운서가 너스레를 떨며, 다소 진지하게 흘러가려던 분위기를 바로잡았다. 게스트도 박수를 치며 허윤의 각오에 응원을 보냈다.

“자, 그렇다면 여기에서 원작자인 박민우 교수님의 소감을 좀 들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떠신지요.”

“얼떨떨합니다. 자서전을 드라마로 만든다는 게 참 조심스러운 일이기도 한데, 나름 새로운 도전이라는 의미에서 좋은 일인 것 같아요. 자극이 되죠.”

“그럼 이수빈 교수님 반응은 어떠셨습니까? 아마 드라마에도 이수빈 교수님 역이 나올 텐데요.”

오늘 이수빈은 촬영에 임하지 못했다. 민우와 같이 섭외를 받긴 했으나 문학상 심사가 잡혀 있어 시간을 내지 못했다.

민우가 답했다.

“고증을 철저히 하라는 주문을 받았습니다.”

“고증이요? 아니, 사극도 아닌데 무슨 고증일까요?”

“여배우들 중에서도 자기 미모를 따라올 사람이 많지는 않으니 그런 쪽으로 좀 신경 써달라고 하더라고요.”

“으하하하하!”

방청석이 뒤집혔다. 게스트도 한바탕 난리였다. 이수빈은 민우보다 ‘독서의 밤’에 오래 출연했다. 그만큼 유대감이 끈끈했다.

“이거 내일 뉴스 헤드라인이 벌써 나온 것 같습니다. 이수빈 교수, 국내 여배우는 외모로 나를 따라올 수 없다 발언 파문. 기대되네요.”

“당분간 아침은 굶어야겠네요.”

“하하하. 그럼 여기서 잠시 한문혁 선생님의 말씀을 좀 듣고 싶습니다. 문화평론가의 입장에서 이런 흐름은 어떻게 보십니까?”

동그란 안경을 쓴 통통한 중년 사내가 지적인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꼈다.

“아주 고무적인 일이 아니겠습니까. 보통 어떤 인물의 일대기는 그 인물이 세상을 떠난 다음 기획되는 법이지요. 하지만 최근엔 그 흐름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한 분야에 헌신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음으로써, 그 자체로 사회에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콘텐츠들이 많이 늘었죠. 실제로 권역외상센터장인 이국정 교수를 베이스로 한 드라마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고무적인 일이라. 그렇다면 그만큼 이번 드라마도 시청자들에게 끼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는 의미일 텐데.”

“결국엔 우리 ‘독서의 밤’이라는 프로그램의 존재 의의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다면, 결국 인간을 둘러싼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사회가 좀 더 성숙해지고 건강해질 수 있겠죠.”

명쾌한 정리에 탄성이 흘러나왔다. 한문혁은 최근 주목받기 시작한 문화평론가인데, 민우와 이수빈과도 자주 교류하곤 했다.

사회자가 민우를 바라보았다.

“한문혁 선생님께서 잘 정리를 해주셨는데요. 박민우 교수님의 의견은 어떠신지.”

“사회가 좀 더 성숙해지고 건강해진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실은, 그래서 요즘 허윤 씨와 함께 기획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지요.”

“프로젝트요? 그게 뭡니까?”

씨익 웃은 민우가 뜸을 들였다. 주변이 웅성거릴 즈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바로 휴머니티 프로젝트입니다.”

오랜만에 ‘독서의 밤’에 출연하게 된 민우의 두 번째 목적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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