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28화 (328/500)

My way (3)

고된 하루를 마치고 밤늦게 귀가한 민우.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고 소파에 드러눕는다.

“많이 피곤한가 봐요. 씻지도 않고 드러눕는 거 오랜만이네.”

“오늘은 좀만 봐주라. 근데 윤아는?”

“일찍 잠들었어요. 유치원에서 온종일 뛰어논 거 같더라구.”

“그래?”

평소라면 아빠! 하면서 달려와 안겼을 테지만, 오늘은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이상하게 생각하던 차였다.

민우는 낑낑거리며 몸을 일으켜 윤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역시나였다. 잠버릇이 심해 이불을 아무렇게나 발로 차 놓은 상황이라, 민우는 가슴께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주었다.

곤히 잠든 귀여운 모습을 보니 절로 미소가 걸리며 피로가 풀렸다.

다시 거실로 나온 민우는 소파에 드러누워 TV 리모컨을 쥐었다.

TV를 켜고 생각 없이 채널을 돌리다 문득 손이 멈췄다.

― 국내 최고 명문대학 명인대학교에서 인문학 프로그램을 오픈합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중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익숙한 풍경이 TV에 담겼다. 분명 명인대의 명물인 연못이다.

그 이후로도 인문관을 비롯해 명인대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멋진 건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마지막으로는 대중에 잘 알려진 명인대 로고가 선명히 박혔다.

“뭐야, 우리 학교 광고잖아?”

“응? 무슨 광고요?”

이수빈이 곁으로 와서 앉았다. 하지만 이미 광고가 끝난 터라, 민우는 핸드폰을 집어 무투브에 접속했다. 그리고 명인대 광고를 검색했다.

예상대로 방금 본 광고가 무투브에 올라와 있었다.

“여기 봐봐.”

“오, 진짜 우리 학교 광고네?”

공식 계정에 풀버전 광고가 있어 민우는 손가락을 터치해 재생시켰다.

“이거…….”

대학을 배경으로 학생들이 출연하는 평범한 느낌의 광고였다.

하지만 내용이 문제였다. 이 광고는 바로 김명현과 교양학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인문학 프로그램 광고였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돈을 쓴다고?”

“그러게요. 보통 신규 프로그램은 온라인 광고를 더 많이 하는데…….”

TV 같은 메인 매체 광고는 인지도가 떨어지는 대학들이 많이 택하는 방법이다. 최고 명문인 명인대는 이렇게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입소문이 난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광고를 펼쳤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가 칼을 갈고 나왔다는 의미.

“시작부터 싹을 밟아버리겠다는 건가? 이거 쉽지 않겠는데.”

“그러게요. 왠지 뒤통수 한 대 맞은 얼얼한 느낌이네요.”

“어떻게 해야 하나…….”

하지만 마땅히 대응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휴머니티 프로젝트도 광고를 준비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인터넷 광고를 제외하고는 생각해 둔 바가 없다. 예산 부족 때문이다.

큰돈을 들여야 하는 미디어 광고는 엄두도 못 내는 것이다.

그나마 허윤이 홍보대사로 나서주겠다고 해서 한숨 돌리고 있던 상황.

‘그런데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있을까?’

문득 그런 근본적인 회의감이 들었다. 순간 민우의 눈이 총명하게 빛났다.

무엇보다도 돈을 벌려고 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수강생도 가려 뽑을 거고, 누군가에게 좋은 경험이 될 만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휴머니티 프로젝트의 기본 철학이다.

그것을 떠올린 민우는 사고를 전환하는 것에 성공했다.

‘조급해할 필요 없어. 시간을 두고 차분히 기다려야 해. 처음부터 급하게 많이 먹으려고 하면 탈이 날 뿐이지.’

그래서일까. 민우는 끝내 마음을 놓고 편히 웃을 수 있었다.

상대가 경쟁을 붙일수록, 우리는 마음 편히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만 하면 된다고.

표면적으로 두 집단이 경쟁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경쟁이 목표는 아니니까.

“학생들의 등록금이 이런 방향으로 쓰이는 건 좀 안타깝긴 하지만…… 그래도 대학본부에서도 생각이 있어서 했겠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 학교인데 이렇게 광고 팡팡 때려도 될까요? 학생들이 커뮤니티에 비판 글 올리지 않으려나.”

“학생들이 판단하는 거야 자유지. 우리는 좀 더 지켜보자고.”

“세상 태평하시네.”

“태평한 게 아니라 여유로운 거라고 해줘. 지금은 그런 데 신경 쓸 때가 아니잖아? 어떻게 하면 가능성 있는 학생들을 선발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진심이 온전히 상대방에게 전해질까. 그런 게 문제지.”

“어휴, 누가 선생 아니랄까 봐.”

입술을 삐죽 내민 이수빈이 리모컨을 빼앗아 채널을 돌려버렸다. 피식 웃은 민우는 이수빈의 무릎을 베개 삼아 눈을 감았다.

***

어느덧 1학기 중간고사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강단에 선 민우는 마이크를 쥐고 설명을 시작했다.

“벌써 다음 주면 중간고사가 시작됩니다. 시간은 공지했던 대로 다음 주 이 시간이고요. 여러분들이 아마 가장 중요한 건 시험 범위일 것 같은데. 그렇죠?”

“네~”

학생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민우는 딱히 시험 범위를 정해놓고 강의를 하지 않았으니까.

거기에 챕터나 단원이 명확한 강의도 아니고, 그저 인간과 인문학의 관계에 대해 강의하기만 했다.

당연히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걱정될 수밖에 없다.

“일단, 기본 교재를 중심으로 시험 문제가 출제됩니다. 제가 나눠드린 프린트나 각종 자료도 시험 범위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아 두세요.”

그때 누군가 손을 들었다. 민우가 지목해서 발언을 허가했다.

“그런데 교수님. 나눠주신 자료가 너무 많은데요. 한 번에 다시 보기엔 분량이 과도한데, 조금 추려주실 수 없을까요?”

“그래서 평소에 복습이 중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아~ 너무해요~”

학생들이 우는소리를 냈다. 해맑게 웃은 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타협을 할까요. 본교재의 첫 페이지부터 220페이지까지가 중간고사 시험 범위입니다. 자료도 그 범위 내로 보시면 될 것 같아요.”

“허…….”

“너무 많아요~”

학생들의 우는소리가 또다시 시작됐다. 하지만 이번엔 민우는 타협하지 않았다.

“책 전체의 딱 절반입니다. 더 줄이면 기말고사 때 더 힘들어질 거예요. 그런 줄 아시고 준비해 주세요.”

“시험 문제는 어떻게 나오나요?”

추가 질문이 나왔고, 잠시 고민하던 민우가 답변했다.

“서술형입니다. 단답형은 아니고 한두 페이지를 할애해야 하는 긴 질문이 될 거예요. 레포트 쓰듯 서론과 본론, 그리고 결론을 잘 정리해서 쓰시길 바랍니다.”

‘서술형’이라는 것과 ‘레포트 쓰듯’이라는 표현에서 학생들의 표정이 무너졌다. 전공이라면 몰라도 교양 강의는 객관식 문제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다들 객관식 문제를 원하나 보네요. 하지만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수업인데 어떻게 숫자로 답을 고를 수 있겠습니까? 이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객관식! 객관식!”

“제발요~”

학생들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민우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했다.

강의평가 평점이 떨어지는 소리가 우수수 들려왔지만 민우는 개의치 않고 팁을 공유했다.

“저는 교재를 그대로 외워서 쓰는 답안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설명한 것이나 교재에 적혀 있는 내용과 반대되는 내용이더라도, 나름의 논리적 정합성을 갖추고 있다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 있게 답안을 작성해 주면 좋겠네요.”

설명을 모두 마무리한 민우는 강단으로 나온 학생들을 상대한 뒤 다시 연구실로 돌아왔다. 학생이 많은 만큼 질문이 많아서 금방 지쳤다.

‘요즘 학생들은 학점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네. 역시 취업 때문인가…….’

대부분의 대학이 상대평가로 바뀌고 나서 학점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아무리 행복이 성적순은 아니라고 하지만, 취업은 좀 다를 수 있으니까.

행복이 성적순은 아니어도 취업순은 될 수 있는 사회였다.

연구실 안으로 들어오자 차민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용무가 있는 것 같다.

“왜?”

“저, 그게요. 조금 이르긴 하지만 학위논문지도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 싶어서요.”

“응? 논문지도교수 제청은 3학기 끝나고 하는 거 아닌가?”

“미리 준비해두면 좋을 것 같아서…….”

민재는 늘 미리 열심히 하는 학생이라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새 학교에 들어왔으면 연애도 하고 좀 놀러 다니고 해야지. 그렇게 틀어박혀서 공부만 하면 쓰냐?”

“춥거나 더우면 공부가 잘 안 되잖아요. 이렇게 따뜻하고 화창할 때 하는 공부가 제일 잘됩니다.”

“하하하하.”

두 사람은 자리를 소파 쪽으로 옮겼다. 일단 민우는 민재가 건네준 연구계획서를 살폈다.

명인대 양식에 정확히 맞춘, 마치 1년 뒤를 미리 준비한 것 같은 꼼꼼한 연구계획서였다.

절로 감탄이 나왔다.

문득 석사 1학기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자신은 이 정도까지 꼼꼼하진 못했던 것 같다.

“음, 실존주의 연구라…… 석사논문 테마로는 나쁘지 않은데?”

민우는 석사 시절 실존주의에 대한 연구를 즐겨 했다. 학회에서 발표한 것은 물론 프랑스의 실존주의 관련 논문을 번역하기도 했었다.

거기에 민영환 교수의 특별 지도까지 받았으니 실존주의에 대해서만큼은 명인대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의 지식을 쌓아두고 있었다.

물론 수제자인 차민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만약 민우를 다룬 ‘민우학’이라는 게 실존한다면, 차민재는 그 과목에서 에이플러스를 받을 자신이 있었다.

“너도 잘 알겠지만 석사논문은 연구가 많이 된 것들을 테마로 삼는 게 좋아. 박사논문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자료를 정리하는 기술과 논문식 글쓰기를 익히는 정도로 해야 뒤탈이 없지. 욕심을 과하게 부리면 쓰는 기간이 길어지거나 실패할 수도 있거든.”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테마들 중 왜 실존주의를 택했어?”

잠시 말을 고르던 민재가 웃으며 답했다.

“옛날에 선생님께서 학회에서 발표하신 시론 있잖아요. 그걸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도 그런 논문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게 언제였더라.

민우가 기억을 되짚었다. 아마 석사 시절 국제비교문학회에서 발표했던 바로 그 논문을 말하는 것 같다. 서강일과 처음으로 맞붙었던 바로 그때.

민재가 이어 말했다.

“물론 학위 논문이라 시론 형식으로는 쓸 수 없겠지만, 언젠가는 선생님 논문보다 더 멋진 논문을 쓰는 게 목표입니다. 그래서 그 시작으로 석사논문 테마로 잡아보려고요.”

“그렇군. 내 어깨를 짚고 더 멀리 보겠다 그런 의미냐.”

“예.”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민우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런 목표라면 도와주는 게 맞겠지. 이 서류는 1년 뒤에 제출해야겠지만 일단 내가 보관해두마.”

“감사합니다.”

“잠깐 기다려 봐. 좋은 걸 주지.”

자리에서 일어난 민우가 책상으로 돌아가 서랍을 열었다. 맨 아래 칸에서 잠자고 있던 오래된 노트가 나왔다.

다시 소파로 돌아온 민우는 그 노트를 차민재에게 건넸다.

“받아라.”

“이게…… 뭐예요?”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께 받은 노트야. 읽어보면 도움이 될 거다.”

그것은 민영환 교수가 학부 시절 스터디를 하며 적었던 바로 그 노트였다.

민영환 교수가 이 노트를 민우에게 완전히 넘길 때 이런 말을 했었다.

― 나중에 운이 좋으면 너도 교수 자리에 앉을 수 있겠지. 가봐야 아는 일이긴 하다만. 뭐, 그때 너 같은 놈이 보이거든 물려주도록 해라.

막연하기만 했던 그 일이 실현되었다.

민우는 그 말을 다시금 곱씹었다.

한 시대를 기록한 노트가 다음 세대로 이어졌고, 그다음 세대로 이어지려 하고 있었다.

노트가 차민재에게 넘어갔다.

민우는 노트에 담긴 지식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제자에게 전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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