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way (2)
어젯밤 했던 이야기의 영향일까. 연구실에 앉아 있던 민우는 뜻밖의 손님을 맞았다.
“형님! 하하하하. 잘 지내셨습니까?”
바로 톱스타 허윤이었다.
살짝 놀란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그런데 한동안 그의 외양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뭔가 비슷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너 뭐야?”
“네? 저요? 뭐긴요. 저 허윤입니다.”
“아니. 스타일이 그게 뭐냐고. 머리도 그렇고 옷도 그렇고. 왠지 나랑 비슷한 느낌인데?”
민우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허윤을 바라보았다.
투블럭의 단정한 헤어스타일은 물론, 얇은 니트에 단정한 느낌의 면바지를 입고 있다. 지금 민우의 복장과 상당히 비슷했다.
평소 허윤이 입고 다니던 그런 캐주얼한 느낌의 스타일이 전혀 아니었다.
약간 학구적인 느낌.
거기에 포인트로 도수 없는 안경까지 쓰고 있어서, 민우와 상당히 흡사한 느낌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슬슬 촬영 시작하거든요. 그래서 코디한테 형님하고 스타일을 좀 비슷하게 해달라고 했죠.”
“역시 그랬냐.”
“어때요.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허윤이 옷매무새를 뽐냈다. 잘 어울리고 말고 할 게 없었다.
허윤은 톱스타에 어울리는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자고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잘 어울려. 잘 해봐라.”
“뭡니까? 마치 남 일처럼 그러시다니. 저는 형님의 분신이나 다름없다고요! 좀 더 신경을 써 주셔야지!”
“이 이상으로 더 어떻게 신경 써? 한 달 동안 나 괴롭힌 걸로도 충분하지 않냐?”
“아, 그건 그러네.”
“안 그래도 어젯밤에 다른 선생들이랑 네 이야기 했는데 이렇게 딱 찾아올 줄은 몰랐네.”
이야기를 했다고 하니, 허윤은 반색하며 되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요?”
“너 좋은 일 있는데 왜 소식이 없냐고 주 선생이 그러더라고. 한턱 쏘라던데?”
“아! 그러고 보니 요즘 그쪽엔 연락을 못 드렸네요. 좋습니다! 까짓것 한턱 쏘죠!”
“한우로 쏘래.”
“…….”
“그럼 애들이랑 시간 잡아서 알려줄 테니까, 그때 스케줄 빼 놔.”
“알겠습니다…….”
한진섭과 주예린 커플이 소고기를 흡입할 정도로 잘 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허윤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 재밌는 모습에 민우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이야?”
“그냥 근처에 지나갈 일 있다가 매니저한테 잠시 들르자고 했어요. 형님 생각도 나고, 합격 이후로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으니까.”
“그런데 빈손으로 왔다고?”
“요즘 뭐 들고 오면 불법 아닙니까?”
“너랑은 사제지간도 아니고 이해관계도 없는데 뭔 상관이야.”
그때 차민재가 막 내린 커피를 두 잔 챙겨 각자의 앞에 내려놓았다.
“고맙다. 참, 민재야. 네가 보기에 윤이 드라마 잘할 거 같냐?”
“잘하실 거 같아요. 이렇게 똑같이 입고 오신 거 보면.”
“하하하하!”
민재는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다시 자리로 돌아갔고, 민우와 허윤은 다시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다.
그러다 문득 허윤이 진지하게 말했다.
“사실 용건이 있어서 온 거 맞아요.”
“그래? 또 무슨 도움이 필요하냐?”
“아유, 형님은 참! 제가 무슨 양아칩니까? 이번에는 좀 베풀려고 왔지요.”
“베풀다니? 딱히 네 도움이 필요할 만한 일은 아직 없는데.”
“과연 그럴까요?”
그때 허윤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민우는 깨달았다. 이 녀석, 뭔가 알고 있긴 하구나.
“지은이한테 들었습니다. 요즘 뭐 재미있는 프로젝트 시동 걸고 계시다고.”
“아, 들었냐.”
“그런 재미있는 일에 저를 빼놓으시다니. 정말 실망입니다.”
“바쁜 사람을 어떻게 데려오냐. 그리고 이건 우리 팀이 하는 일이라서.”
허윤은 예전부터 팀 307호에 가입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다. 워낙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보니 여유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함께하겠다는 말은 못 하고, 속앓이만 하고 있던 상황.
그러다 보니 이런 기회에 한 번 도움을 주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온 것이다.
“어쨌든 수강생 모집하실 거 아닙니까? 거의 자선사업급 아이템인 거 같던데요?”
“그렇지. 그런데 사람들이 많이 참여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비슷한 시기에 명인대에서도 인문학 프로그램 오픈하거든.”
“오, 경쟁이 붙나요?”
“그쪽은 정규 과정이라 비용이 들긴 한데, 아무래도 명인대 프리미엄은 무시할 수 없으니까.”
“흐음…… 어차피 나뉘지 않을까요? 대학 타이틀이 필요한 사람들은 명인대로 갈 거고, 진짜 배우고 싶은 사람들은 형님네로 갈 거고.”
그렇게 쉽게 풀린다면 다행이지만,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게 민우의 지론이었다. 무료인 만큼 이상한 사람들도 많이 몰릴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학생 선발에 신경을 많이 쓸 생각이야. 필요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지식을 전달한다는 게 우리의 목표라서.”
“그럼 홍보대사가 필요하겠군요.”
“뭐?”
허윤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엄지로 자신을 척 가리켰다.
“그럼 저 어떠십니까? 제가 휴머니티 홍보대사 할게요.”
“우리 돈 없어. 건물도 대한그룹에서 빌려다 쓰는 형편이야.”
“에헤이! 당연히 공짜로 해 드리는 거죠! 우정출연이라는 거 괜히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공짜로?”
그렇다면 솔깃할 만했다.
허윤은 대한민국 톱스타다. 아시아권에서도 위세를 떨치고 있는 스타인데, 그런 사람이 홍보대사를 해준다면 플러스면 플러스지 마이너스는 아니다.
게다가 허윤은 ‘독서의 밤’ 프로그램에 오래 출연했기 때문에 지적인 이미지가 충분하다.
그런 사람이 홍보대사로 나서준다면 효과는 극대화될 게 분명하다.
“음, 그거 좋은 생각이긴 한데.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 일단 다른 선생들한테 물어보마.”
“좋은 기회 놓치지 말고 잘 잡으셔야 합니다~”
“까불긴.”
그렇게 말하면서도 민우는 허윤이 고마웠다. 늘 이렇게 필요할 때에 나타나 도움을 주곤 했으니까.
그때 노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찾아온 손님은 이소윤이었다. 손에 뭘 잔뜩 들고 있었는데, 안에 허윤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 소윤이 왔구나! 웬일이야?”
“잠깐 교수님 뵈러요. 주연으로 뽑히셨다고 들었는데, 축하드려요.”
“하하하. 고마워.”
가까이 다가온 이소윤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민우에게 건넸다. 민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건 뭐야?”
“도시락 좀 싸봤어요. 지난번에 저녁 대접해주신 거 답례로요. 그때 너무 재미있게 놀아서 이렇게라도 답례하고 싶었어요.”
“뭘 이런 걸 다 싸 오고 그래. 공부하느라 바쁠 텐데.”
민우가 그렇게 말했고, 허윤이 이소윤의 팔을 슬쩍 치며 은근히 말했다.
“이런 거 싸 오면 옆방에 계신 교수님이 화낼지도 모른다?”
“옆방이요? 아.”
옆방에는 이수빈의 연구실이 있다. 하지만 이소윤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여기 오기 전에 이수빈 선생님께도 도시락 갖다 드렸거든요.”
“쳇, 아깝네.”
“뭐가 아깝다는 거냐?”
민우가 타박했고, 허윤은 입맛을 다셨다. 오랜만에 좋은 구경거리를 놓쳤다면서.
“아무튼 고맙게 잘 먹으마. 이따 점심은 와이프하고 같이 먹어야겠네.”
“반찬 다른 거 쌌으니까 같이 드시면 나눠 드시기 좋을 거예요.”
“그래?”
세심한 배려가 고마웠다. 의대 공부로 벅찰 땐데 이렇게 아침 일찍 일어나 도시락을 챙겨주다니.
“그럼 내일 수업 때 뵐게요.”
“참, 그 선배랑은 어떻게 됐어?”
“그 이후로 특별히 말씀은 없으세요. 바쁜 분이라서요.”
“잘 풀어 봐.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감사해요.”
꾸벅 인사한 이소윤이 연구실을 나섰다. 그러자 허윤이 바로 물었다.
“그 선배는 누굽니까?”
“그런 게 있어.”
“에이! 좀 알려 주세요. 네?”
평소라면 그냥 물러났을 텐데, 물어보는 게 심상치 않다. 민우가 씨익 웃으며 물었다.
“왜? 소윤이한테 관심 있냐?”
“아, 아뇨! 그럴 리가요. 흠흠. 아무튼 그 선배라는 게 누굽니까?”
“키 크고 잘생긴 의대 선배.”
“음…….”
“너도 참 알기 쉬워서 탈이다.”
한바탕 웃은 민우는 도시락을 한쪽에 내려놓고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곤 단체 톡방을 열고 허윤의 소식을 전했다.
하나둘 읽음 표시가 뜨더니 의견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허윤을 휴머니티 홍보대사로 위촉하는 것에 모두가 합의했다.
***
노크가 울리고 총장실의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것은 김명현이었다. 그의 손에는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뭔가?”
“잠시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가져오시게.”
뚜벅뚜벅 걸어간 김명현이 두 손으로 공손히 보고서를 건넸다. 파일을 받아든 백성웅 총장은 천천히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순간 그가 움찔 놀라더니, 천천히 김명현을 올려다보았다.
“허윤을 홍보대사로? 내가 알고 있는 그 허윤이 맞나?”
백성웅 총장이 미간을 좁혔다. 썩 좋은 보고는 아니었다. 이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민우와의 경쟁은 시작되고 있었다.
보고서를 올린 김명현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맞습니다. 요즘 TV에도 많이 나오는 그 톱스타지요. 최근에 <프로페서> 드라마의 주연으로도 발탁됐습니다. 아마 드라마가 방영된다면 더욱 시너지를 발휘할 겁니다.”
“으음.”
“TV 광고는 집행하기 어렵겠지만 인터넷을 이용한 무수한 광고 재생산이 가능합니다. 아마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 대중에게 알려지는 건 시간 문제겠지요.”
“으음…….”
“또한, 전에 지시하신 건은 조사해봤는데 역시 청문대와의 연결 고리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백성웅 총장이 탄식을 내뱉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정연주 이사장이 개입한 일인데 하나도 관여점이 없다는 겐가?”
“모든 집행 주체는 대한그룹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걸 문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대학도 대한그룹이 출자하는 사업이 있지 않습니까? 문제로 삼았다간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큽니다.”
“도의적인 책임을 물어야겠지. 나머지가 깨끗하다고 하더라도, 정연주 이사장이 개입한 이상 도의적인 책임은 피할 수 없어.”
탁.
백성웅 총장의 손에 들려 있던 보고서가 신경질적으로 책상 위로 떨어졌다.
“이번 일은 자네에게 일임한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내가 개입해야 하려나?”
백성웅 총장에게는 조커로 쓸 수 있는 패가 하나 남아 있었다.
바로 ‘대학윤리위원회’.
대학 구성원의 행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는 기관이다. 주로 교수들이 논문 표절이나 성폭력 등으로 회부되는 기관이기도 하다.
교수에게 있어 대학윤리위원회의 조사를 받는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명예 실추인 것이다.
“그럴 리가요. 아직 시간은 충분합니다. 우리 쪽에서도 대대적으로 매스컴을 공략할 예정이니 말이죠.”
“서둘러야 할 거야. 한번 파도를 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게 이 바닥 생리니까.”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획은?”
흉기처럼 날카로운 질문이었으나 김명현은 무던히 받아냈다.
“우리 프로그램의 광고를 일주일 일찍 집행하려고 합니다. 또한 수강생에게 줄 특전을 조금 늘려볼 생각입니다. 중앙도서관이나 강의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걸로 말이죠.”
“그건 뭐 자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내 다시 말하지만, 근본 없는 것들에게 당했다가는 그 뒷감당은 못 할 게야.”
“명심하겠습니다. 총장님.”
김명현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