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way (1)
고풍스러운 집무실 안.
커다란 중역용 책상에 앉아 있던 정연주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은은한 미소를 짓는다.
그 옆에서 보좌하던 비서실장 유진태가 그 미소를 놓칠 리가 없다.
“어느 분 전화이기에 그렇게 기분 좋게 웃으시는 겁니까? 오빠라는 호칭까지 쓰시고 말이죠.”
최근 공적인 일이 많다 보니 전화 응대에 있어서도 사무적으로 나서는 일이 많았다. 이렇게 친근하게 전화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정연주는 예전에 민우를 완전히 단념하고 연애와는 담을 쌓고 있는 상황.
그녀가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내가 오빠라는 호칭 쓰는 사람 많지 않은 거 알면서 그래.”
“박 교수님이군요.”
“맞아. 아까 들었지? 모레 오후 세 시에 휴머니티 건물로 갈 거야. 손님들 둘러보실 거니까 미리 준비해 주고.”
“알겠습니다.”
유진태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실수를 모르는 사람이라 일을 맡기면 늘 편안했다.
대한그룹 비서실장으로 일하고 있던 그는 최근 보직이 변경되었다. 정연주의 최측근, 즉 그녀의 수족으로 일하고 있었다.
대한그룹 회장의 걱정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대학에 미련이 남은 데다가 그리 건강한 편이 아니었으니 믿을 만한 사람을 옆에 붙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유진태도 평소 바라던 바였기 때문에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정연주는 여전히 유진태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최근 기분 좋은 일이 많으신 것 같네요.”
“그래?”
“제 눈은 속일 수 없으니까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린 정연주가 웃었다.
“좋은 일 많지. 이번에 팀원들하고 같이 프로젝트도 하게 됐고. 내 오피스텔에서 정기 모임도 하고. 뭔가 인생 제2막을 사는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마음속으로는 내심 자신이 곁을 지키게 됐다는 이야기가 나오길 바랐지만, 역시나 아직은 무리였다.
유진태 실장이 표정을 감추며 말했다.
“소박하시네요.”
“이게 소박하다고?”
“다른 형제분들에 비해서는 소박한 편이지요. 적어도 돈이 많이 들어가는 취미는 안 하시잖습니까.”
그렇기에 최근 정연주의 내부 지지율이 급격히 상승하고 있었다.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데다가 검소한 면도 있으니까.
게다가 그녀가 하는 일은 모두 그룹의 위상을 높이는 일들이었다.
자선사업은 물론 교육사업까지 활발히 하고 있으니, 대한그룹의 미래는 여전히 낙관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늘었다.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그런 깨달음을 다른 분들도 느끼셔야 할 텐데요.”
“언젠가 깨닫지 않을까? 내가 열심히 하다 보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정연주는 모니터에 집중했다. 화면엔 휴머니티 건물의 도면이 펼쳐져 있었다.
***
이틀 후, 팀 307호 원년 멤버들이 휴머니티 건물로 낙점된 곳에 들렀다. 잠시 멈춰선 넷이 고개를 젖혀 건물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와……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건물인가 봐요. 완전 신식이네.”
“그러게. 깨끗하기도 하고. 뭔가 창의력이 무럭무럭 샘솟네요! 글빨 잘 받겠는데?”
이수빈과 주예린의 평가였다. 민우와 한진섭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외양만 봤을 때는 100점 만점에 100점을 줄 수 있는 곳이었다.
“내부는 생각보다 더 넓을 것 같아요. 전 층을 다 사용하려면 인력이 많이 필요하겠네요.”
“요즘은 IoT로 작동하는 기구들이 많으니까 그리 힘들진 않을 거야.”
“하긴, 시대가 바뀌었지.”
이수빈이 이해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셨어요?”
그때 옆에서 정연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근사한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뒤에는 유진태 실장도 함께였다.
민우가 대표로 인사했다.
“정말 애 많이 썼다. 돈 많이 들었을 거 같은데.”
“괜찮아요. 대한그룹 쪽 재단이라 나중에 일이 잘 안 풀리더라도 다른 용도로 쓸 수 있으니까요.”
“하긴, 명색이 대한그룹인데 돈 걱정은 할 필요 없겠네. 우리 앞가림 걱정이나 해야지.”
진섭이 농담조로 받았다. 일동이 모두 소리 내어 웃었다.
“자, 그럼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유진태 실장이 안내해줄 거예요.”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유진태 실장이 정중히 손짓하며 앞장섰고, 일행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시설을 하나둘 둘러보기 시작했다.
1층에 들어서니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전형적인 빌딩의 로비 풍경이었다.
하지만 한쪽에서는 내부 공사가 한창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떤 용도로 만들어지는지 알 수는 없었다.
“입구 기준으로 우측은 개방형 라운지가 들어설 예정입니다. 각종 잡지를 비치해 놓고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공간이지요. 좌측으로는 카페와 구내식당이 들어섭니다. 외부인들도 이용할 수 있게 할 예정이지요.”
대지 면적이 상당히 넓은 편이라 모든 시설이 들어서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렇게 한 바퀴 둘러본 일행은 2층으로 올라갔다.
“여기는 1층보다 좀 더 공간이 많이 나뉘어진 느낌이네요.”
민우가 중얼거렸고, 유진태 실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보셨습니다. 2층은 휴머니티의 사무동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무실과 도서관, 그리고 회의실. 거기에 양호실까지 들어설 겁니다.”
“양호실까지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 될 것 같아서 만들려고요. 공간이 크게 필요하진 않으니까요.”
“좋은 생각이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3층과 4층은 동일한 구조로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유진태의 설명에 의하면 이곳이 메인 강의실이라고 한다.
“규모에 따라 다양한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계획입니다. 소형, 중형, 대형, 특대형. 이렇게 네 가지로 구분되지요.”
“이야…… 정말 준비를 많이 하셨다는 느낌이 드네요.”
민우가 솔직한 감상을 말했고, 유진태는 여전히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감탄하시기엔 이릅니다. 5층부터는 대한전자의 최첨단 기술을 선보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됩니다. 자, 그럼 5층으로 올라가 보실까요?”
유진태의 말은 과연 허언이 아니었다. 5층에는 각종 전자기기가 설치되고 있었다.
한쪽에는 와이드 모니터가 달린 컴퓨터와 고해상도 카메라, 그리고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었고 다른 한쪽으로는 최첨단 VR기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은 원격교육실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서비스하고 있는 모든 오픈코스웨어를 수강할 수 있는 곳이죠. 학생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관심사를 이곳에서 편하게 공부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와, 엄청난데요? 집기를 전부 구입하신 건가요?”
이번엔 정연주가 이수빈의 질문을 받았다.
“아뇨. 이건 대한전자에서 후원해 준 물건이에요. 제품 임대 형식이긴 하지만 AS까지 포함해서 무상으로 지원받을 수 있어요.”
유진태 실장이 이어 말했다.
“그리고 한쪽에는 열린 강의실이 들어섭니다. 여러분들도 기획서를 보셨겠지만 이곳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강의할 수 있는 곳이죠. 사무실을 거쳐 강좌 개설을 하면 누구나 강의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실제로 보니 정말 개강이 기대되네요.”
“시설 사진 돌리면 사람들이 엄청 몰릴 거 같은데? 안 그래?”
“홈페이지 제작을 서둘러야겠어.”
민우와 진섭이 의견을 주고받았다.
홈페이지 제작은, 일전에 폴라리스 홈페이지 제작 경험이 있는 서강일이 맡았다. 인테리어가 끝나는 대로 사전을 구해 바로 홈페이지를 열 계획이었다.
“그럼, 이제 6층으로 올라가시죠.”
6층은 다른 층에 비해 조용했다. 인테리어를 거의 손보지 않고 그대로 이용하려는 듯했다.
“여긴 세미나실과 교수 연구실이 자리합니다. 아마 여러분들께서도 연구실을 하나씩 배정받으시겠죠.”
그때 민우가 제안했다.
“연구실을 각자 쓰는 것보다 넓은 곳 하나를 쓰는 건 어떨까요? 왠지 각자 쓰는 건 올드해 보이기도 하고, 폐쇄적이니까.”
“그거 좋은 생각인데?”
“전 찬성요!”
“나도!”
모두가 들뜬 마음으로 찬성표를 던졌다. 청문대 한국문화교육원 강사 시절 함께 연구실을 썼던 추억이 떠올랐던 게 분명했다.
“그럼 그렇게 할게요. 벽 몇 개를 터서 큰 연구실로 만들면 되겠네요. 유 실장. 그렇게 준비해 줘.”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일행은 7층으로 올라갔다. 통으로 된 거대한 공간이었는데, 아직 비닐을 뜯지도 않은 운동 기구가 일렬로 놓여 있었다.
“이곳은 학생들의 건강을 책임질 피트니스 센터입니다. 등록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올라와서 자유롭게 운동을 할 수 있지요. 전문 강사도 고용해서 체계적으로 관리할 예정입니다.”
“당장 운동해야 할 사람이 여기 둘이나 있네.”
주예린의 일침에 민우와 한진섭은 배에 힘을 딱 주었다.
“내부 인테리어는 2주 정도면 모두 끝날 거예요. 중요한 건 우리들이 얼마나 이곳에서 역량을 발휘하는 거겠죠.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들.”
정연주의 말에 모두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민우는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다짐을 했다. 이곳에 사람들로 가득 차는 것 외에도, 그는 김명현에게 증명하고 싶은 게 하나 있었다.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
“투자금도 성공적으로 유치되고 있고, 인테리어도 깔끔하게 잘되고 있고. 이제 오픈하는 일만 남았구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진섭이 그렇게 외쳤다. 콧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니, 묻지 않아도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었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민우가 물었다.
“근데 주예린 너. 제임스 사장님은 어떻게 불러들인 거야? 꽤 다급하게 오신 것 같더만.”
“그냥 작품 이야기 좀 하자고 불렀죠.”
“차기작 얘기?”
“아뇨. <세계수> 얘기.”
“……그게 무슨 소리야? 세계수는 좀 된 작품이잖아.”
“작품 이야기하자고 했지 차기 작품 이야기하자고 하진 않았잖아요?”
그러면서 주예린이 사악한 미소를 짓는다. 왠지 제임스 사장이 불쌍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레아가 듣는다면 자업자득이라고 하겠지.
“설마 그런 말장난 하려고 부른 건 아닐 테고…….”
“그냥 하고 싶은 일이 좀 있는데 도와달라고 솔직히 말했어요. 그랬더니 차기작 계약 여부와 관계없이 후원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출판사 사장 일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니까. 얼마나 눈치를 봤겠어?”
민우의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주예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너무 일이 잘 풀리는 거 같아서요. 그럴 땐 한 번 의심해줘야 하는 거 아닌감?”
작가다운 고민이었다. 하긴, 위기 없이 결말로 가는 이야기가 그렇게 흔했던가.
민우는 그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프로젝트가 가시화되고 있음에도, 총장실에서는 특별한 지시가 내려온 게 없었다.
“나름 대비는 하고 있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잘 풀어봐야지.”
“참, 허윤 그 녀석 이번에 드라마 주연으로 발탁됐다면서요? 왜 소식이 없대?”
주예린이 화제를 바꿨다.
허윤은 예전에 크리스마스 파티를 시작으로, 팀 307호 멤버들과도 인연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질문이 나온 것이다.
민우가 피식 웃었다.
“요즘 연습한다 뭐 한다 정신이 없나 봐. 한동안 나 따라다니느라 스케줄을 많이 취소했거든. 그거 밀린 거 소화하고 있겠지 뭐.”
“톱스타도 쉬운 일이 아니네.”
“돈 잘 벌면 장땡이지!”
“그럼 나중에 소고기로 퉁치라고 해.”
“옳소!”
그렇게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일행이 탄 자동차는 도로를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