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플레이 (3)
「레아 씨를 보내주셔서 얼마나 마음이 놓였는지 모릅니다. 먼저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혼잡한 공항을 빠져나와 차에 오른 민우가 정식으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제임스가 허벅지를 탁 치며 껄껄 웃었다.
「민우 씨가 재미있는 일을 또 벌이고 있는데 구경만 하면 재미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사장 취임 후에 일이 훨씬 많아졌잖아요. 정말 바쁘시다고 들었습니다.」
레아가 제임스에게 삐치긴 했어도, 그의 업적과 역량을 저평가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제임스가 얼마나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지 상세히 말해주었다.
「뭐 그거야 아까 제 진심을 전했으니 그걸로 갈음하고. 어떻습니까? 휴머니티 프로젝트였던가요. 잘 준비되고 있는지.」
「지금까지는 순조롭습니다. 아마 주예린 작가가 제임스 씨를 부른 것도 그 일 때문일 거예요.」
「뭐라고요? 차기작 계약 건 때문이 아니고?」
제임스가 장난스럽게 실망한 기색을 보이자, 민우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긴 하겠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는 거죠. 세상에서 제일 바쁘신 분을 일 하나만으로 부르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흠흠, 하긴 그렇죠. 뭐, 여러 일이 있다는 건 좋은 겁니다. 그만큼 우리 회사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거니까 말이죠.」
제임스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말하는 태도를 보았을 때, 후원금 이야기를 꺼내도 난색을 표할 것 같지는 않다.
「그나저나 프로페서. 요즘 한국 언론이 좀 시끄럽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괜찮은 겁니까?」
민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언제는 안 괜찮은 때가 있었나요. 그러려니 합니다. 한국 언론은 진득하니 끓는 맛이 없어서요. 아마 조만간 조용해지겠죠.」
「그래도 걱정이군요.」
「근본적인 문제라서 말입니다. 참, 말이 나와서 말인데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제임스가 얼마든지 물어보라며 쿨하게 손짓했다. 민우가 물었다.
「교육은 비즈니스다, 라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으음, 상당히 현대적인 관점이군요.」
제임스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이어 말했다.
「절반 정도는 지지합니다. 지금은 자본주의 사회 아닙니까. 어떤 일을 하든 자본이 필요하죠.」
민우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휴머니티 프로젝트’ 또한 자본 의존적인 사업이다. 건물을 임대하는 것도, 그리고 상주 직원의 급여를 주는 것도 모두 돈이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지금 멤버들이 사방으로 후원자를 물색하고 있는 중이고.
그래도 민우는 좀 다르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서비스를 이용하는 이용객은 돈 걱정 없이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진짜 자본에 종속되려면, 그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도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그 말과 전혀 상관없는 분께서 말이죠.」
「요즘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입버릇처럼 하고 다니는 말이라서요.」
「호오, 재밌군요. 요컨대 박 교수의 새로운 라이벌이라 이겁니까?」
「라이벌까지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민우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교육계에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포지션을 취하고 있으니까.
라이벌은 아니더라도 적수는 되지 않을까.
서로 손에 무기만 쥐지 않았을 뿐이지, 언제든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부디 그 전쟁에서 살아남아 승리의 깃발을 휘날리시길!」
「감사합니다. 아, 그런데 주예린 작가는 언제 만나십니까?」
「일단은 내일 만나기로 했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참 기대되네요.」
「제임스 씨도 그 전쟁에서 살아남기를 기도해 드리죠.」
「하하하.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밤이 깊어져 갔다.
***
다음 날, 민우는 느지막이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오늘은 이수빈이 윤아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날이라 좀 늑장을 부릴 수 있었다.
‘확실히 좀 피곤하단 말이지. 운동을 다시 시작해야 하나.’
이수빈의 성화로 매년 정기검진을 받고 있어서 건강상의 문제는 특별히 없다. 운동 부족으로 인한 체력 저하를 실감하고 있는 요즘이었다.
깨끗이 씻고 나와 옷을 갈아입은 민우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근했다.
평소라면 레아가 왔겠지만, 그녀는 당분간 제임스 사장을 보좌하기로 했다.
버스에 올라 민우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매스컴의 반응이었다.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예전만 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금방 식는군. 이래서야 문제 제기를 한다고 해도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굳이 언론 플레이를 하고 싶지 않았던 민우라 다행인가 싶다가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명인대에 도착한 민우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이소윤이 인문관 정문 옆쪽에 서 있었다.
그런데 그녀 혼자가 아니었다. 키가 크고 잘생긴 어떤 남자가 엄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다그치고 있었다.
목소리가 조금 커서, 엿들을 생각이 없는데도 말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내가 진짜 이해가 안 돼서 하는 말인데. 왜 국시 앞둔 본과 4학년이 인문관 근처를 기웃거려야 하는 거야? 이소윤 너 국시 패스할 자신 있어?”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학 선배인 것 같았다. 이소윤은 고개를 숙인 채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아니, 자신이 있다고 쳐도 이건 아니지. 괜히 미끄러져서 쪽팔림 당하지 말고 정신 차려! 무슨 놈의 청강은 청강이야? 그런 강의는 나중에 들어도 상관없잖아?”
“죄송해요.”
“나는 죄송하다는 말을 들으려고 너한테 이러는 거 아냐. 당장 행동으로 보이라고. 얼마나 답답하면 내가 여기까지 와서 너한테 이러겠냐?”
어떤 상황인지 대강 짐작되었다. 처음 이소윤이 청강을 하겠다고 했을 때 민우가 했던 걱정과 정확히 일치했다.
민우가 그쪽으로 다가갔다.
“진짜 이 사실이 교수님들 귀에 들어가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어?”
“안녕하세요.”
민우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웃으며 인사를 하는 사람에게 악담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역시나 선배로 보이는 그 사람은 움찔하더니, 어색한 표정으로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박민우 교수님.”
“안녕하세요.”
이소윤도 인사했다. 민우는 웃으며 상황을 중재하기 위해 나섰다.
“엿들을 생각은 없었는데, 목소리가 커서 다 들렸어요. 내 강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 같아서.”
“아! 이거 죄송합니다. 교수님 강의를 깎아내리려는 건 아니고…….”
“알아요. 과 선배죠?”
“예.”
선배라면 지금쯤 명인대 부속병원에서 인턴이나 레지던트를 하고 있겠지. 여기까지 올 정도면, 이소윤을 정말 아낀다는 말이기도 하다.
“저도 처음에 같은 걱정을 했거든요. 이소윤 학생이 본과 4학년인데 청강을 하겠다고 해서요. 하지만 이소윤 학생도 성인이고, 자기가 하는 일에 책임을 질 나이예요. 그래서 저는 그 선택을 존중해주기로 했습니다. 내가 걱정하는 문제는 이미 본인이 다 고민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아, 네…….”
“그러니 좀 지켜봐 주시는 건 어떨까요. 국시에 떨어지든, 좋지 않은 평가가 나오든 그건 오롯이 이소윤 학생이 짊어져야 하는 짐이니까.”
민우의 말을 경청하던 선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 말씀, 어떤 건지 잘 알겠습니다. 혼낼 생각은 없었는데 너무 답답하다 보니까…….”
“이해합니다. 저도 비슷한 일로 대학원생 때 혼난 적이 있거든요.”
“아무튼 실례했습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꾸벅 인사한 선배가 저쪽으로 사라졌다. 이소윤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죄송해요. 교수님께 이런 모습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도 좋은 거 아냐?”
“좋다뇨?”
“미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잖아. 경쟁자라고 생각했다면 그런 조언을 해줬겠어? 미움 사 가면서.”
이소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
민우가 인문관 쪽으로 걷기 시작하자, 정신을 차린 이소윤이 옆으로 따라붙었다.
“근데요 교수님.”
“응?”
“아까 대학원생 때 비슷한 일로 혼난 적 있다고 하셨잖아요. 어떤 일이었어요?”
“아, 그거?”
민우는 석사 1학기 때 있었던 일, 정확히는 강철훈 교수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되어 최민식과 트러블이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소윤이 깜짝 놀랐다.
“교수님도 그런 시절이 있었네요…….”
“그때는 정말 힘들었지. 학부가 명인대가 아니다 보니까 차별도 많이 받았고. 뭐, 그래도 하나하나 바꿔 나가다 보니 나중에는 많이 편해졌지만. 지금은 아예 그런 문화가 없어졌어. 타대생들도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곳이 되었지.”
“긍정적인 영향을 주신 거네요.”
“운이 좋았어.”
민우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보존서고에서 루카치의 유품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테니까.
당연히 그 사실을 모르는 이소윤은 단지 겸손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최민식이라는 선배분하고는 이후로 어떻게 되셨어요?”
“매형이 되었지.”
“예?”
“말 그대로 매형이 됐다고. 우리 누나랑 결혼했어. 나 예전에 명인대 부속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병문안 와서 눈이 맞아버렸지 뭐야.”
“와…….”
이소윤이 줄인 말 뒤에는 사람 일은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의미가 들어 있었다. 민우가 그걸 모를 정도로 둔하진 않다.
“그러니까 좋은 말 해줬다 치고 잘 지내봐. 아까 그 선배, 훤칠하니 잘생겼던데?”
“아, 그런 건 아녜요!”
“부끄러워하는 거 보니 백 프로네.”
민우는 소리 내어 웃으며 연구실로 올라갔다. 곧 있을 강의 준비를 위해서.
***
강의를 하고 돌아오니 핸드폰에 톡이 몇 개 와 있었다. 열어보니 정연주와 주예린이 보낸 톡이 보였다.
일단 민우는 정연주의 톡부터 열어보았다.
주예린이야 뭐 평소처럼 쓸데없는 걸 보냈을 게 뻔하니까.
‘건물 계약이 모두 끝났구나. 근데 벌써 인테리어 시작한다고? 역시 일 처리가 빠르네.’
하지만 그녀의 뒤에 초일류기업인 대한그룹이 버티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계열사 하나만 동원해도 인테리어 정도는 일도 아니지 않을까?
민우는 정연주의 전화번호를 찾아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네, 오빠.
“통화 괜찮아? 톡이 와 있길래.”
― 그럼요.
목소리가 활기차다.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민우는 자리에 편히 앉아 용건을 말했다.
“계약 끝났으면 현장 한번 둘러봐도 되나? 미리 구상을 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서 말이지.”
― 괜찮아요. 언제쯤 오시게요?
“모레쯤이면 괜찮을 거 같아.”
― 다 같이 오시나요?
“응. 명인대 선생들하고 같이 갈게.”
― 그럼 모레 오후 세 시쯤 스케줄 비워둘게요. 제가 주소 남겨드릴 테니 그쪽으로 바로 오시면 될 것 같아요.
“오케이. 고마워.”
민우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주예린이 보낸 톡을 열어보았다. 사진이 하나 와 있었는데, 다름 아닌 제임스 사장과 함께 찍은 인증샷이었다.
“애도 아니고 뭐 이런 걸 찍고 그래?”
피식 웃은 민우는 톡 창을 닫으려다가, 바로 이어진 주예린의 톡을 보곤 손가락을 거뒀다.
주님: (속보) 제임스 사장님이 30만 불 후원해 주시기로 함!
그러면 그렇지.
민우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