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23화 (323/500)

언론 플레이 (1)

4월에 들어서자 봄기운이 물씬 넘쳐났다. 명인대 캠퍼스에도 본격적인 봄의 향기가 풍기기 시작했다.

오가는 사람들의 복장이 얇아진 것은 물론, 잔디밭이나 공터에 옹기종기 모여 자리를 깔고 노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곧 1학기 중간고사 기간이지만 많은 학생들이 내일의 시름을 잊은 채 청춘을 즐기고 있었다.

“좋을 때다.”

이수빈의 중얼거림에 민우가 고개를 돌렸다. 이수빈의 시선은 난간 너머로 보이는 잔디밭을 향해 있었다.

학생들이 돗자리를 깔고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나이 차도 별로 안 나 보이는데 좋을 때라는 말이 나와?”

민우가 옆에서 잔소리했다. 그러자 수빈이 입술을 툭 내밀며 심통을 부린다.

“나이가 중요한가? 나는 저렇게 못 하는 게 중요하지.”

“하면 되지 뭐. 눈치 볼 게 뭐 있어?”

“학보사 1면에 대문짝만하게 기사 실릴 일 있어? 교수들이 하라는 연구는 안 하고 모여서 놀기나 한다고 욕 먹을 게 뻔한데.”

“교수는 사람 아니냐? 쉴 땐 쉬어야지. 게다가 곧 꽃놀이 시즌인데.”

그러자 수빈의 표정이 방긋 펴졌다.

“그럼 다음에 섭섭 오빠랑 예린이랑 넷이서 모여서 꽃놀이할까요?”

“꽃놀이는 좀 거창하고, 그냥 커피나 한잔 사서 놀지 뭐. 술은 안 되니까.”

“맥주도 안 되나?”

“학칙이잖아.”

이수빈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연구다 육아다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술을 못 마신 것 같다.

‘날 잡아서 친구들하고 좀 놀고 오라고 해야겠네.’

최근 일이 많아서 주말에 윤아를 돌보지 못했는데, 이번 주는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이수빈에게 여가를 주기로 결심했다.

결혼도 어쨌든 팀플레이니까. 서로 바쁘더라도 호흡을 맞추는 게 중요하다.

본인이 힘들다고 서로의 고통을 외면하게 되면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건 결혼뿐만 아니라 모든 공동체가 마찬가지다.

“어머~ 이게 누구셔. 교수님들! 안녕하세요?”

그때 누군가 붙임성 있게 말을 걸어왔다. 얼굴을 확인한 민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 넓은 캠퍼스에서 이렇게 뵙게 되다니! 우연이네요.”

말을 걸어온 사람은 경한신문의 박윤지 기자였다. 선임급 기자로 승진한 이후 보다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었다.

민우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절묘하지 않습니까?”

“그럼 필연일까요? 그것도 나름 좋긴 한데요. 하하하. 잠깐 한 컷 괜찮으시죠? 두 분 너무 보기 좋아서요!”

“음, 뭐 그러시죠.”

민우는 이수빈과 나란히 서서 포즈를 잡았다. 박윤지 기자는 카메라로 두 사람의 모습을 몇 컷 찍었다. 그리곤 생긋 웃었다.

“감사합니다. 참 박 교수님, 오늘 강의는 다 끝나신 거죠?”

“그렇긴 한데, 바로 연구실로 돌아가 봐야 해요.”

“여전히 바쁘시구나.”

그때 뭔가 낌새를 눈치챈 이수빈이 먼저 돌아가겠다고 귓속말한 뒤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역시 눈치가 빠르구나, 민우는 감탄했다.

그녀는 괜히 매스컴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아…… 여기까지 오셨는데 또 그냥 돌려 보내드리는 건 뭔가 예의가 아닌 것 같고”

“아니에요! 저 정말 인터뷰하려고 온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박윤지 기자는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인터뷰하러 온 게 아니라는 건 거짓말일 것이다.

자신의 동선과 시간표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연을 가장해서 만나는 것은, 언론인들이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이었으니까.

이 정도 공을 들였으면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어 주는 게 좋겠지.

그렇게 생각한 민우는 걷기 시작했다.

“잠깐은 괜찮습니다. 가시죠.”

“네!”

민우는 박윤지 기자를 데리고 한적한 곳의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근처에 있는 자판기로 가 음료수를 두 개 뽑아 그중 하나를 박윤지에게 건넸다.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음료수가 아니라 펜과 메모장이었다.

음료수를 잠시 옆으로 내려놓고, 오른손으로는 펜을 쥐었다.

“윤지 씨. 이렇게 오셔도 원하는 대답은 못 해 드립니다.”

“어머, 제가 원하는 대답이 뭔지 아시는 거예요?”

“그야 뻔하죠. 교양학부 쪽 취재하고 오셨을 텐데. 인문학 프로그램 건 때문에 오신 거 아닙니까? 비판적인 코멘트를 듣고 싶어 할 거 같은데, 제가 틀렸나요?”

미소를 지은 박윤지 기자는 펜을 다시 안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메모장도 주머니에 넣었다.

“음? 웬일이에요?”

“그냥, 왠지 지금은 이러면 안 될 거 같아서요.”

그렇게 대답하며 박윤지 기자는 벤치에 몸을 편히 기댔다.

사실, 민우와는 조금 특별한 관계라고 생각했다.

햇병아리 기자 시절부터 지금까지 중요한 소스를 받았고, 민우가 성장하는 만큼 자기도 기자로서 쑥쑥 성장했으니까.

기자와 인터뷰 대상이 아니라 동반자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많이 힘드시죠? 요즘 언론들도 냄새를 맡아서 이런저런 기사들 많이 내고 있잖아요.”

명인대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사립대학 전체로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이권이 얽힌 사업 전반을 다루다 보니 결국 본질은 흐려지고 말았다.

하나로 집중되던 관심이 여러 곳으로 분산되어 버린 것이다.

덕분에 명인대 이슈는 묻힌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명인대 교양학부나 이해당사자인 민우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는 언론들은 여전히 많다.

물론, 대부분은 비서인 레아가 중간에서 잘라주는 덕에 민우에게까지 오진 않지만 말이다.

‘이런 흐름도 그쪽 진영에서 예상했던 일이겠지?’

민우는 여유롭게 웃는 김명현의 모습을 떠올렸다.

미국 유학파 엘리트의 입장에서, 언론이 금방 다른 떡밥을 물 거라는 예측은 어렵지 않을 거다. 그걸 제대로 이용한 것이다.

길고 긴 장마가 아니라 소나기임을 정확히 꿰뚫어 본 것.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우리도 우리가 기레기라고 불리는 걸 잘 알아요.”

“너무 솔직하신데.”

“그래도 실제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화가 많이 나죠. 하지만 왜 화가 날까, 그런 생각을 하고 나면 언론인의 진정한 자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언론인의 진정한 자세…… 그게 뭘까요?”

“올바른 보도라고 생각해요. 가치판단하기 전의 날것 그대로의 진실을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거죠. 학부 때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기자는 판단해서는 안 된다. 있는 그대로를 전달해야 한다고.”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멋진 말씀입니다. 하지만 지금 언론은 그렇지 않죠.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보지 않으면, 거짓 뉴스들이 워낙 판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일선에 있는 저희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상급자들이 요구하거나 데스크의 편집 지침, 회사의 스폰서들. 결국 돈에 얽힌 일이니까요.”

“먹고사는 문제라는 말씀이죠?”

“맞아요.”

어느새 인터뷰가 아니라 고해성사하는 자리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민우는 이런 느낌이 싫지 않았다.

캔을 따니 치익, 하는 탄산 새는 소리가 들렸다.

민우는 시원하게 음료를 들이켰다.

“저도 한번 고민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네요. 결국 기자라는 직업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카메라나 글에 담는 거잖아요. 넓게 본다면 인문학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거니까.”

“제가 괜히 와서 고민거리만 늘어놓고 갔네요.”

“그냥 어쩌다 보니 그런 이야기가 나온 거라면 상관없는데, 설계해서 오신 거라면 정말 소름일 거 같아요.”

“예?”

“물어보세요. 궁금하신 거.”

올바른 기자의 자세에 대해 고민하는 기자 앞에서,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어떻게든 역경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사람을 외면하는 것과 다를 게 없으니까.

민우의 말에 박윤지 기자가 눈을 빛냈다.

“이번 인문학 프로그램 강의에 참가하지 않으시는 건 사실일까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지만 박지윤 기자의 질문은 그만큼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본인에게 확인하는 첫 질문이 될 것이기에.

“맞습니다. 사실입니다.”

“일각에서는 강의 설계부터 아예 배제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이것도 사실일까요?”

“네.”

박윤지 기자가 다시 펜과 메모장을 쥐었다. 그녀는 빠르게 기록하면서 재차 물었다.

“박민우 교수님은 이미 세계적인 학자로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는데요. 소속 대학의 인문학 프로그램에서 배제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글쎄요. 여러 이유가 있을 것 같네요. 일단 대학은 굉장히 큽니다. 구성원도 수천 명이고, 학교 안에 버스가 다닐 정도로 넓기도 하지요. 그런 상황에서 교수들 입맛에 일일이 맞추는 기획은 사실상 많이 어렵지요. 대학 당국의 어려움도 이해를 해줘야 합니다.”

“하지만 인문학 하면 박민우 교수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텐데요. 무엇보다도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신 분이잖아요?”

“저는 그게 두렵습니다.”

뜬금없는 한마디에 박윤지 기자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정신을 차린 그녀가 물었다.

“두렵다니요?”

“뭐만 하면 제 이름이 나오는 상황이 두렵다는 거예요. 누가 들으면 배부른 고민 한다, 뭐 이런 말씀을 하시겠지만 전혀 그런 건 아니고요. 실제로 명인대를 보면 문학이나 역사, 인류학, 철학 등을 전공한 교수님들이 많이 계시죠. 제 이름 때문에 그분들의 업적이 가려지는 걸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아…….”

“지금 언론의 취재 경쟁은 조금 과열된 측면이 없잖아 있어요. 저도 사람이잖아요. 최근에는 드라마 관련 일도 하게 되어서 정신이 없는데, 강의 하나 빠진 걸로 이렇게 이슈가 된다면 상당히 피곤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모든 언론인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사실 민우는 마음만 먹으면 대학본부나 김명현을 향해 일침을 날릴 수도 있었다.

대학은 시장이 아니라고. 재화에 가치에 따라 교육이 변할 수는 없는 거라고.

하지만 그것을 언론의 힘을 빌려 이야기하는 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진짜 가르쳐주고 싶다면 몸소 보여주는 게 맞지 않을까.

‘휴머니티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것으로 말이다.

“그리고 저도 지금 개인적으로 준비하는 프로젝트가 있어요. 전에 살짝 말씀드린 적 있는데, 휴머니티 프로젝트라고.”

“아! 맞아요. 최근 그 소식이 좀 잠잠하다 싶었는데, 진척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곧 건물 계약도 완료되고, 이제 인테리어에 들어갈 거예요. 후원해 주시겠다는 업체도 많아서 당분간은 운영에 큰 걱정이 없을 것 같네요.”

“정말 잘됐네요. 일이 잘 풀려서.”

“휴머니티를 이용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이 몰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텅 빈 것보다는 북적거리는 게 좋겠죠. 기자님도 많이 도와주세요.”

“그럴게요.”

“저도 더 좋은 소식 많이 전해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박윤지 기자가 펜을 회수했다. 메모장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벌써 인터뷰 끝내시게요?”

“이렇게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셨는데 너무 오래 붙잡아두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갑작스럽지만 인터뷰 응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별말씀을요. 기사는 언제 나갑니까?”

“내일 바로 나갈 거예요. 기사 위치 확정되면 연락 드릴게요.”

꾸벅 인사한 박윤지는 먼저 자리를 떴다. 민우는 그녀가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남은 음료수를 홀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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