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의 동침 (3)
배우들은 심사위원 말고도 업계 동료이자 경쟁자라는 관객을 두게 되었다. 지원한 사람들의 얼굴에 잔뜩 긴장이 서렸다.
“거 너무 긴장하지 말고 평소 연습한 대로 하세요. 나중에 제 실력 못 냈다, 뭐 이런 인터뷰 하면 서로 곤란하지 않겠어?”
보다 못한 한정현 감독이 힘주어 말했다. 나름 긴장을 풀어 주려고 한 말 같은데, 오히려 역효과가 난 것 같다.
누구는 심호흡을 하며, 누구는 눈을 감고 명상을 하며 긴장을 풀었다.
민우는 그 찰나의 순간 배우들 사이에서 나타난 어떤 특징을 포착할 수 있었다.
‘관록이 있는 배우들은 그렇게 긴장하지 않는구나.’
특히 아역 배우 출신인 허윤은 오히려 싱글벙글 웃으며 민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연기를 한시라도 빨리 보여주고 싶기라도 한 걸까. 민우가 심사위원으로 앉아 있어 놀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들뜬 표정이었다.
‘윤이 녀석, 까불지 말고 잘 해내야 할 텐데.’
민우의 입장에서도 허윤이 주인공 역을 맡게 된다면 좋을 것 같았다. 친한 사람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의 연기엔 믿음이 가니까.
‘그래도 오늘은 공정하게 심사해야지. 아무리 윤이 녀석이 하고 싶다고 졸라도 더 뛰어난 사람이 있다면 그쪽으로…….’
민우가 그렇게 생각할 무렵, 오디션이 시작되었다.
조감독 명이랑이 배우를 호명했다.
한 사람씩 올라와 자유 연기와 지정 연기를 펼치는 방식으로 오디션이 진행되었다. 첫 번째로 배정받은 배우가 무대에 올라서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곽철입니다.”
“곽철 씨. 우리 짧고 굵게 갑시다. 오디션 늘어지면 끝도 없는 거 알죠? 보여줄 거 있으면 팍! 보여주라고. 일단 자유 연기부터!”
자유 연기는 각본 내에서 배우가 원하는 부분을 짚어서 연기하는 방식이다.
오디션에 들어가기 전, 한정현 감독이 조언해 줬는데 배우의 진가는 감독 지정 연기에서 드러난다고 한다.
자유 연기, 즉 가장 자신 있는 씬을 연기하면 누구든 다 잘할 테니까.
그래도 민우는 자유 연기에 집중했다.
“문학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습니다.”
덤덤한 내레이션이 펼쳐졌다.
어느 부분이었더라.
곰곰이 생각한 민우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극중 박진수가 지도교수인 서다훈 교수와 토론을 벌이는 장면일 것이다.
실제로 자신이 서지훈 교수와 토론했을 때 한 말이기도 했다.
곽철이 양팔을 천천히 펼치며 연기에 몰입했다.
“문학은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마치 사람이 나이를 먹으며 성숙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죠.”
여기까지 깔끔했다.
곽철이 두어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마치 심사위원석에 서다훈 교수가 있는 것처럼, 도전적으로 몰아붙인다.
“한 인간의 일생을 놓고 어떻다고 정의할 수 있습니까? 쉽지 않을 겁니다. 살아온 시간이 적지 않기 때문이죠.”
또다시 표정이 바뀌고.
“문학은 인간의 수명을 초월한 지 오래입니다. 따라서 문학을 정의하는 것은, 한 인간의 일생을 정의하는 것보다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짧은 대사 사이에서 이렇게 감정의 변화가 자연스러운 것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마치 연극 무대를 감상하는 듯한 느낌.
곽철이 이어 대사를 전개하려 할 때, 갑자기 한정현 감독이 손을 홰홰 저었다.
“됐어. 그만하지. 연습이 부족해. 성량도 그렇고. 딕션을 좀 더 정확히 해야겠어. 첫 번째 타자라 코멘트 해준 거니까 그렇게 알고 내려가 봐요.”
“조, 조금만 더 기회를 주십쇼! 지정 연기라도 좀!”
“더 볼 거 없어. 어서 가요.”
한정현 감독의 명령은 지엄했다. 곽철은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조감독의 손에 이끌려 무대를 내려가야 했다.
정말 가차 없구나.
민우는 그렇게 탄식하면서도, 이어지는 배우들의 연기에 빠져들고 말았다.
결국엔 한 가지 문제에 봉착하고 말았다.
‘이거…… 내가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거야?’
연기와 감정선의 자연스러움을 보다 보니 다 똑같은 느낌이 들었다. 잘했다 싶으면 한정현 감독이 꾸짖었고, 못했다 싶으면 격려하곤 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뒤죽박죽인 상황.
민우는 한숨을 내쉬며 채점표에 가점수를 기입했다. 지금까지는 대부분 점수가 비슷했다. 정확한 기준을 세우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윤이가 나온다면…… 좀 달라질 수 있을까?’
때마침 조감독의 입에서 허윤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관객석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허윤의 오디션은 모든 지원자들이 주목하는 것이었다.
모두가 선망하는 대상이자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으니까.
“안녕하십니까. 허윤입니다.”
무대로 올라온 허윤이 심사위원석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한정현 감독이 씨익 웃었다.
“허 배우. 오랜만이네. 중학생 때 이후로 처음인가?”
“맞습니다. 그때 감독님하고 단편 드라마 하나 했었죠. <밀행>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 맞아. 이렇게 오디션 무대에서 다시 보니 새롭구만. 그런데 허 배우 정도면 섭외해 달라고 요청해도 됐을 텐데.”
“당당히 오디션으로 인정받고 싶은 분이 계셔서요.”
“인정?”
허윤의 시선이 민우를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아챈 한정현 감독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장난기는 여전하구만. 그러다 배역 뺏기면 어쩌려고?”
“그건 그거대로 기쁜 거 아닐까요? 제가 부족하다는 증거니까, 좀 더 노력하는 계기로 삼으면 되는 거죠.”
“흐응, 뭐. 일단 자유 연기 가보자고.”
한정현 감독이 손짓으로 사인하자 허윤은 들고 온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소품을 준비한 모양이네요.”
뭐 하나 싶었는데 옆에서 명이랑 조감독이 해설해 주었다. 민우가 되물었다.
“소품을 준비하는 배우들이 많나요?”
“많진 않습니다. 역효과가 날 수도 있거든요. 감독님들은 소품에도 아주 예민하시니까요.”
“그런데도 저렇게 소품을 준비해 왔다는 건…….”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증거겠죠.”
허윤이 가방에서 꺼내든 것은 낡은 책이었다. 표지가 익숙한 책이다. 민우도 학부 시절에 즐겨 읽던 책이었으니까.
책 제목은 바로 <소크라테스의 변명>이었다.
그 책에는 얽힌 사연이 많다.
그래서 민우는 허윤이 어떤 부분을 자유 연기할 것인지 짐작했다.
인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바로 그 장면일 것이다.
“실장님께서 왜 이 책을 주셨는지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너 자신을 알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죠. 무지를 아는 것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삼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되새기라는 건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숨이 멎을 듯한 박력. 조용한 읊조림에도 힘이 들어가 있다.
딕션도 정확하고, 성량도 훌륭하다. 작게 중얼거리는 거지만 귀에 쏙쏙 박혔다.
얼마나 연습을 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돌연 허윤이 미소를 짓는다. 약간의 탄식과 깨달음이 섞인 묘한 미소를.
“하지만 뭔가 이상했어요. 그렇게 되면 너무 쉬운 문제가 되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실장님의 질문에 답이 되지도 못하죠.”
지금까지 올라왔던 지원자들과는 클래스가 다르다는 게 확 와닿았다. 이제껏 봤던 오디션이 그냥 커피라면, 허윤의 연기는 진짜 커피다.
그 순간 허윤이 들고 있던 책을 살짝 들어 보였다.
별거 아닌 동작인 것처럼 보이지만, 비스듬히 들린 책은 심사위원들에게 정확히 보여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보다 근본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민우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는 송승희 실장의 대사를.
이어 허윤이 결론을 내린다.
“인문학이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기가 끝났다.
하지만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진한 여운이 남았다. 그것은 민우만 느낀 게 아니다. 심사위원석에 앉은 모두가 그렇게 느꼈다.
한정현 감독의 눈에 만족감이 서렸다.
“연습 많이 했네?”
“적게 했다면 거짓말이겠죠. 이 드라마, 꼭 하고 싶습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나?”
지정 연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면접 분위기다. 허윤은 쾌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존경하는 사람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입니다. 조금이라도 닮고 싶다, 늘 그렇게 생각해 오곤 했는데…… 연기를 하면 더 닮아지지 않을까 기대하는 중이라서요.”
“뭐? 하하하! 이거 걸작인데? 박민우 교수님 팬이군. 뭐, 그거야 유명한 일이긴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지원했다고?”
“요즘 제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고요. 하고 싶은 일에 이유 같은 건 필요 없잖아요. 그냥 하고 싶은 거지.”
깔끔한 마무리였다. 고개를 주억거린 한정현 감독이 지정 연기를 지시했다.
“씬 273. 주인공 박진수가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는 상황이다. 수상 소감 부분 한번 해봐.”
“네!”
활기차게 대답한 허윤은 무서우리만치 표정을 반전시켰다. 두 눈에 감격이 차오른다. 조명 때문일까? 벌겋게 충혈된 것 같기도 하다.
“새벽같이 일어나 손수 만든 김밥을 들고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장사를 하셨던 그때…… 추운 겨울에 난로 하나 없이 좌판에서 산나물을 파셨던 그때…… 어렸을 때라 잘 몰랐습니다. 얼마나 힘든지도 잘 몰랐죠.”
감정 과잉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는 부분이었음에도 허윤은 말끔히 처리했다. 울면서도 우는 그런 묘한 표정을 지으며 대사를 이어나갔다.
“철없게도 어머니께서 어렵게 벌어온 돈으로 맛있는 걸 먹을 생각만 했습니다. 하지만 저도…… 이제 한 아이의 부모가 됩니다. 그래서인지 그때 생각이…… 많이 나네요.”
그러고선 고개를 살짝 떨구는 허윤. 마치 눈물이 흐르는 것처럼, 시선을 돌리며 눈가를 훔친다. 엄청난 연기력이었다.
하마터면 민우는 뒤돌아볼 뻔했다.
관객이 아니라 시상식에 참석한 관계자들의 모습이 보일 것 같아서.
“주연은 아무래도 정해진 것 같죠?”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우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 한정현 감독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압도적인 연기네요. 비전문가인 제가 봐도 정말 대단할 정도입니다.”
“아무래도 아역 시절부터 단련된 것들이 있으니까요. 가만 지켜보고 있으면 참 연기 스펙트럼이 넓다고 할까요. 대성할 만한 이유가 있죠.”
박수를 한 번 치며 연기를 커트한 한정현 감독이 말했다.
“수고했어요. 여기까지 합시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한 허윤의 얼굴엔 후회가 남아 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혼신의 연기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민우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잘했다는 의미였다.
문득 궁금한 것이 있어 민우는 옆자리에 있는 김명현에게 물었다.
“명현 씨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실로 가벼운 캐릭터군요. 청춘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연기였습니다.”
뜻밖의 혹평에 민우는 살짝 놀랐다. 반면 한정현 감독을 보니 김명현의 의견에 경청하고 있었다.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 민우가 다시 집중했다.
“하지만 우리가 미팅에서 내린 결론대로라면 적격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성장물이라는 컨셉에 잘 어울릴 만한 배우입니다.”
김명현도 나름 균형 있게 평가하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본인의 기준은 명확히 세워져 있었으니까.
주인공인 박진수 역 오디션이 모두 끝나고 잠시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정현 감독이 김명현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백 회장님께서 특별히 언급하신 배우가 있습니까?”
“아뇨. 모든 건 한 감독님께 맡긴다는 말씀만 있었습니다만.”
“그럼 결정됐군요.”
한정현 감독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는 필름이 돌아가는 중이다. 허윤을 어떤 구도로 카메라에 담으면 좋을지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나가고 있었다.